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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ojeong Kang Mar 18. 2016

파라쿤

(Hermann Armin von Kern, Good Friends)


퇴근하고 집으로 온다. 오늘도 별 다른 것이 없는 하루를 보낸 것 같다. 하지만 현관문을 여는 순간 오늘은 별스런 날이 된다. 파라쿤이 저기 있다. 아름다운 꼬리를 이리로 저리로 펼치며 위로  갔다 아래로 갔다 혼자서도 잘 놀고 있었다. 기특한 아이 같으니라고. 넌 참 혼자서도 잘 노는구나. 이 아인 내가 집에 왔든 말든 별 상관하지 않는 척한다. 어제저녁 파라쿤을 집으로 데려온 후 출근한 오늘, 헤어졌다 만난 그 날. 기념할 만한 첫날. 파라쿤은 날 반긴 게 틀림없다. 단지 설렘을 표현하기가 부끄러웠을 것이다. 나처럼. 


회사에서 가장 친한 친구, 아야는 일본에서 왔다. 히라가나 쓸 줄아는 사람이라면 이 친구 이름은 단번에 일본어로 쓸 수 있다. 아야에게는 두 마리의 고양이가 있는데 키키와 플루토이다. 아야가 십 년 넘게 키운 아주 무거운 고양이이다. 난 둘 중 한 마리만 겨우 들 수 있다. 둘 다 한꺼번에 드는 것은 진작에 포기했다. 그렇지만 아야는 두 마리를 한꺼번에 들 수 있다. 아야는 벌써 다 큰 아들을 대학에 보낸 엄마, 베테랑이다. 홀로 아들과 두 고양이를 함께  키웠다. 아들이 대학 가면서 그녀에게 남은 것은 그 두 고양이뿐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면 달려 나와 반길 줄 아는 인정 많은 강아지들과는 달랐다. 그 아이들은 늘 고고하고 본인들 중심으로 그 집에서 살았다. 필요한 게 생기면 아야에게 와서 얼굴을 비볐고 털을 날렸다. 며칠에 한번 있는 일이었다. 그런 아이들을 아야는 사랑했다. 난 그 아이들이 못마땅했다. 얘들아. 우리 아야는 너희들 밖에 없다고. 그렇지만 아야는 내게 이야기했다. 난 그런 도도한 아이들이 좋다고. 사랑과 돌봄이 필요 하지만 평소에 털도 스스로 고르고, 자기들끼리 싸우지도 않고 혼자서도 잘 노는 그 아이들이 자기를 닮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넌 뭐가 좋아 그런다. 고양이, 강아지, 앵무새, 혹시 뱀?


고양이. 비 오는 밤늦게 도서관을 나서는데 어디선가 아기 울음소리가 났다. 생뚱맞게도 도서관 화단에서 나는 소리였다. 필시 그 말로만 듣던 그 유명한 도서관 고양이 었을 것이다. 그 오싹한 기분 때문에 그게 정말 고양이인지 제대로 확인해보지도 못했다. 고양이일까 봐서가 아니라, 혹시라도 인간 아기일까 봐 못했다. 그 날 난 악몽을 꿨다. 


강아지. 초등학교 다닐 때 우리 마당에서 키우던 개, 길동이에게 종아리를 물렸다. 헐거워진 줄을 기어이 끊고는 달아나는 길동이를 쫓아갔는데 오히려 길동이가 나에게 달려들었다. 내가 날마다 밥 챙겨주었던, 가족 모두 많이 이뻐했던 길동이었다. 그렇지만 길동이는 그 밥이 입맛에 맞지 않았나 보다. 나를 물고 싶을 만큼 싫었나 보다.


앵무새. 왜 내 말을 따라 하는지 모르겠다. 새는 새의 본분을 다했으면 좋겠다. 예쁘게 울고 예쁘게 날면 그뿐이다. 초등학교 다닐 때, 병아리를 키웠었다. 토요일마다 교문 앞에는 병아리를 파는 아저씨가 계셨다. 엄마가 그렇게 사 오지 말라고 하셔도 난 매번 병아리를 샀고 그 해를 못 넘기고 그 병아리는 항상 우리 집 화단 어딘가에 묻혔다. 차라리 길동이처럼 도망이라도 가면 살았으련만 이 불쌍한 병아리는 새로 태어났어도 날 수가 없다. 날 수만 있었다면 하늘 어디론가 원하는 곳으로 도망갈 수 있었을 텐데. 아, 그리고 난 세상의 내가 아는 모든 새의 머리가 싫다. 부리도 싫다. 눈은 더 싫다. 내가 치킨을 좋아하는 이유이다. 


뱀. 동물의 왕국에서 이미 봐 버렸다. 먹이를 어떻게 삼키는지. 좀 비슷한 아이를 생각해 보자면 한 때 이구아나를 키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이구아나를 막상 키운다면 굉장히 징그러울 것 같다. 그렇지만 이구아나를 키우기 전까진, 그 이전에 이구아나를 내 눈 앞에서 직접 보기 전까지는 이구아나를 키운다고? 그거 멋진데! 할 수 있을만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더랬다. 몇 번 정도는 상상도 했던 것 같다. 내 어깨 위에 앉아 혀를 날름거리는 이구아나를. 


