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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지 Apr 03. 2019

작은 부분에 마음 쓰는 일을 계속해가는 사람이고 싶다.

안전봉은 아무렇지 않게 다시 세워졌다.

오늘 뒤샹 전시에서, 휠체어 바퀴에 가이드라인 안전봉 줄이 엉켜 우당탕탕 소리와 함께 사달이 난 일이 있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휠체어에 탄 남자분은 어쩔줄 몰라 죄송하단 말을 되뇌었고, 쏜살같이 달려온 가이드 분은 당황한 남자분을 안심시키려 연신 "괜찮습니다. 어서 정리해드릴게요." 하곤 쭈그려앉아 바퀴를 살폈다.

어두운 전시장에 사람은 붐비고, 엉킨 줄은 생각보다 잘 보이지 않아 오래 애를 썼다.  후레쉬를 켜고 비춰주던 나와 어떤 여자분, 남편분까지 넷이서 꼬박 15분을 씨름하고나서야 전동바퀴에 단단히 얽힌 줄을 풀어낼 수 있었다.

"아 이제 풀릴 것 같아요!" 하는 우리 중 누군가의 (아마도 모두의) 목소리에 바퀴는 돌아갔고, 넷은 저마다 아무렇지 않게 서로에게 고맙단 인사를 남기고 사라졌다.
남자분은 다른 전시실로, 가이드는 넘어진 안전봉 앞으로, 나와 부부는 감상 중이던 각자의 작품 위치로.

소란스럽게 일을 벌리고 싶지 않아 그저 가만히 각자의 자리를 지켰을 관람객들도 제자리를 찾아 움직였다. 아무 일 아니니까 아무렇지 않게 이동하는 당연한 그 모습이 나는 꽤 인상깊고 좋았다.


장애와 비장애 사이에 어쩔 수 없는 다름은 보일 수 밖에 없는 일인데, 그로 인해 생겨나는 다름을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아서. 그저 전시장에서 자주 일어날 법한 많고 많은 아무렇지 않은 해프닝 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하는거 같아서, 나는 그게 정말 좋았다.

 



누구나 언제나 불의의 사고를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늘 생각한다. 아주 건강하고 튼튼한 내가 한순간에 사고로 신체의 일부를 잃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특정한 누군가에게만 찾아오는 불행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예기치 못한 사고같은 거라고 말이다.

그래서 만약 우리에게 그런 일이 일어난대도 나는 다름없이 우리를 사랑할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당장 내 일이 아니니까 쉬이 그치고 만다. 그 생각들은 드문드문 스쳐갈 뿐, 내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제서야 알아챈거다. 휠체어를 타고 들어오는 관람객이 아주 많은데도, 바퀴에 너무나 잘 걸릴만큼 얇고 낮은 안전봉 같은 것들을.

그리고 그건 사실 주변에 아주 아주 많았겠지. 나만 몰랐던 많은 것들이 그랬을테다. 지금의 나에겐 아무렇지 않지만, 누군가에겐 수없이 많이 불편하고 죄송했을 일들이. 죄송할 일이 아닌데 죄송했을 그런 어떤 일들이 오늘따라 많이 생각이 났다.



생각하고 배려한다고 마음을 쓰지만 언제나 더 가까이 편하게 생각하게되는 건 주류의 입장에서니까. 내가 주류라서 쉽게 생각하고 바꾸게 되는 것들이 있다.

아주 오래전에 나눈 어떤 대화에서, 매장에 하나 둘 늘어나는 키오스크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점점 매장의 카운터가 키오스크로 대체되는 것이 노인과 같은 상대적인 미디어 약자에게는 어쩌면 서비스를 경험할 기회 자체를 박탈당하는 일일 수 있다는 주제의 이야기였다. )


그리고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된 것들을 느낄 때마다 속상한 마음이 든다. 누군가에게 더 나은 경험을 주고자 기획된 것들이 의도치 않게 누군가에겐 박탈감을 주었을 지도 모른다는 얘기니까. 그래서 디자인은 너무 어려운 것 같다고 그 대화의 끝에 주고받았었는데.


세상을 한번에 바꾸진 못하더라도, 작은 부분들에 마음 쓰는 일을 계속해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대단한 걸 하지 않더라도 마음을 잃지는 않겠다고. 정말 죄송해야 할 일에만 죄송해 할 수 있는, 그런 마음들을 쌓아가는데 도움이 되고 싶다고.




안전봉은 다시 아무렇지 않게 작품 앞에 자리하고 세워졌다.

나는 가만히 에탕도네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른 섹션을 관람하느라 일련의 사건은 조금도 알지 못하는, 잠시 헤어졌던 친구가 거기 있었다.



31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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