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미 <홀딩, 턴> / 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
요즘 챙겨보는 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 에서 두 주인공 타미(임수정 분)와 모건(장기용 분)은 결혼을 두고 갈등을 빚는다.
서로 사랑하지만 '결혼'이라는 제도에 두 사람이 묶이는 건 싫다는 타미와, 사랑하고 함께 사는 건 되는데 왜 결혼은 안 되는 거냐는 모건.
"같이 사는 건 괜찮고 결혼은 안되는 거 솔직히 이해하기 힘들어요."
"같이 사는데 결혼이 필요한건 이해가 잘 되고? 그건 왜 이해되는데? 우리가 함께 산다면 그건 사랑 때문이고, 난 그 사랑을 법과 제도로 묶고 싶지 않아. 개인의 감정의 일에 국가가 관여하는게 싫고 그게 내 가치관이야."
비혼주의자인 타미와,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싶은 모건. 둘은 상반된 가치관을 알면서도 서로를 향한 사랑을 멈출 수 없어 (혹은 만나다보면 둘 중 누군가의 생각이 바뀌리라 믿으며) 연애를 시작하고, 부딪힌다.
대화의 끝에 모건과 타미는 이렇게 말한다.
"법과 제도로 묶인다는 건 보호 받는다는 의미이기도 해요. 그게 왜 나빠요?"
"나쁘다고 안했어. 나는 생각이 다르다고. 그래서 그 제도를 선택하지 않는 거라고."
"알아요."
"아니 넌 몰라. 너는 지금 니가 일반적이고 네 선택이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잖아."
"그런 생각 한 적 없어."
"있어. 봐, 나만 해명하고 있잖아 지금. 네가 결혼을 하고 싶어하는 건 해명할 필요도 없잖아.
근데 난 결혼을 안 한다는 이유로 지금 너한테 이렇게 많은 걸 해명하고 있어."
"그러려던 건 아니었어요. 미안해요."
"알아 나도 미안해. 우리 계속 미안하겠지, 이렇게 서로.
언젠가 이렇게 싸울 줄 알면서 이 길을 선택했지 너도 나도. 그리고 지금 싸우고 있네.
네 말이 맞아. 안다고 해서 상처받지 않는 건 아니야."
여러가지 이유로 결혼을 선택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졌지만, 여전히 비혼은 우리 사회에서 소수의 입장에 위치하고, 그 소수의 위치가 때론 다수의 사람들에게 어떤 계급과 권위의식을 부여하는 형태로 작용하게 되기도 한다.(고 자주 생각한다.)
누군가의 선택과 개인의 결정엔 우위가 없지만, 아직 사회 안에서 많은 것들이 (특히 결혼이란 형태의 어떤 것들은) 의무나 책임처럼 느껴지기도 하니까.
타미가 결혼이란 제도를 선택하지 않는 것에는 이런 이유도 중요하게 포함돼 있지 않았을까.
하지 못하면 무언가 모자라고 부족한 사람처럼 느끼게 하는, 어쩔 수 없이 위치를 나누게 하는 그 제도가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결혼'이 싫다기 보다는 사회를 구분짓는 '제도'에 저항하겠다. 그리고 그것을 당당히 '선택'하지 않겠다. 하는 쪽에 좀 더 수렴하는 결심.
나도 비슷한 이유로 비혼을 진지하게 고려했던 적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 얘기하면 좀 웃기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홀딩 턴>이란 소설책을 읽고 나서.
결혼이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살면서 행복해지려고 했던 거라면 이혼에 대한 고민도 앞으로의 행복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당사자인 두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고 합의하는 순간 타당한 일이 된다.
- <홀딩 턴> 147p -
이야기는 고요한 아파트 안에서 이혼을 앞둔 지원이 과거를 회상하며 시작된다. 이혼장려(?)소설이라고 자극적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서유미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이별에 대해 적으려 했는데 쓰다보니 사랑 이야기가 되었다'고 했다. <홀딩 턴>은 이혼이라는 헤어짐으로 시작한 사랑이야기에 가깝다.