아야가 키키와 플루토를 키우는 동안 나는 여러 종류의 화분을 키우고 있다. 식물들은 햇볕과 바람, 물만 잘 주면 스스로 자란다. 잘 준다는 것은 많이 준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아이 각각 필요한 게 뭔지 잘 살펴야 한다. 춥고 배고파서 햇볕과 양분이 많이 필요한 아이도 있고, 햇볕이 많으면 타 죽는 아이도 있고, 매일 물을 듬뿍 주어야 목마르지 않는 아이도 있고, 한 달에 한번 정도 잊을만하면 주면 되는 마른 아이들도 있다. 마음 같아서는 딸기랑 체리 토마토도 키우고 싶다. 외롭지 않게 옆에 가지랑 오이도 있었으면 좋겠다. 빨간색, 주황색, 녹색, 보라색. 이렇게 색깔을 맞추기 위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좋아하는 채소들을 나열하다 보니 색깔이 이렇게 다양해진다. 무지개색 같네. 배고플 때 하나씩 따먹으면, 요리하고 싶을 때 하나씩 따서 조리할 수 있으면 이건 완전 유기농이 아닌가. 그날 기분에 따라 좋아하는 색깔의 채소를 컨셉으로 저녁 요리하는 것도 좋겠다. 그러면 뭐해. 우리 집엔 이런 것들을 키울 여유 공간이 없다. 창가가 너무 비좁다. 이미 다른 화분들이 그 자리에 살고 있다. 마당이 있든지, 옥상이 있는 집으로 이사 가고 싶다. 우리 부모님 댁처럼.


우리 부모님은 좁은 마당에 온갖 것을 키우신다. 부모님네 마당은 집 건물 주변으로 디귿 자로 나 있다. 대문과 현관 사이의 마당이 상대적으로 넓고, 대문 오른쪽과 현관 앞 쪽으로 화단이 있다. 그 집으로 이사올 때부터 있었던 석류나무와 은행나무. 그리고 그 사이에 있던 수국은 대문 오른쪽에, 앵두나무와 치자나무는 현관 앞 쪽에 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는 지금도 헷갈리는 철쭉 혹은 영산홍이 있다. 내가 어릴 적에 엄마랑 종종 뒷 산에 올라가곤 했다. 엄마는 이 나무는 뭐고 저 나무는 뭐다 설명해 주시곤 했는데 그때 항상 등장하는 예 중의 하나가 바로 철쭉, 영산홍, 진달래였다. 엄마는 매 년마다 설명해 주셨다. 그때마다 처음 듣는 듯이 듣는 딸에게 단 한 번도 화내신 적 없이 설명해주셨다. 우리 엄마의 인내의 상징인 철쭉, 영산홍, 진달래. 죄송하게도 여전히 이 것 하나만 기억난다. 철쭉과 영산홍은 먹을 수 없지만 진달래는 화전으로 먹을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우리 집 화단에 있는 것은 못 먹는 꽃이라는 것만 기억하고 있다. 나 정말 대단한 것 같다. 


그리고 옥상 군데군데 깻잎, 방아잎, 상추, 호박을 키우신다. 그러고 보니 그 보다 더 어릴 때 길동이랑 병아리랑 우리 집 마당 어딘가 있을 때, 그때는 현재의 부모님 댁이 아니라 그 전에 살았던 집에서는 딸기랑 토마토가 화단 한켠에 자라고 있었다. 지금도 기억난다. 딸기는 영양 생식을 한다. 딸기 줄기의 일부가 땅에 닿으면 그 부분에서 다시 뿌리가 나고 또 다른 개체로 자란다. 아마 “슬기로운 생활”인가 “자연”인가 그런 과목에서 배웠던 것 같다. 그때 부모님의 나이는 지금의 내 나이였다. 지금의 내가 그런 과일 같은 채소를 키우고 싶어 하듯이 우리 부모님도 그때는 그러셨던 것 같다.


