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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용숙 Jul 02. 2021

꽃등지고 한 숨 자고

무당벌레 – 길상호


손바닥에 올려놓은 무당벌레

차근차근 손금을 읽다가

사람의 운명이란 게 따분했는지

날아가버리고 만다

등껍질의 점처럼 선명한

점괘 하나 기다리던 내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불어가는 바람처럼 무심히

무당이란 이름도 버린

벌레,

나는 언제쯤 나에게서 훨훨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집 뒤의 야산에 찔레꽃이 하얗게 폈다. 새순을 살짝 꺾어서 먹어 봤더니 어릴 적 먹었던 그 맛 그대로다. 입맛이 살아있다니, 감각기관의 기억은 잘 녹슬지 않는 모양이다. 상수리나무 잎이 햇빛을 투과해 얼굴빛을 연두로 물들인다. 그 보다 조금 아래 있는 갈참나무는 길쭉한 잎으로 햇살을 모으려 있는 대로 목을 길게 뻗고 있다. 숲은 바야흐로 오월의 눈부신 햇빛과 바람으로 숲의 어린 새순들을 눈물겹게 쓰다듬고 있다. 청초한 신록 속에서 청설모 다람쥐 박새 물까치, 내 검지손가락보다 작은 곤줄박이 새끼들도 무장무장 자라겠다. 나무꼭대기에서‘찌잇 쪼로로로로’  딱새가 쉴새없이 울어댄다. 오월이다.


  딱새가 하루 종일 울어댈 즈음 외갓집 꽃밭에는 작은 생명들로 넘쳐난다. 나비와 벌들이 무리지어 날아다니고 땅에서는 개미와 땅강아지, 지네와 지렁이 등이 흙을 파헤치며 햇빛 바라기를 한다. 어느 날 꽃밭에서 못 보던 것이 눈에 띄었다. 날아다니기도 하고 기어다니기도 한다. 해당화 꽃잎이나 꽃줄기에 발발대고 기어오르는 것을 손으로 톡 치니까 몸을 구부리며 땅에 툭 떨어진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벌레들과는 모습이 전혀 다르다. 심지어 모양도 동그래서 만지거나 잡기가 조심스럽다. 살짝 건드리니까 둥근 등껍질를 반으로 펴서 날아간다. 난다고 해서 나비나 벌처럼 멀리 날지도 못한다. 기껏해야 내가 몇 걸음 옮겨서 다시 잡을 수 있는 거리쯤이다. 나는 그 벌레가 예뻐서 멀리 쫒지 않고 데리고 놀기로 했다.  


 어느 날 나는 할머니를 따라 감자꽃이 하얗게 핀 감자밭에 갔다. 밭 전체에 목화솜을 얹어 놓은 거 같다. 할머니가 밭에 들어가자 저만치 밭고랑에서 꿩이 다다닥 앞으로 걸어나가다가 휘잉 날아오른다. 참새들은 내 발자국 소리만 듣고도 ‘포르릉’하고 바로 위로 치솟아 날아가는데 꿩은 왜 그렇게 뒤뚱대며 앞으로 뛰어가는지 모르겠다. 주변 야산에서 ‘뻐꾹 뻐꾹 꾸르르’하면서 뻐꾸기가 운다. 꿩이 날아오르고 사람 기척소리가 들리니까 ‘조심해 조심해’ 라고 다른 뻐꾸기한테 신호를 보낸다.


