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연하고 아름다운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by 라벤더

책은 어떻게 나에게로 오는가. 지구상 어느 한 곳에 바늘 하나를 꽂고 하늘 꼭대기에서 밀씨 하나를 떨어뜨린다. 그 밀씨가 나풀나풀 떨어져서 바늘에 꽂힐, 그 기가 막힌 확률이 "인연"이라는,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의 대사를 소환하는 책이 있다. 나에게로 오는 책도 그런 기막힌 확률로 오게 되는 것은 아닐까.


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이 일이야말로 나의 온전한 러브 스토리다. 삼십오 년째 책과 폐지를 압축하느라 삼십오 년간 활자에 찌든 나는, 그동안 내 손으로 족히 3톤은 압축했을 백과사전들과 흡사한 모습이 되어버렸다. 나는 맑은 샘물과 고인 물이 가득한 항아리여서 조금만 몸을 기울여도 근사한 생각의 물줄기가 흘러나온다.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 나는 이제 어느 것이 내 생각이고 어느 것이 책에서 읽은 건지도 명확히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9쪽)



음습한 지하실의 절대고독에서 삼십오 년째 폐지를 압축하는 사람이 있다. 끊임없이 떨어지는 폐지속에서 인연처럼 그에게 온 문장들. 죽어가는 책에게 생명을 불어넣듯 그에게 머문 문장들은 세월의 흔적처럼 그의 일부가 된다. 버려진 명화는 책더미의 표지가 되고 맥주는 사고의 흐름을 돕는다. '나는 근사한 문장을 통째로 쪼아 사탕처럼 빨아먹고, 작은 잔에 리큐어처럼 홀짝대며 음미한다. 사상이 내 안에 알코올처럼 녹아들 때까지. 문장은 천천히 스며들어 나의 뇌와 심장을 적실뿐 아니라 혈관 깊숙이 모세혈관까지 비집고 들어온다.(10쪽)'



퀴퀴한 오물과 맥주냄새, 어두운 지하실에서의 지난한 노동에서 길어 올린 책들은 삶의 의미가 된다. 그는 활자를 통해 진정한 해방을 꿈꿨는지도 모른다. '나라면, 내가 글을 쓸 줄 안다면, 사람들의 지극한 불행과 지극한 행복에 대한 책을 쓰겠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는 것을 나는 책을 통해, 책에서 배워 안다. 사고하는 인간 역시 인간적이지 않기는 마찬가지라는 것도. 그러고 싶어서가 아니라, 사고라는 행위 자체가 상식과 충돌하기 때문이다.(12쪽)' 책을 사랑하는 현자의 인생이 담긴 짧은 책은 나를 긴 사유로 이끈다.



한번 책에 빠지면 완전히 다른 세계에, 책 속에 있기 때문이다.... 놀라운 일이지만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그 순간 나는 내 꿈속의 더 아름다운 세계로 떠나 진실 한복판에 가닿게 된다. 날이면 날마다, 하루에도 열 번씩 나 자신으로부터 그렇게 멀리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이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에게 소외된 이방인이 되어 묵묵히 집으로 돌아온다. (16쪽)



한탸는 일의 생산성을 따지는 사장에겐 골칫거리다. 느림을 동반한 사유의 시간은 낯선 세계로의 여행이다. '한 번 읽기'와 '다시 읽기' 사이의 시간이 사유의 시간이라고 말했던 신형철의 말처럼 근사한 문장을 통째로 쪼아 사탕처럼 빨아먹고, 작은 잔에 리큐어처럼 홀짝대며 음미한다. 읽고 사유하는 것은 그의 존재이유고 희망이었으리라.



