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은 소설은 우리의 일부가 된다

「읽다, 김영하」

by 라벤더
독서는 누적적이어서 등비급수적으로 진행된다는 사실을 나는 재빨리 깨달았다. 독서를 할 때마다 읽은 내용은 그전까지 읽었던 것들 위에 덧쌓인다는 말이다. (알베르토 망구엘, 독서의 역사 중에서)


알베르토 망구엘은 눈먼 보르헤스에게 책을 읽어준다. 혼자라면 선입견 때문에 선택하지 않았을 책들이 그의 손에 의해 펼쳐진다. 보르헤스가 고르는 종횡무진한 독서는 신선한 자극이 되고, ‘읽어주는 독서’는 혼자만의 독서를 한층 넓고 깊게 만들어준다.


책을 읽다 어느 한 구절에 시선이 머무는 순간, 그 문장은 마중물이 되어 다른 책의 문장들을 길어 올리고 서로 버무려져 천천히 숙성된다. 보르헤스에게 책을 읽어주는 시간 속에서, 편견에 갇힌 독서는 경험으로 확장되고 축적된다. 그렇게 읽은 것들 위에 또 다른 의미가 포개지며, 독서는 더욱 풍요로워진다.


독서는 누적적이어서 등비급수적으로 진행된다는 사실을 나는 재빨리 깨달았다. 독서를 할 때마다 읽은 내용은 그전까지 읽었던 것들 위에 덧쌓인다는 말이다. (알베르토 망구엘, 독서의 역사 중에서)


지금 읽어도 새로운 것은 쓰인 당시에도 새로웠을 것입니다. 그들 역시 당대의 진부함과 싸워야만 했습니다. 고전은 당대의 뭇 책들과 놀랍도록 달랐기 때문에 살아남았고 그렇기에 진부함과는 정반대에 서 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낡거나 진부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책들은 살아남았고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고 후대로 전승되었을 겁니다. (16쪽)


당대의 진부함으로부터 결별했기에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 현대의 소설, 영화, TV드라마들이 "오이디푸스 왕"의 자장 안에 있다고 한다. 운명이든 운이든 이어지는 성공과 끝없는 추락, 그리고 자아의 발견. 형식만 다를 뿐 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되고 있다. 고전이야말로 창의적이고 현재적이다.


범인을 잡겠다고 나선 오이디푸스 왕이 결국 자신이 범인임을 알게 된 것처럼 나도 예외가 아닐 거라는 가능성이 틈과 여유를 만든다. 소설의 인물들에게서 나의 모습을 발견하며 내면은 분열하고 재배치된다. 화학작용과 더불어 경험이 확장된다. 인간이 바로 이야기이고, 이야기가 바로 우주입니다.(69쪽)


작가가 만들어놓은 미로를 기꺼이 헤매며 낯선 문제들 속에서 일상적이지 않은 감정을 겪는다. 전에 읽은 것들 위에 덧쌓이는 경험이라는 망구엘의 정의를 저자는 크레페에 비유한다. 한 겹 한 겹의 정신적 경험이 쌓여 이루어지는 고유한 내면. 켜켜이 쌓인 이야기의 겹은 그 무엇도 대체불가능한 나만의 우주가 된다.


한 편의 소설을 읽으면 하나의 얇은 세계가 우리 내면에 겹쳐집니다. 저는 인간의 내면이란 크레페 케이크 같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일상이라는 무미건조한 세계 위에 독서와 같은 정신적 경험들이 차곡차곡 겹을 이루며 쌓이면서 개개인마다 고유한 내면을 만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104쪽)


오르한 파묵은 "하얀 성"에서 말한다. 삶은 한 번뿐이지만 책은 다시 돌아가 이해하고 그것을 무기로 인생을 이해하게 된다고. 리어 왕이 "내가 누구라고 말할 수 있는 자 누구냐?"라고 존재의 모호함을 일갈했지만 오류와 우연 속에서도 부단히 알려고 노력하는 게 삶이 아닐까. 저자는 독자의 자아는 읽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기 어렵다(138쪽)고 했다.