  할머니는 감자꽃들을 이리저리 들춰보고 어떤 감자이파리들은 툭툭 꺾어낸다. 밭 가장자리로 던져진 감자 줄기에는 꽃밭에서 봤던 벌레가 오글오글하다. ‘할머니 이게 뭐예요?’ 했더니 ‘무당벌레란다. 감자 이파리를 다 못쓰게 하는 벌레지’하신다. 나는 빨간 등껍질에 까만 점이 있는 이 예쁜 벌레가 나쁜 벌레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가끔씩 무당벌레는 할머니 머리 위나 옷소매에 붙어서 집으로 왔다. 나는 기꺼이 무당벌레를 손으로 집어서 화단에 가져다 놓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무당벌레가 모두 나쁜 건 아니었다. 화초의 진딧물을 잡아먹는 익충이 있는 반면 감자이파리를 초토화시켜서 감자 싹을 죽이는 해충도 있다. 나는 살짝 건드리면 죽은 척 하는 무당벌레가 귀여워서 해당화 이파리 끈적한 부분에 붙어있는 것들을 일부러 톡톡 건드렸다. 나의 일과는 무당벌레가 죽은 척 하도록 상황을 만들거나 그의 뒤집어진 몸을 바로 세워서 줄기에 다시 기어오르도록 하는데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만큼 무당벌레도 나를 좋아하는 거 같았다.  감자꽃이 피고 무당벌레들이 왕성하게 내 앞에 자주 나타날 무렵, 나는 저녁마다 작은 외할아버지집 라디오 연속극을 들으러 다녔다. 해는 점점 길어지고 저녁 무렵 바람은 미풍이어서 저녁먹고 난 후 작은 외할아버지 집에 놀러가는 건 기분 좋았다. 작은 외할아버지 집 마루 기둥에는 라디오 스피커가 달려있어서 매일 밤 라디오 연속극을 마루에서 들었다. 연속극 제목은 ‘삼현 육각’이다. ‘삼현 육각 울리면서어어~’하고 노래가 나오면 사촌이모들과 나는 노래를 따라 부르곤 했다. 나는 가끔 성우들이 하는 대사를 흉내 내면서 막연히, 내가 크면 연속극 주인공처럼 슬픈 사랑을 할거라고 생각했다.


  초저녁 어스름에 작은 외갓집에 갔다가 연속극을 듣고 다시 할머니 집에 오려면 일어나기 싫었다. 식구가 많은 작은 외할아버지 집에서 자고 싶었다. 하지만 사촌 이모들이 학교에 가야하므로 혼자서 대문을 열고 할머니 집으로 향했다. 대문을 열고 나오면 그동안 들리지 않던 개구리 울음소리가 갑자기 커다란 천둥소리처럼 들린다. ‘꾸꾸꾸우우’,  ‘개굴 개굴 개구울’, ‘맹꽁맹꽁 맹꽁 맹꼬오옹’ 하면서 운다.


 들판에 있는, 내가 아는 모든 개구리들, 두꺼비, 청개구리, 맹꽁이, 참개구리들이 울어대는 것이다. 그 순간 하늘에 있는 별들도 ‘와글와글’ 떠든다. 모두가 ‘응애야, 왜 저녁에 씻지도 않고 돌아다니니?’ ‘혼 좀 나봐라’ 하면서 내게 겁을 준다. 할머니께서 저녁 답에 ‘씻어라’ 하고 말씀 하신 걸 못들은 척 하고 작은 외할아버지집에 온 걸 알아챈 거다. 바람이라도 살랑 불면 머리카락조차도 눈을 가려서 나를 무서움에 떨게 했다. 나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할머니 집으로 냅다 달린다.


  그렇게 달려봤자 할머니집과 작은 외갓집은 바로 이웃에 있어서 금방 집에 도착한다. 대문을 열고 마당에 들어서면 사방이 조용하다. 달빛이 없을 때 마당은 네모로 뚫린 하늘과 검은 벽들이 사방에 쳐진 우물 안 같다. 소가 있는 마굿간에서도 아무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나는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이면서 안방 쪽으로 간다. 대청마루에 발을 올려놓으려 할 때 무언가 얼굴을 간지른다. 낮에 흘렸던 땀이 씻기지 않은 얼굴이라 손을 대니 쩍쩍 달라붙는다. 간지럽던 곳에서 동그랗고 딱딱한 것을 잡았다. 캄캄해서 잘 보이지 않지만 나는 안다. 바로 무당벌레다. 내가 잡으니 벌써 똥그랗게 다리를 몸통에 붙이고 죽은 척 한다.  나는 ‘지금은 안돼!’ 하고 단호하게 말하면서 무당벌레를 화단 쪽으로 슬쩍 내려놓았다. 


 달빛이 없는 밤 안방은 밤하늘 보다 더 캄캄하다. 나는 문을 열고 할머니 할아버지 얼굴을 밟아가며 내 자리를 찾아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감자꽃 이파리에 붉은 등껍질 지고 바쁘게 일을 하는 무당벌레 한 마리, 내가 보낸 하루의 고단함을 그대로 지고 있다. 쉬지 않고 움직이는 무당벌레, 넘칠듯 넘치지 않는 못 물처럼 우린 그렇게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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