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인간인가, 프리모 레비」
빅터 프랭클은 고백한다. 처절한 생존경쟁에서 살아 돌아온 우리는 그리 좋은 사람들이 아니라고.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그들은 더욱 냉정해져야 했다. 남들보다 더 건강한 척, 더 쓸모 있는 척해야 했다. 아니면 수시로 행해지는 선별작업에서 낙오되어 굴뚝의 연기로 사라질지도 모른다. 고된 고동과 추위,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고, 묽은 죽의 아랫부분을 타기 위해서 뒤에 서야 했다. 빅터 프랭클처럼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또 한 사람. 프리모 레비.
모두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방법을 찾아 삶과 작별했다. 기도를 하는 사람도 있었고 일부러 곤드레만드레 취하는 사람, 잔인한 마지막 욕정에 취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들은 여행 중 먹을 음식을 밤을 해워 정성스레 준비했고 아이들을 씻기고 짐을 꾸렸다. 새벽이 되자 바람에 말리려고 널어둔 아이들의 속옷이 철조망을 온통 뒤덮었다. 기저귀, 장난감, 쿠션, 그리고 그 밖에 그녀들이 기억해 낸 물건들, 아기들이 늘 필요로 하는 수백 가지 자잘한 물건들도 빠지지 않았다. 여러분은 그렇게 하지 않았겠는가? 내일 여러분이 자식들과 사형을 당한다고 오늘 자식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을 것인가? (15쪽)
아우슈비츠로 가는 기차 안의 그들은 이미 사람이 아니다. 분노, 두려움, 반항심, 자포자기, 절망 등 온갖 상념들은 무화되어 가는 몸뚱이처럼 쓸모없다. 집에서의 따뜻한 기억들은 슬픔을 배가시킬 뿐이다. 완벽한 행복이 없는 것처럼 완벽한 불행도 없는 것일까. 불편함, 구타, 추위, 갈증이 절망의 나락에서 그들을 건져 올린다. 좁은 기차 안에서 곁에 있는 사람들과 첫 만남이자 마지막 인사를 나눈다. 174517. 번호가 이름이 되고 과거와 미래를 지우고 현재를 살아내야 한다.
수용소는 우리를 동물로 격하시키는 거대한 장치이기 때문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동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곳에서도 살아남는 것은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똑똑히 목격하기 위해 살아남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는 최소한 문명의 골격, 골조, 틀만이라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가 노예일지라도, 아무런 권리도 없을지라도, 갖은 수모를 겪고 죽을 것이 확실할지라도, 우리에게 한 가지 능력만은 남아 있다. 마지막 남은 것이기 때문에 온 힘을 다해 지켜내야 한다. 그 능력이란 바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58쪽)
라 보에티의 "자발적 복종"에서 독재자는 노예들의 자유의지를 무력화하기 위해 갖은 술수를 쓴다고 말한다. 이름과 재산을 빼앗고 고된 노동과 만성적인 굶주림 속에 몰아넣는다. 하루하루 생존의 전쟁을 치르다 보면 무기력한 삶에 순응하게 된다. 거대한 독재자 아래 작은 폭군으로 군림하는 자들에게조차 저항할 기력이 없다. 궁핍과 육체적 고통 앞에서 습관과 본능은 침묵한다. 수용소안에서 삶을 위한 행위는 모두 정당하다. 선과 악의 경계도 무의미하며 생각의 여백이 없다. 그저 구조된 자와 익사한 자만 있을 뿐.(132쪽)
인간이하의 취급을 당하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존엄을 세우려는 의지, 자유에 대한 의지는 빛을 발한다. 그대들이 타고난 본성을 가늠하시오. 짐승으로 살고자 태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덕과 지를 따르기 위함이라오. (174쪽) 레비는 죽을 타러 가며 동료 장에게 단테, 신곡의 지옥편을 들려준다. 무화된 세상에서 선의 희미한 가능성을 보여준 로렌초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해 준다. 전쟁이 종말을 고할 때쯤 레비는 동료들과 난로를 구해서 불을 피운다. 다른 동료들이 그들에게 빵 한 조각을 더 주자고 제안한다. 이타성이 사라진 수용소에서 인간으로 변화하려는 순간이다.
절망 속에서 피는 꽃. 의사인 빅터 프랭클이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빼앗겼던 원고를 다시 쓰리라는 희망 때문이었다. 작은 종이조각에 떠오르는 단어들을 적어가며 삶의 의지를 다졌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도 참고 견딘다는 니체의 말처럼 그는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의미를 찾아갔다. 프리모 레비도 억압하려는 집단에 굴복하지 않았다. 형체가 없는 독일인 집단을 증오할 수 없었다는 말이 아프게 읽힌다. 600만의 유대인을 죽였던 이념집단은 형체가 없었던 것이다. 프리모 레비는 폭력집단에 이성으로 대응하는 것, 겪었던 일을 기록하고 영원히 기억하는 것만이 최선이라고 믿으며 절제된 언어로 담담하게 기록한다. 진실은 사라지지 않으며 결국 이긴다는 믿음으로.
쉰들러는 난봉꾼에, 유대인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려던 사업가였다. 그러나 독일인의 비인격 적인 모습을 목격하며 전재산을 털어 자신의 군수 공장의 근로자로 위장하여 유대인 1100명을 살려낸다. 차를 팔았으면 10명을 더 살릴 수 있었을 텐데, 나치당원 금배지대신 2명을 더 살릴 수 있었을 거라며 오열하는 모습은 인간적이다. 일제강점기 인권변호사였던 후세 다쓰지는 1919년 재일조선유학생의 변호를 맡는다. 비록 자국민들에게는 배신자의 낙인이 찍혔지만 그들은 "인간다움"을 선택했다. "정의"를 택했다.
프리모 레비는 악몽을 꾼다. 마음속에서 황폐한 슬픔이 서서히 자라난다.(89쪽) 처절한 고통을 이겨내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 아무도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악몽.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왜 매일매일의 고통이, 우리가 이야기를 하는데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장면으로 거듭해서 꿈으로 번역되는 걸까?(89쪽) 되풀이되는 악몽은 아무도 들어주지 않으리라는 강박 때문이다. 먹고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정치에 무관심했던 나는 요새 절절히 느끼고 있다. 나의 무관심이 우리의 무관심이 현재의 대한민국을 만든 건 아닌지. 절망 속에서도 꽃은 피듯이 국민들의 열망의 꽃은 필 것이다.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은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라는 영화 대사처럼 더 이상의 황폐한 슬픔이 자라나지 않도록 관심을 가져야 한다. 아무런 의문 없이 비인간적인 명령에 복종했던 수많은 아이히만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빅터 프랭클과 프리모 레비가 굴욕과 부도덕에서 살아 돌아와 증언하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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