이별을 겪는 두 사람의 이야기와 상반되어 겹쳐오는 과거의 사랑이야기가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자주 책장을 멈추게 됐다. 너무도 사소하고 사소한 시작. 사랑도 이별도 모든 것은 너무나 사소했다.
가장 공감되고 기억에 남았던 건 두 사람이 퇴근 후에 싸우던 장면이었다.
지원은 외출하고 돌아오면 바로 씻는 걸 좋아했고, 영진은 자기 전에 씻는 걸 좋아했다. 그 날 저녁도 영진은 퇴근 후 침대에 누웠고, 지원은 "씻고 누워."라고 이야기 했다. "조금 이따가."라는 영진의 말에 다툼이 시작됐고, '더럽다'는 지원의 말에 영진은 "뭐? 내가 더러워?"라며 발끈한다.
생각해보면 둘은 그저 사소한 습관과 취향이 달랐을 뿐인데, 그게 어느새 누군가에겐 '견디지 못할' 더러운 점이, '이해하지 못할 단점'과 '싫은 점'이 되어버린거다.
그 장면을 읽고 '아 나는 결혼은 못 할 것 같아.' 하고 생각했다. 자신이 좀 없어졌다.
이렇게나 사랑했는데, 이렇게나 사소한 것들로 이렇게 쉽게 헤어지기도 할테니까.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기에 나는 너무 이기적이고, 나를 너무 사랑한다는 생각을 했다.
나를 사랑하고 아끼는 만큼 다른 사람들도 존중하니까, 이런 일들이 빈번히 일어나는게 결혼이라면 너에게도 나에게도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은지 모른다. 20여년이 넘게 오롯이 나로 살아온 사람들이, 맞추고 부딪히며 살아온 날보다 더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간다는게, 좀 막막해졌다. 그런 거라면 적당히 서로의 거리를 지키며 감당할 수 있는 테두리 안에서 널 사랑하는게 더 나은 사랑이 아닐까?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꼭 나의 모든 부분을, 전부를 다 알고 보여줘야 하는 걸까. 나도 가끔은 내가 밉고 모르겠는데 (심지어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가족이나 부모님도 여전히 알지 못하는 나의 어떤 부분들이 있는데 말이다.)
전부를 공유하는게 꼭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겠다고 생각했다. 서로를 속속들이 아는 것보다 보여주고 싶은 모습들을 보여주며 관계를 만들어가는게 더 건강한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그리고 그런 관계에서 결혼이란 건 어쩌면 걸리적거리며 규정지어진 이름뿐인 명칭.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에 다다랐다.
아무튼 지원과 영진 둘의 사소한 다툼은 씨앗이 되고, 감정의 골은 깊어지고, 둘의 마음은 '너는 말해도 변하지 않아. 날 이해하지 못해.'라는 생각에 이른다. 닫힌 마음은 덩달아 다른 많은 것들을 걸어잠그고, 오해는 깊어져 돌이킬 수 없게 됐다. 사랑해서 너의 많은 부분을 이해할 수 있던 것처럼, 사랑이 끝나면 매몰차게 그의 많은 부분이 미워지기도 하는 법이니까.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서 이해할 수 없는 건지,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해서 사랑하지 않게 되는 건지. 이 인과에서 순서는 중요하지 않은지도 모른다. 결국은 더 이상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단 이야기니까.
둘의 헤어짐이 가까워질수록, 만남과 시작의 이야기도 겹쳐져서 더 마음이 먹먹해졌다.
이렇게 예쁘고 따뜻했는데, 빛나고 아름다웠는데 결국 이렇게 되어버린게, 돌이킬 수 없다는 걸 또 알아서 아쉬움과 후회가 괜히 나의 어린 날들을 떠올리게 했다.
어쩌면 모든 관계에서, 적절한 순간 돌아서는 '턴' 스텝은 꽤 자주 필요한지 모른다.
