설렘의 무늬

2026.01.08

by 종이소리

며칠 전, 큰 아이 생일이었다. 서른을 맞이한 아이가 케이크 촛불을 끄더니, "와, 내가 서른이 될 줄이야! "하며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엄마는 내년이면 환갑이네?" 라며 또 까르르 웃는다.


“뭐? 환갑? 뭐래는 거니, 누가 환갑이야, 진짜? 벌써?”


나도 모르게 탁상 달력을 들추며 계산을 해보니 정말이다. 벌써 그렇게 되었구나. 별별 호들갑을 다 떨다가 무안함을 숨기려 커피포트에 물을 올렸다. 솔직한 심정은 여전히 호기심 많은 이십 대의 청춘인데, 언제 이렇게 나이를 불렸을까.


정말이지, 언제 이렇게 나이가 살이 쪘을까. 딱히 한 것도, 이뤄놓은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나이만 불어난 것 같아 어쩌나 싶다. 마음과 달리 몸은 예전 같지 않지만, 이름 모를 꽃을 만나면 쪼그리고 앉아 "안녕? 너는 누구야?" 인사를 건네고, 지하철을 타러 가는 길에 펼쳐진 숲을 지나다가 까치들이 폴짝폴짝 뛰며 먹이를 찾는 모습을 보면 걸음을 멈추고, 그들의 도전에 응원을 보내는 일도 여전히 마음 설레는 나인데.


"이건 정말 마법이라 해야 할 상황인 걸? 내가 환갑이라니...."


팔팔 끓는 소리와 함께 포트의 전원이 딸깍, 하고 꺼졌다. 마치 정신 차리라는 신호처럼. 요즘 딸아이가 계면쩍을 때 “데헷!” 하고 웃어넘기던데, 지금이 바로 그 말을 써먹을 찬스다.


“데헷! 환갑이래. 머쓱하게….”

"크크크, 엄마 왜 그러슈? 환갑이 뭐 별거라고. 우리도 서른이야, 엄마. 우리도 되게 어색하고 난감해."


세 모녀가 나이를 주제로 수다를 떨며 보낸 오후. 아이들이 각자의 공간으로 돌아가고 나는 거울 앞에 섰다. 많이 늘었네. 주름이라는 훈장이. 눈가에도, 이마에도, 입술 근처에도..


"참... 정직하게 그려놓았네.. 나이라는 시간이"


생각해 보면, 몸이 늙는 것이지 마음은 언제나 청춘이라는 말은 진리 중의 진리다. 진짜로. 정말로. 내 심정이 딱 그러하니까.


하지만, 나는 매 순간마다 철부지 아이처럼 들떠있는 내가 참 좋다. 그래서 다행이다. '한 뼘 밖에 안 되는 붉은 땅'¹에 초록초록 분홍분홍 동화의 숲이 더 많아서.


때문에 내게 '나이 듦'이란,

설렘의 무늬로 그리는 시간으로 가꾸어야겠다.



나이가 들어도
'청춘',
그 초록빛 맥박으로 뛰는 가슴이
내 영혼의 토양에 여전히 '설렘'이라는
낭만의 뿌리로 살아 있다는
증거니까.

그날의 풋풋한 뿌리가 키운
포근한 '낭만'이
그때의 일렁이는 눈빛에
담긴 열정의 '호기심'이,
나이 듦이라는 상실감을
오히려
여백의 뜰로 가꾸고
여유라는
꽃으로 피우니까.


그래서 ‘나이’만큼 정직하고 애틋한 인연도 다시없다는 생각으로, 거울 앞에 있는 한 여성을 바라보며 입술꼬리를 활짝 올리며 웃었다.

한 번 지나가면 두 번 다시 같은 모습으로 만날 수 없는 나이,
오직 지금 이 순간에만 허락된
유일한 순간.
그러니 무엇보다 소중한 나의 순간, 나의 세월, 나의 시간이다.
그리고 나만의 자격이며,
나만의 특권이다.
내가 만나는
지금, 이 순간의 나이란.
나이 쉰이 되던 해, 내 의지로 다시 태어나기로 했다

그래서 새로운 숫자의 인연을 마주할 때, 나는 그 낯선 나이에게 서먹한 인사 대신 환한 미소를 건네야겠다. 그리고 다가올 ‘환갑’이라는 나이에게 어떤 환영의 인사를 건네면 좋을지, 설렘의 펜으로 노트에 적어두자. 언젠가 이 마법을 다시 꺼내 볼 나의 내일 나이를 위해.


무엇보다 지나온 경험을 훈장처럼 휘두르며 잔소리를 늘어놓는 낡은 훈수보다, 시간의 흐름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나이의 등 뒤에서 그저 고요한 동행자의 보폭과, 곁을 데우고 지키는 벗의 맥박으로.


[설렘의 무늬에게]

"나이가 든다는 것은 나를 둘러싼 색채가 바래는 일이 아닐 거야. 오히려 겹겹이 쌓인 시간의 결들이 층층이 포개어져, 세상 어디에도 없는 더 깊고 오묘한 빛깔을 빚어내는 고결한 과정에 가깝지. 내 영혼 밑바닥에는 '청춘의 설렘'이라는 뿌리가 여전히 건재하기에, 내일의 나는 오늘보다 더 뜨겁게 세상을 탐색하고, 더 너그럽게 생(生)의 비바람을 사랑하노라 고백할 수 있을 거야. 그러니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나의 오늘, 그리고 기꺼이 마주할 나의 내일을 위해, 누구보다 먼저 '나'를 더 자주, 그리고 온화하게 챙기길 바라. 비록 육신의 보폭은 조금 느릿해질지라도, 내 마음의 청춘은 이 소중한 인연들과 더불어 매일 새로운 숲길을 산책할 거야. 나이와 나누는 이 은밀하고도 다정한 대화가 멈추지 않는 한, 나의 나이는 언제나 찬란한 설렘의 무늬가 될 테니까."

/2026년 쉰아홉의 나이에게. 김수경


'한 뼘 밖에 안 되는 붉은 땅'¹
유재주의 [공명의 선택]중에서


"50세를 기다리던 설렘의 무늬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