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에 있는 서점, 가브리엘 제빈」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막연한 로망이 있다. 작은 서점이나 북카페를 갖고 싶은 것. 소박한 동네의 골목 어귀나 한적한 자연의 풍광 속에 있어도 좋다. 책과 함께 숨 쉬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마음을 북돋우며 살아가는 삶은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살아오면서 가장 영향을 준 책이 뭐였나요?"라고 묻지 않더라도 서재가 답해주리라. 작은 공간에서 삶과 삶은 연결되고 확장된다.
삶을 바라보니... 사람이 보이더라는 신문의 만평이 떠오른다. 누구나 각자의 애환을 짊어진 채 살아간다. 외로운 섬 같은 그들이 소통하고, 나누고, 덜어주는 그곳에 사람이 있다. 과거 또는 현재의 사람들과 소통의 공간이 되는 서점, 그곳에서 벌어지는 가슴 따뜻한 이야기가 몸의 온도를 조금 올려줄 듯하다.
인간은 섬이 아니다. 한 권의 책은 하나의 세상이다.
앨리스 섬의 하나뿐인 서점, "아일랜드"에는 의미심장한 문구가 쓰여 있다. 까칠한 성격만큼이나 책을 고르는 취향도 까다로운 서점 주인 에이제이는 불의의 사고로 부인 니콜과 이별한다. 간판의 문구와는 다르게 고독한 섬이 되길 자처하는 그에게 뜻밖의 선물이 도착한다. 서점에서 키워지길 바라는 문구와 함께 남겨진 아이, 그리고 버리려던 책더미 속에서 발견한 한 권의 책.
중년이 되니 물러진 것 같구나. 그러나 또한 생각건대, 근자의 내 반응은, 인생의 시기마다 그에 딱 맞는 이야기를 접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말해주는구나. 명심해라, 마야. 우리가 스무 살 때 감동했던 것들이 마흔 살이 되어도 똑같이 감동적인 건 아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야. 책에서나 인생에서나 이건 진리다. (57쪽)
아내를 잃고 마음의 문을 닫았을 때 무엇인들 눈에 들어올까. 에이제이는 아이를 키우며 조금씩 세상으로 걸어간다. 뒤늦게 발견한 책에서 감동하고, 그 책을 추천했던 긍정왕 어밀리아를 떠올린다. 감수성과 관심사를 공유하지 못하는 사람과 같이 살 바에야 혼자 사는 편이 낫다(18쪽)고 생각하는 어밀리아와 에이제이는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간다. 책이 맺어준 두 인연은 꽤나 달콤하고 뭉클하다. 이야기 중간중간에 딸 마야에게 보내는, 인생의 철학을 담은 짧은 서평은 진한 사랑이 배어 있다.
에이제이는 분홍색 파티용 드레스를 입은 마야를 보고 어딘지 익숙하면서도 뭔가 참을 수 없는 기운이 속에서 간지럽게 부글거리는 느낌이었다.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리거나 벽이라도 쾅 치고 싶었다. 술에 취한 기분, 아니면 적어도 탄산이 들어간 기분이었다. 미치겠군. 처음엔 이런 게 행복인가 보다 했다가, 이내 이건 사랑이라고 진단을 내렸다. 빌어먹을 사랑, 그는 생각했다. 얼마나 거추장스러운 감정인가. 그것은 죽도록 술 마시고 장사를 말아먹겠다는 그의 계획을 정면으로 가로막았다. 제일 짜증 나는 것은, 사람이 뭔가 하나에 신경을 쓰기 시작하면 결국 전부 다 신경을 쓸 수밖에 없게 된다는 점이다.
아니다. 제일 짜증 나는 것은, 심지어 엘모까지 좋아졌다 하는 점이다. (98쪽)
아이를 낳고 저절로 모성애가 샘솟을 줄 알았다. 엄마가 되면, 바다 같은 마음으로 아이를 품을 줄 알았다. 생물학적 부모는 아니지만, 에이제이가 아빠가 되어가는 과정을, 감정을, 작가는 섬세하게 다룬다. 천방지축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작은 생물체의 출현과 삐그덕거리면서도 그에게 적응해 가는 모습은 웃음이 난다. 과거의 나를 보는 것 같았으니까. 빌어먹을 사랑, 기꺼이 그 사랑이라는 수렁에 빠지길 자처하는 부모들의 마음을 솔직하고 익살스럽게 대변한다. 가슴이 뜨거워진다.
지금은 모성애라는 감정이 결코 자연스럽지 않다는 걸 안다. 독서가 취미가 아니라 노력해서 얻어지는 습관이듯, 엄마가 되어가며 아이와 성장한다. 나만을 바라보는 작은 생명체 앞에서 감정들이 충돌하고, 책임감으로 좋은 엄마가 되려고 했던 과거의 나를 말없이 안아주고 싶다. 그런 감정은 당연했던 거야, 잘해왔고 지금도 잘하고 있어.
서점이 없는 동네는 동네도 아니라고 일갈하는 니콜과 에이제이에게 우리 동네는 동네도 아니다. 굳이 책을 사지 않더라도 퇴근길에 무심코 들려 책들이 풍기는 냄새를 맡고, 어떤 인생을 만나게 될까, 하는 기대감으로 책을 펼쳐드는 기쁨을 누릴 공간이 동네에 없다.
"모비딕"을 좋아하나요? 그가 물었다.
"싫어해요" 어밀리아가 말했다. "그리고 내가 싫어한다고 말하는 것들은 많지 않아요. 선생들은 숙제로 내주고, 부모들은 자식이 뭔가 '고급'스러운 것을 읽는다고 즐거워하죠. 하지만 애들한테 그런 책을 읽으라고 강요하니까 애들이 자기는 독서랑 안 맞는 줄 알게 되는 거라고요."(121쪽)
때로는 적절한 시기가 되기 전까진 책이 우리를 찾아오지 않는 법이죠.(119쪽) 늦은 나이에 스스로 찾았던 독서로 참 행복했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외로웠던 나는 더 이상 혼자서도 외롭지 않다. 또 다른 세상과의 만남을 기대하며 책을 펼치고, 책으로 연결되어 가는 인연을 기대한다. 늦은 때란 없겠다. 더디 찾아온 듯 하지만, 아마도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마야가 에이제이에게 오게 된 건 우연이 아니다. 필연이 만든 인물들의 사연은 제 각각이지만, 값비싼 책대신 다시 살아갈 힘을 준 마야는 에이제이에게 행운이자 삶의 보물이다. 만남과 이별의 순간에도 마지막까지 주려한 건 '사랑', 그것뿐이다.
마야,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이 바로 우리야.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이 우리다. 우리는 우리가 수집하고, 습득하고, 읽은 것들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여기 있는 한, 그저 사랑이야. 우리가 사랑했던 것들,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들. 그리고 그런 것들이, 그런 것들이 진정 계속 살아남는 거라고 생각해.(304쪽)
#2017년 12월 16일 이 글을 썼다 #7년 뒤 북샵라벤더의 책방지기가 되었다 #경주읍성 동네책방지기 9개월 차 #읽고 쓰고 그림책 수업하는 전직 초등교사 #28년 간 가르치고 2년 전 명퇴 #강사로 출근 중인데 명퇴 왜 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