느림과 사색을 허용치 않는 자동화기계는 한탸의 개성과 삶의 본질을 무화시킨다. 폐지를 압축하는 시끄러움 속에서 혼자만의 고독을 누렸던 한탸에게 자본주의 효율성은 엄청난 재앙이다. 한탸의 상황은, 고독과 사유를 잃어버린 기계화와 물질문명에 소외된 우리의 자화상이 아닐까. 삼십오 년째 함께한 압축기와 은퇴할 날을 기다리던 꿈은 산산조각 난다. 하루에 한 꾸러미만 꾸리며 그 안에 영감, 사상, 지식들을 담아두려는 희망과 함께. '내가 혼자인 건 오로지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 살기 위해서다. 어찌 보면 나는 영원과 무한을 추구하는 돈키호테다. 영원과 무한도 나 같은 사람들은 당해낼 재간이 없을 테지.(18쪽)' 폐지 더미에서 선물 같은 책을 발견하는 기쁨이 사라져 버린, 희망을 상실한 그의 마지막 선택은 자신으로 존재하고 싶었던 몸부림이었을까. 영원과 무한으로의 회귀.



모든 사물은 자신의 쓸모를 타고났다는 혜자의 본질론적 견해에 반해 무쓸모의 쓸모를 말했던 장자. '궁극 변화, 초월, 절대 자유, 해방을 말하는 장자의 가르침(장자 제1편 소요유 중에서)'은 규정지어진 쓸모 이상의 것을 상상하게 한다. 한탸가 폐지를 압축하며 하루하루 먹고사는 데만 몰두했다면 본질론적 견해에 머물렀을지 모른다. 실리주의와 더불어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를 꿰뚫어 보게(장자 제1편 소요유 중에서)'한 한탸의 독서는 실존의 해방이었을 것이다.


내가 보는 세상만사는 동시성을 띤 왕복운동으로 활기를 띤다. 일제히 전진하는가 싶다가도 느닷없이 후퇴한다. (69쪽)


"너무 시끄러운 고독". 폐지 압축공이었던 한탸가 사랑했던 게 책이라는 건 제목만큼이나 역설적이다. 예수와 노자와 노닐고, 미래로의 전진, 근원으로의 후퇴를 상상하며 압축기의 녹색과 붉은색 버튼을 눌렀다. 시시포스 콤플렉스의 현실에서 디오니소스적 관점을 지향했던 그의 삶. 사랑하는 책을 죽음으로 내모는 아이러니 속에서도 인공호흡처럼 새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은 정체성의 상실을 붙잡으려는 무의식에 다름 아니다. 격동의 시대에 전쟁과 이념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었가면서도 묵묵히 자신의 외길을 걸었던 한탸. 그는 집념과 저항의 상징이다. 생각 없음을 종용하던 노동 속에서 상상과 사유를 즐겼던 한탸는 비인간적 물질문명에 밀려 도태될 위기에 처한다. 흙덩이인양 폐지꾸러미를 처리하고 백지를 꾸리는 일은 그에게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문명과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속절없이 사라져 가는 것들은 얼마나 많을까. 효율과 합리의 굴레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사이 소중한 것들을 잃고 살아가는 건 아닌지. 그 소중함을 지켜려했던 한탸의 마지막은 비장하고도 처연하다. 삶의 마지막 순간을 책과 함께 했던 스토너의 삶이 떠오른다. 인간적이지 않은 하늘과 인간 저 너머의 연민과 사랑을 믿었던 한탸의 따뜻한 독백은 인연처럼 내게 왔다. 무가치함으로 치부되는 느림과 사유의 미학으로 인간성을 붙잡았던 한탸의 영원불멸의 고백. 반복되는 공허가 어디서 오는지, 정작 삶에서 중요한 가치들을 놓치고 살지 않는지를 되묻는다. '내가 아직 모르는 나 자신에 대해 일깨워줄 책들(16쪽)'을 발견하며 흥분하는, 책과 함께 고독의 맛을 음미하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소설이다.


외로움으로부터 멀리 도망쳐나가는 바로 그 길 위에서 당신은 고독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다. 놓친 그 고독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을 집중하게 해서' 신중하게 하고 반성하게 하며 창조할 수 있게 하고 더 나아가 최종적으로 인간끼리의 의사소통에 의미와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숭고한 조건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당신이 그러한 고독의 맛을 결코 음미해 본 적이 없다면 그때 당신은 당신이 무엇을 박탈당했고 무엇을 놓쳤으며 무엇을 잃었는지조차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지그문트 바우만,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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