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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지 Apr 03. 2019

늘 내 태어난 날의 숫자가 퍽 맘에 들었다.

어떤 음력 생일날.

11월 22일.


나는 어려서부터 늘 내 태어난 날의 숫자가 퍽 맘에 들었다. 보기 좋고 가지런한 것이 참 예쁘잖아. 반으로 모아 접어도 같은 모양이니까. 나름의 어떤 심미안이 그 나이에도 있어서 그랬는지 모른다. 어쨌든 외우기 쉬우니까 말야. 친구들이 기억해주기도 쉽고.

그러던 어느 날엔가 음력 생일을 듣고 나서는 그 숫자도 퍽 예쁘다 생각했다. 요즘은 다들 양력을 세니까 나도 으레 그랬나보다 싶었는데, 나의 음력은 윤달이 껴서 4년에 한번씩 돌아오는 까닭에 양력을 세었다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확실하진 않다.
어쨌든 나는 기억하기 시작한 순간부터는 늘 양력을 세었으므로 별 감흥이 없지만, 여전히 어른들에겐 음력이 지닌 어떤 의미들이 있는 것 같다. 아무렴 어때. 태어난 것이 대수는 아니지만 나를 사랑하고 아껴주는 이들에겐 대수인 일임이 분명하니까. 고맙고 사랑하고 미안한 마음.

그래서 오늘. 음력 9. 30. 손 없는 날의 숫자가 둘이나 들어간 날에 태어난 나는, 이 와중에도 그 숫자들을 보며 운이 좋구나 여기는데, 가만 되짚어보면 사실 나는 그리 운명적이지 않게도, 의사선생님이 정한 날짜에, 수술로 태어났다.


뭐가 그리 튀고 싶었는지 엄마 뱃속에서 거꾸로 있다가 오랜 유도에도 결국 제자리로 돌지 않아 제왕절개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다.
꽤나 운명론자인 내가, 언젠가 사주가 궁금해 태어난 시간을 물었을 때,


너는 사실 의사 선생님이 다른 수술 없는 날이랑 시간에 맞춰 날짜랑 시간을 잡은 거니까, 정확한 사주라고는 볼 수 없을지도 몰라.


하고 흘러가듯 엄마가 꺼낸 말도 여전히 기억한다.
그러니까, 의도한 바는 아니었더라도 좋은 날 좋은 흐름을 타고 잘 나도록 수술 날짜를 잡은 의사 선생님께 감사해야 하는 걸까?

좋든 나쁘든 생일 즈음엔 늘, 오래 기억에 남을만한 일들이 자주 벌어지곤 했는데. 그게 다 11월은 다른 때보다 아주 행복하고 좋을 거라고. 왠지 좋은 일들만 있을거라고 괜한 기대를 품어서 그런거려나 싶다. 실망이 크지 않게 좋은 날들에 대한 괜한 기대를 않아야 하나 고민. 매 순간이 이미 좋은 날들인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스물네번째 이른 생일을 12분 넘기고 쓸데없는 의식의 아무말.


08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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