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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용숙 Jul 02. 2021

풋 여름 아침

                                                       


초록편지 - 고재종
 

가뭄 끝에 장대비 오시자 
 그 매 다 맞으며 
 초록이 펄펄 춤을 추고 
 비 끝에 또 햇빛 나자 
 속창까지 씻긴 초록 
 그만 섬뜩하네 
 
 그 초록을 뚫고 
 뻐꾹-뻐꾹-소리 들려오니 
 아, 그리움의 끝은 어디인가 
 
 잔바람 불어와 
 나는 차라리 속살 열고 
 한잎 초록으로 반짝이리니


장마가 그쳤다. 창 가까이 다가 온 숲, 볼 살 오른 아기처럼 나뭇가지 마다 잎이 볼록하다. 팽창하여 터질 듯 초록의 숲을 뚫고 뻐꾹 소리 들려온다. 여름 아침, 텃밭에서 따온 여린 상추잎을 입에 넣다말고 창밖을 본다. 상추잎 같은 뭉게구름이 낮게 떠 있다.나는 상추를 먹거나 연두빛 상추잎을 보거나 ‘상추’라고 소리를 내는 것만으로도 눈이 가늘어지고 미소가 지어진다.


외갓집에는 동열이 아버지라는 나이 든 머슴이 있었다. 동열이 아버지는 애꾸눈이었는데 원래는 아니었다. 젊은 날 노름판에서 돈을 다 잃고, 노름꾼들이 내쫒자 바깥에서 창호지 문에 구멍을 뚫고 화투치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때 사람들이 가라고 소리치면서 ‘안 가면 눈 찌른다.’ 고 하니 동열이 아버지가 ‘찔러라,’ 하고 대들었다가 바늘에 눈이 찔렸다고 한다. 그때 눈을 방치한 게 애꾸눈이 되어버린 것이다.


동열 아버지가 언제부터 외가에 있었는지 모른다.그리고 언제 외가를 떠났는지도 모르겠다.할아버지만큼 나이 들어 보이지만, 할아버지가 동열아범이라고 불러서 나도 동열아범이라고 불렀다. 동열 아버지는 애꾸눈에 얼굴이 길고 뾰족해서 처음 인상은 무섭다. 하지만 놀다가 어쩌다 텃밭 부근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웃으면서 토마토며 쥐방울 참외, 오이 등을 툭 따서 ‘먹어봐’ 한다. 그럴 때 동열 아범은 맘씨 좋은 할아버지 같다. 


여름엔 동열아버지가 아침 먹기 전에 소꼴을 베어왔는데 지게 위로 풀을 자기키보다 훨씬 더 높이 쌓아 올려서 지고 왔다. 아마 아침마다 지게로 몇 짐을 져 날랐을 것이다. 할머니는 아침 먹기 전 나한테 대청마루를 닦으라고 하셨다. 나는 할머니가 빨아 준 걸레로 엉덩이를 치켜들고 한쪽 끝에서 반대 편 끝으로 한 번에 스윽 밀면서 마루를 닦았다. 걸레가 지나간 자리를 보면 마루가 물기에 깨끗해지는 거 같아 내심 내가 대견했다. 할머니는 가끔 ‘우리 응애 잘 한다’고 칭찬하면서 벽장에서 무지개가 그려진 동그란 사탕을 꺼내 주셨다. 아마 장날 사다놓으신 걸 꺼다.


동열 아버지는 여름에 삼베옷을 입었는데 언제 봐도 후줄근하게 늘어져 있고 발목 부분은 위로 접혀 올라가 있었다. 적삼에는 큰 주머니가 두 개 있었는데 짙은 고동색 담배파이프가 들어있었다. 일하고 들어오면 펌프를 자아서 발목에 붙은 개구리풀을 떼어내고 푸푸 하면서 세수를 한 다음 내가 닦은 마루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사각형의 짙은 잿빛 천 지갑에서 담뱃가루를 꺼내 파이프에 담아 불을 붙인 뒤 뻐끔뻐끔 담배를 피웠다. 


이렇게 담배 피는 사람을 경이롭게 가까이서 본 나는 담배 선행학습을 단숨에 마쳤다. 덕분에 초등학교 사학년 때 큰 오빠로부터 담배연기로 도넛 만드는 법을 쉽게 익혔다. 도넛은 담배를 한 모금 빨아서 입안에 연기를 모아 한참 오물오물 섞은 다음 입을 오므려 공중으로 내뱉는 거다. 오빠와 나는 누가 더 많이 예쁘게 만드는지 내기를 하곤 했다. 그뿐 아니다. 오빠는 달걀 만드는 법도 가르쳐 주었다. 입안에 담배연기를 넣고 입이 아플 때까지 오물거린다. 그런 다음 책받침 위에 입을 대고 연기풍선이 터지지 않게 입을 오므리면서 입을 살며시 뗀다. 그러면 책받침 위에 하얀 담배연기가 망이 씌워져 달걀 모양으로 선다.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큰 오빠는 그때 재수하고 있었는데 나한테 정말 열심히 가르쳐 주었다. 동열아버지의 담배 피는 모습이 멋있어 보였던 건 아니었는데 나는 왜 그렇게 유심히 보았던 것일까? 큰 오빠는 나의 선행학습을 어떻게 알고 아무거리낌 없이 도넛 기술을 가르쳐 주었을까? 다행히 그때 잠간의 탈선을 빼고 담배를 가지고 노는 일은 없었다.


동열아버지가 담배를 피우고 나면 할머니는 마루에 밥상을 차렸다. 동열아버지는 밥을 많이 먹었다. 할머니가 동열 아버지 밥을 뜨실 적엔 밥그릇의 삼분지 일정도 고봉을 더 얹으셨는데 밥이 흐트러질까봐 손에 물을 묻혀서 밥을 꼭꼭 눌렀다. 반찬은 별거 없다. 여름 밥상에 늘 있던 연둣빛 상추, 동열아버지는 상추에 밥을 푸짐하게 얹고 커다란 입에 상추쌈을 미어지게 넣고 얼굴에 웃음을 가득 머금은 채 우물우물 상추쌈을 씹었다. 동열아버지가 여름 아침 대청마루에서 상추쌈을 먹을 때 상추는 그냥 상추가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연둣빛 여름과일이었다. 


여름초록을 뚫고 뻐꾹 뻐꾹 소리 들려온다. 장대비 쓸고 간 진초록 나뭇잎이 바다 속처럼 깊다. 저 심연 속 그리움의 끝을 더듬어본다. 보리밥에 무장아찌, 풋고추와 호박된장국, 상추쌈과 몽글몽글 피어오르던 담배연기가 그리움의 끝에 서 있다.물기 빠진 상추잎 뒤적이며 쉬이 쌈을 싸지 못하는 여름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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