아무리 가까운 관계나 가족이더라도 때로는 숨 고르는 적당한 거리와 여유가 있어야 하고, 나의 텅 빈 부분은 오롯이 내 스스로 직시하고 보듬어야만 채워질 수 있는 거니까.
스윙댄스로 만난 지원과 영진이 적절한 순간마다 서로 마주보고 턴을 할 수 있었다면, 손을 놓게 되는 일이 없을 수도 있었을까? 그럼에도 서로를 떠난 지원과 영진에겐 또 다른 스텝과 또 다른 스윙댄스, 또 다른 멋진 무대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 믿는다.
그렇게 세상은 다시 홀딩, 턴. 맞잡은 손이 잠시 떨어져도, 뒤돌면 네가 거기 그대로 있을 걸 알기에. 웃으며 경쾌한 스텝을 밟고, 시선을 맞추고. 그렇게 네 품에 또 다시 홀딩.
인생은 결국 더 나은 무대, 더 멋진 춤. 신나는 음악에 맞춰 더 아름다운 스텝을 밟기 위한 과정이니까.
진지한 고민 끝에, 홀딩턴이 쏘아올린 나의 비혼주의 선언은 3개월로 막을 내렸지만, 최근 WWW를 매우 재미있게 챙겨보며, 또 일년 전 이맘때의 나와 책을 떠올리며 다시금 많은 생각들을 했다.
지금은 완전한 비혼주의자는 아니지만 결혼주의자(?)도 아닌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일련의 고민들이 내가 결혼을 원한다면 그건 무엇 때문인지, 혹은 하고 싶지 않다면 그건 무엇 때문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좋은 계기가 돼 주어서, 이런 상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단지 외로워서, 혹은 안정을 찾고 싶어서 (비교적 최근까지의 내가 그랬다.) 결혼이 하고싶은지. 또는 <종이달>의 리카처럼 '명함에 적힌 직함과 이름은 자신의 극히 일부일 뿐인데, 어느새 자신의 일부가 완전히 자기 자신이 돼버린 게 아닐까 하는 막연한 공포가 들어서, 그 일부로 느낄 수 밖에 없는 일부를 완전히 잘라낼 수 있을 것 같아서' 결혼을 어떤 인생의 돌파구로 삼고 싶은건지 말이다.
(가쿠다 미쓰요의 <종이달>은 하고 싶은 얘기가 정말 많아서 다음에 <쇼룸>과 함께 다른 글로 다시 적겠다.)
그런 거라면 그런 공허함은 결혼으로 채워지지 않을테니까. 좋은 사람과 더 좋은 날들을, 그리고 때론 지치는 날들을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까지 조금은 결정을 미뤄둬도 좋을 것 같다고.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옳고 그른 것은 없다. 내 주변엔 행복하게 결혼해 혼자일 때보다 더 단단하고 멋진 삶을 이어가는 친구도 가족도 많다. 반대로 건너 건너 아는 지인 중엔, 마흔이 훌쩍 넘었지만 10년동안 자발적이고 안정적으로 결혼 없는 연애를 이어가고 있는 커플도 있다. 뭐든 더 다양한 형태의 관계와 다양한 모양의 가치들이 늘어나고 있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 결혼보다 중요한 건 가족의 의미와 형태, 그것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고민을 나누는 일이 아닐까.
아무쪼록 WWW의 타미와 모건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더 궁금해진다. 단순히 너무 사랑하니까 타미가 생각을 바꾸고 결혼하게 된다는 스토리만 아니면 좋겠어.
마지막으로 제일 좋았던 <홀딩 턴>의 문장을 남기며 총총.
솔직하자. 그저 내 마음과 감정에 솔직하고 진실하게 온 마음을 다하면 그 뿐. 이미 그 자체로 당신은 인생의 가장 멋진 춤을 추고 있는 걸.
우리는 스스로를 바꿀 자신이 없어서 헤어지는데 합의하지만 후회하게 될까봐 두려워할 정도로 연약하다.
제 마음을 알 수 없고 자신할 수 없어 상대에게 솔직하게 얘기해 달라고 당부한다.
- 서유미 <홀딩 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