일상을 통해서는 만나보지 못할 인물들을 만나며 이해의 지평을 넓혀간다. 독서는 두 번째의 삶이라고 했던 오르한 파묵의 말은 삶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소설을 읽어야 한다는 말로 읽힌다. 저자는 목적을 위한 독서를 경계한다. 이야기에 매혹되어 소설을 읽고, 읽은 소설이 우리의 일부가 되어 성장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어야 한다. 소설이라는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것.(140쪽) 자연이 우릴 위해 존재하지 않듯 소설과 더불어 함께 살아갈 뿐.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다.(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중에서)


밀란 쿤데라는 소설이 판단이 중지된 땅이라고 한다. 소설을 읽으면서 만나는 수많은 인물들의 성격과 행동에 우리는 도덕적 판단의 잣대를 들이댄다.


나만은 범인이 아닐 거라는 오이디푸스 왕처럼, 나는 복잡하게 나쁜 사람일 거라는 신형철 평론가의 말처럼, 좋다 나쁘다로 타인을 쉽게 재단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오만일지 모른다. 모두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라는 자각만이 구획 짓기의 연민이 아닌 함께라는 연민을 느끼게 하리라.


영화 "올드보이"(2003)에서 우진은 오대수에게 근친상간이라는 멍에로 자신의 복수를 완성한다. 받은 대로 돌려준 것. 그의 인생은 오로지 복수만을 위해 존재한다. 15년이라는 세월을 무색하게 하는 우진의 젊음은 성장을 멈춘 한 인간의 민낯이다. 타인에게 겨눈 칼끝은 결국 자신을 겨눈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그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오랫동안 고통을 받은 원인이 오대수 자신이라는 자각, 말 한마디의 나비효과로 타인의 상처가 증폭되고, 복수가 결국 거대한 공멸을 만든다. 복수가 당연하다고 동의하면서도 누나의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우진이 타인을 처절히 응징하는 모습은 어쩐지 섬뜩하다. 내면의 괴물을 만난 것 같아서, 내가 받은 상처보다 내가 준 상처가 어딘가에서 증식되고 있을 것 같아서, 오싹해진다.


개츠비의 공허한 허영이, 라스콜니코프의 참회하지 않는 악이, 뫼르소의 다른 실존이 우리의 모습일 수 있다. 수많은 이야기를 통해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는 독선을 해체한다. 밀란 쿤데라가 "커튼"에서 숨겨져 있던 '인간 본성'의 한 양상을 발견해 나가는 것이 소설 읽기라고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소설을 통해 수많은 자아와 만난다. 만난다.


가해자와 연대하자는 뜻이 아니라 스스로를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믿고 있는 독자들로 하여금 혹시 자기 안에도 이런 괴물이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만든다는 뜻일 겁니다. 가해자의 내면이 어느 정도 매력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한편 독자의 내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173쪽)


수천 권의 책을 읽고 스무 권 남짓의 저서를 남긴 작가처럼, 많은 이들이 비슷한 길을 걸어간다. 셀 수 없이 많은 이야기를 읽고, 이야기들 사이의 결을 찾아 잇고, 다시 빚어내며 서사의 세계를 한층 더 풍성하게 만든다.


우리 역시 소설을 읽을 때 “책의 우주”(210쪽)에 접속하며,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조금씩 넓혀간다. 현실을 비추는 고전의 우주에 접속하여, 미지의 땅을 경험하고, 그 위에 자신만의 지도를 만들어 간다.

#2016년에 읽었을 때는 단권이었는데 지금은 세 권이 합본으로 나온다 심지어 노란색:) #읽다_김영하 #읽다보다 쓰다_김영하 #독서의 역사_알베르토 망구엘 #정확한 사랑의 실험_신형철 #하얀 성_오르한파묵 #올드보이_반찬욱 #위대한 개츠비_F. 스콧 피츠 제럴드 #죄와 벌_도스토예프스키 #이방인_까뮈 #커튼_밀란쿤데라 #읽고 쓰고 그림책수업하는 전직 27년 초등교사 #북샵라벤더 책방지기 #경주그림책서점 #경주독립서점 #경주읍성동네책방 #bookshoplaven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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