시간이 훨씬 지나서 지금 부모님 댁 옥상은 한겨울을 제외하고는 깻잎, 방아잎, 상추, 호박으로 가득하다. 대학을 졸업하고 독립하기 전, 부모님과 함께 살 때까지만 해도 아침상에는 대부분 깻잎과 방아잎, 상추가 놓여 있었다. 엄마는 아침마다 새로 뜯은 깻잎과 방아잎, 상추로 우리를 먹이셨다. 우리 엄마가 만드신 땅콩소스와 다진 채소들이 들어간 특제 쌈장과 애호박과 두부, 감자, 양파를 넣은 된장찌개, 조기 구이 또는 고등어구이는 단골 아침메뉴였다. 친가, 외가 어르신들이 모두 제주도 분이셔서 우리 집엔 별별 희한한 종류의 김치와 젓갈들이 있었다. 친할머니께서 보내주신 것 중 내가 가장 좋아하던 것은 자리젓이었다. 미니 도미 혹은 구피를 닮았다. 그 조그마한 물고기들이 장 속에 섞어 누워있는 걸 하나 집어 밥 한 숟가락에 깻잎과 방아잎을 포개어 쌈밥으로 먹는 게 어떻게 그렇게 맛있었는지. 외할머니께서 보내주신 것 중 가장 신기했던 것은 갈치 김치였다. 굴 넣은 김치는 먹어 봤어도 생갈치를 썰어서 넣은 김치는 지금 생각해도 마냥 아련하다. 자리젓 대신 배추김치 한쪽과 그 배추김치 옆에 살포시 들어있는 갈치 한 조각을 넣고 먹던 쌈밥. 아, 먹고 싶다. 하지만 한 분은 이제 너무 나이가 드셨고 다른 한 분은 돌아가셨기에 이젠 먹을 수 없는 음식이 되었다. 아침마다 엄마, 친할머니, 외할머니 사랑으로 식사했던 추억이 있다는 것은 참 흔치 않은 삶의 축복이다. 아마도 이 기억 때문에 이 사랑에 대한 기억 때문에, 부모님과 멀리 떨어져 살면서도 바쁜 아침마다 끼니를 거르지 않고 꼭 챙겨 먹게 되는 것 같다. 오늘 아침도 어제 자기 전 끓여두었던 된장찌개를 먹고 출근한다.


아야를 만났다. 밤새 그 무겁디 무거운 키키가 자기 배 위에 앉아서 내려오기 싫어했다며, 플루토가 자기 이마를 또 긁었다며 아침 인사를 대신한다. 힘들었다고 이야기하는데 아야의 얼굴은 왜 웃고 있는지. 난 고양이가 싫다. 더군다나 털 날리는 그 어떤 것도 싫다. 사람 머리카락도 싫은데 동물 털까지 날리면 난 집에 들어가기 싫을 것 같다. 그렇지만 자기 아이 자랑하듯 인사하는 그녀가 왠지 부럽다.


자리에 앉아 곰곰이 생각한다. 나도 누군가를 집에 두어야 할까, 날 닮은 동물이 뭘까. 고양이, 강아지, 새, 아님 이구아나? 


퇴근길, 애완동물 가게에 들른다. 몇 바퀴 돌 다보 면마음에 드는 아이가 있을 것 같다. 고양이를 지나 강아지를 지나 앵무새를 지났다. 가장 안쪽으로 들어가 보니 물고기 수조가 한 벽을 차지하고 있다. 왼쪽 반은 바닷물에서 사는 니모 같은 물고기 들이 있고 오른쪽 반은 민물에서 사는 물고기들이다. 한참을 서 있었다. 다들 떼 지어 다닌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난 떼 지어 다니지 않으니까. 

            

뒤를 돌아보니 가벽 책장 같은 곳에도 물고기가 있다. 이 아이들은 커다란 수조에 여럿이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통에 한 마리씩 들어있다. 처음엔 바로바로 팔기 위해 미리 담아 둔 것인 줄 알았다. 알고 보니 이 아이들은 한 어항에 들어있으면 서로 죽인다고 했다. 혼자 살아야 살 수 있는 물고기라고 했다. 왠지 마음에 든다. 혼자 사는 사람끼리 너는 어항 속에, 나는 어항 밖에 살면 될 것 같다. 베타 피쉬 (Betta Fish)라고 한다. 이름까지 마음에 든다. 철자는 다르지만 베타 버전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정식 버전은 아닌 뭔가 불완전하지만 의미 있는 시작 같은 이름이 너무 마음에 든다. 


이 녀석을 집으로 데리고 온다. 베타 피쉬의 수컷은 파랗고 꼬리가 크고 화려하다. 마치 성긴 빗으로 꼬리를 빗어주어야 할 것만 같다. 이 녀석을 위한 먹이와 적당한 크기의 어항을 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이 녀석이 숨 쉬고 살 공간을 쾌적하게 만들어 줄, 물갈이 약품도 산다. 플라스틱 수초와 바닥재도 당연히 함께 산다.


두 손에 가득 사 와서는 설명 들은데로 어항을 준비한다. 그러고는 나의 파란 물고기에게 새 집을 선물로 준다. 자, 파란 물고기야. 이젠 여기가 너의 집이야. 잘 지내보자. 넌 파란색 물고기. 그러고 보니 딸기, 토마토, 오이, 가지를 키우면서 너까지 있으면 정말 무지개 색이구나. 웃기다. 


아. 이름도 지어주어야겠다. 무엇으로 하면 좋을까. 아야한테 한번 물어봐야겠다. 뭐가 좋을지. 파란 아이. 아, 파란 “짱”. 일본에서는 어린아이 이름 뒤에 “짱”이라고 붙인다고 했다. 아야를 어릴 때부터 알았다면 “아야 짱” 이렇게 불렀을 것이다. 아. 이건 여자아이에게 쓰는 말이었지. 그래. 나의 홈메이트 파란 아이는 남자아이니까 “쿤”. 그래 이제부터 나의 파란 아이는 “파라쿤”이다. 그러고 보니 “파랗구나, 파랗군”이라는 뜻도 되겠다.


안녕, 파라쿤. 먼저 손을 흔들었다.파라쿤도 꼬리를 흔들었다. 나도 반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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