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복, 버트런드 러셀」
남편의 배려 덕분에 혼자만의 명절을 보냈다. 며느리 다섯 중 둘이 아파서 못 오게 되어 정 씨끼리 명절을 보내자고 남편이 제안했다. 늘 곁에 있겠다며 남편인 듯 아닌듯한 드로잉 자화상을 이젤에 세워두고 갔다. 수호신? 혹은 집착?처럼 느낀 건 나만의 생각. 분주한 삶에서 낯설고 싶어, 책도 멀리하고 최소한의 곡기만 채우며 소파에 누워 삼일 내내 영화를 봤다.
명절 전에 출장 다니고, 아산까지 운전하고, 명절 음식 준비, 설거지를 하고 온 남편은 지독한 감기에 걸려버렸다. 우리 집 네 식구 중 나만 멀쩡. 애들도 아빠랑 전 부치고, 먼 길 오가느라 힘들었는지 감기몸살 중. 배려 덕분에 미안해져 버렸다. 세 남자에게 도라지청과 꿀을 탄 따뜻한 차를 먹이고, 지금은 대추와 생강을 푹 끓이고 있다. 계피가 있으면 좋으련만 시골이라 파는 데가 없다. 서울살 적엔 웬만하면 다 구할 수 있었는데, 마침맞게 원하는 걸 얻지 못하는 삶도 나름 괜찮다. 없으면 뭐 없는 대로.
가끔 보는 책이 있다. 버트런트 러셀의 "행복의 정복". 잔잔하지만 불안한 내 삶을 도끼처럼 깨워준 책이다. 이 책을 시작으로 게으름에 대한 찬양, 서양 철학사,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러셀의 책을 꼬리물기로 읽었다.
'원하는 것들 중 일부가 부족한 상태가 행복의 필수조건(32쪽)'임을, '어느 정도 권태를 견딜 수 있는 힘이 행복한 삶에 있어서 필수적(69쪽)'임을 알고 늘 새로운 자극을 추구하던 나를 놔줬다. 자기중심적 사고가 빚어낸 걱정과 불안에서 자유로웠고, 두려움을 관통하며 두려움을 키우지 않으려 했다. 예술, 글쓰기, 이타심, 자기애, 허영심, 집착, 권력, 경쟁, 질투, 죄의식, 도덕에 대한 그의 시각이 너무 명징해서, 불쾌하면서도 아팠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책 읽기를 싫어하는 사람에 비해서 훨씬 더 즐겁다. 왜냐하면 책을 읽을 기회는 축구를 관람할 기회보다 훨씬 많기 때문이다. 관심분야가 많은 사람일수록, 행복해질 기회는 그만큼 많아지고, 불행의 여신의 손에 휘둘릴 기회는 그만큼 줄어든다.(174쪽)
책은 일에서의 긴장을 이완하는 도구였다. 즐거움과 지적욕구를 채우다 보면 일상의 몰입이 가져온 감정의 찌꺼기는 어느새 사라진다. 한쪽으로 쏠리는 감정을 가운데로 가져다 놓는다. 사람과도 사물과도, 바람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거리가 필요함을 알게 한다. 현실에 발붙이고 일하지만 그 안에 매몰되지 않고, 나와 인생을 낯설게 만든다. 관계의 흐름을 막는, 부지불식간에 저지른 실수로 뒤뚱거려도 다시 일어날 힘을 준다. 더 지혜로워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행복의 필요조건인, 인생의 폭을 넓힌다는 견해에 공감한다. 내향성에 대한 시각은 동의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책과 함께한 삶은 풍요롭다.
아이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음을, 금지가 욕망의 허기를 만든다는 것을, 다른 이에게 해를 주지 않는 한 아이가 선택한 즐거움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아이의 모험심은 부모의 사랑에서 비롯됨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 사랑이 집착이 아니라 안정감과 행복감이라는 것도. 넘치고 부족했던 버석거리던 것들을 부디 사랑이라고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 아이들에 대한 희생의 시간을 내 행복을 위한 시간으로 바꿔나갔다. 안정감을 주는 존재가 되려고 마음 안에 묵직한 추를 내렸다. '바람직한 인간관계는 양쪽 모두에게 만족감을 안겨주어야(216쪽)'하기에 내 생각은 되도록 배제하고 친구 대하듯 존중하며 말하려 했다.
영화「원더」(2017)는 부모와 자식 간의 거리를 다룬다. 많은 인연 중에 부모와 자식으로 만난 기막힌 인연. 안면기형을 갖고 태어난 아이를 순순히 받아들이고, 평범하게 키운다는 것은 웬만한 내공 없이 힘든 일이다. 염려와 안타까운 맘이 가득한 엄마와 더 이상 외톨이로 키울 수 없다는 아빠의 판단으로 어기는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 우여곡절 끝에 사람들과 함께하는 법을 느리지만 조금씩 배워간다. 인상 깊었던 것은 부모의 양육태도였다. 늘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존중하고, 물어본다. 불행에 처했을 때 무한한 힘을 주고, 가장 의지가 되는 존재로부터 날갯죽지에 힘을 채워 넣은 아이는 용기를 내어 세상 밖으로 나간다. 긍정적인 성격은 외모에 대한 편견을 호감으로 바꿔간다. 양육을 하면서도 엄마는 논문을 쓰며 자기 행복을 만들고, 그런 엄마를 아이는 자랑스러워한다. 균형감을 잃지 않은 관계가 참 건강해 보였다.
러셀의 책은 한때 독박 육아로, 워킹맘으로, 완벽한 엄마가 되려고 했던 나를 돌아보게 했다. '최선을 다하면서 그 결과는 운명에 맡기는(254쪽)'
중용의 태도는 노력과 효율성을 강조하는 자본주의를 살아가고 있는 현시대에 질문을 던진다. 우주에서 바라보면 사소할 일에 감정을 낭비하지 말라는 부분은 장자를 떠올리게 한다. 체념의 쓸모가 자칫 비관주의로 보일 수 있지만, 러셀이 말하고자 한 것은 냉철한 진실의 고통을 견뎠을 때 마주하는 편안함이 아닐까.
그는 불행을 말하고 있다. 명확한 경계를 보여주며 또한 행복을 말하고 있다. '근본적인 행복은 무엇보다 인간과 사물에 대한 따뜻한 관심에서 비롯된다.(168쪽)'라는 긍정의 시각을 유지한다.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눈을 객관적으로 돌려 폭넓게 바라보기를, 진정한 관심을 갖기를, 인생이 살만하다고 느끼며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라고 말한다. 임시방편의 마취제 같은 힐링서가 아니다. 여전히 나에 대한 집착과 자유 사이를 오락가락하지만, 회피와 망각이 찾아들 때면 불현듯 이 책을 손에 쥐게 된다.
행복한 인생이란 대부분 조용한 인생이다. 진정한 기쁨은 조용한 분위기 속에만 깃들기 때문이다.(75쪽)
#행복의 정복_버트런드 러셀_사회평론 #조금 부족한 상태가 행복이라는 #2018년 9월 26일 작성글 #2025년 9월 18일 목요일 퇴고하다 #이동이 쉽지 않아 명절도 집에서 #북샵라벤더 책방지기 #경주그림책서점 #경주독립서점 #경주읍성 동네책방 #읽고 쓰고 그림책수업하는 28년 전직 초등쌤 #사진출처~예스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