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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용숙 Jul 02. 2021

미루나무의 말씀

여름이다, 어쩔래?

미루나무 – 박재삼


미루나무에

강물처럼 감기는

햇빛과 바람

돌면서 빛나면서

이슬방울 튕기면서

은방울 굴리면서,

사랑이여 어쩔래,

그대 대하는 내 눈이

눈물 괴면서 혼이 나가면서

아, 머리 풀면서, 저승가면서,




  이 시(詩)를 읽는 순간 나는 입안에 동글한 사탕을 한쪽으로 굴리고, 눈망울을 아래쪽으로 내리면서 상대에게 ‘어쩔래?’하는 만화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그래 ‘사랑이여 어쩔래?’ 여기서 ‘사랑이여’를 빼고 ‘어쩔래?’만 소리내 보자. 입 바깥으로 ‘어쩔래?’ 하는 순간 어깨가 뒤로 제껴지고 배에 힘이 들어간다. 오른팔이 위로 올라가면서 주먹이 불끈 쥐어진다. ‘나, 이정도야’ 표정과 함께 나는 ‘어쩔래?’를 막무가내로 해대었던 때로 돌아간다.


  여름이 되면 외갓집 산과 들은 온통 초록으로 빛난다. 고추밭 붉은 고추들은 여름 땡볕에 더욱 빨갛게 익어가고, 콩밭 사이로 보이는 참외는 연한 노랑에서 진한 노랑으로 변한다. 옆에 매달린 초록색 쥐방울 참외는 한낮의 더위에 실신할 듯 타들어가 검정 초록으로 되어있다. 텃밭에는 오이와 토마토가 울타리기둥에 주렁주렁 달렸다. 나는 목이 마르면 수시로 텃밭을 오가며 오이를 따서 와작 베어 먹는다. 입안 가득 고이는 오이 향과 오이즙은 뛰어놀면서 흘린 땀방울들을 다시 몸속으로 싹 들어가게 한다. 토마토는 한 입 베어 물고, 베어진 자리에 입을 대고 주욱 빨면 토마토에 내재하고 있는 즙이 몽땅 올라와 허기진 배까지 채워준다. 이런 때 나는 온몸이 하나의 감각기관이 되어 모든 세포 하나하나로 충만감을 느낀다. 나는 자연 속에서 자연의 일부가 되어 주먹을 꼭 쥐고 자유로운 망아지로 다시 태어난다. 산속 새들이 불청객인 나를 보고 요란하게 지저귈 때, 그때 그곳에서 내가 취했던 포즈는 바로 ‘어쩔래?’였다.


  여름방학이 되어 외갓집에 온 오빠들은 작은 외할아버지 아들인 남일아재의 지휘아래 이른 아침에 공터로 모였다. 셋째와 넷째오빠가 함께 참석했다. 외갓집 동네의 초등학교 방학 숙제가 ‘마을조기청소’라는 것이다. 그 의미가 뭔지는 몰랐지만 아침 먹기 전에 모여서 국민체조를 하고 마을 청소를 해야 한다는 거였다. 나중에 내가 학교에 들어가서 알았지만 남일아재는 그 마을의 초등학교 애향단 단장이었다. 방학 중에 애향단장은 아이들을 모아서 마을 청소를 해야 했다. 오빠들은 처음에 빗자루를 들고 모였지만 청소는 하지 않고 놀다가 돌아갔다. 그 다음에는 빈손으로 모여서 도랑 건너 야산으로 올라갔다.


  야산은 큰오빠와 내가 옹기흙을 캐러 자주 다녔기 때문에 내게는 익숙한 터였다. 숲속 오솔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빈터가 나온다. 그곳에서 우리는 줄을 맞추고 남일아재 구령에 따라 국민체조를 했다. 그러고 나서 오빠들은 ‘진도리’를 하거나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했다. 오빠들이 서로 엉키고 뛰어다니던 것이 생각나서 이 글을 쓰면서 막내오빠에게 물어봤다. “그때 산에서 놀았던 놀이 이름이 뭐야?” 했더니 “진도리”라고 한다. 진도리는 두 팀으로 나누어 50~100m 떨어진 거리에 원이나 나무기둥으로 각자의 진지를 만들어놓고 서로의 진지를 탈환하는 놀이다.  축구꼴대 같은 자기 진지를 만들어놓고 상대선수가 못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반면에 상대의 꼴대진지를 먼저 점령하면 이기게 된다. 또 진지에 막대를 세워놓고 그 막대를 먼저 빼앗으면 이기게 된다. 이러니 자기 진지에 상대가 들어가는 것을 막는데서 몸싸움이 일어나는 것이다. 서로 상대의 진지를 뺏으려고 하고, 빼앗기지 않으려고 몸싸움을 하다 보면 얼굴에는 땀방울이 줄줄 흘렀다. 여기서 이긴 팀은 허리에 손을 얹고 자랑스런 얼굴로 ‘어쩔래?’ 하면서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그 놀이를 아침 해가 떠오를 때까지 했다. 나는 깍두기처럼 누구 편도 아닌 채 왔다갔다 하면서 놀이와 상관없이 돌아다녔다. 하얀 찔레꽃이 무더기로 피어있던 곳 가까이에 연한 분홍꽃들이 포도송이처럼 피어있다. 싸리꽃이다.


  여름 아침에 피어있는 싸리꽃은 이슬에 젖어 촉촉하다. 연한 분홍빛을 띤 작고 둥근 꽃잎은 여러 개 모여서 하나의 꽃송이를 이룬다. 아침 해가 뜨기 전 작은 꽃잎에 하얀 이슬이 맺힌 싸리꽃을 보면 나는 마음이 고와지면서 생기가 돌았다. 싸리꽃 냄새는 무지개사탕 냄새와 코털을 자극하는, 뭔가 짙어서 퍽퍽하다는 느낌의 냄새가 섞여 있다. 내가 커서 향수를 처음 접했을 때 생각했던 건 싸리꽃 향이다. 하지만 아직 싸리꽃 향을 내는 향수를 만나지 못했다. 싸리꽃은 여름 아침 숲속에서 일어났던 역동적인 오빠들의 움직임 속에 때 묻지 않은 순수함으로 내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다. 또 싸리꽃 향기는 어떤 첨가물도 들어가지 않은 천연의 꽃 냄새로 가슴에 남아있다.


  아침 햇살이 나뭇가지 사이로 비칠 때 남일아재가 ‘이제 그만!’하고 소리를 지르면 우리들은 놀던 곳 중앙에 모여 국민체조를 하고 놀이 마감을 했다. 놀이는 우리를 지치게 하지 않는다. 모두 아침을 먹고 다시 집 앞 공터에 모였다. 큰강에 멱을 감으러 가기 위해서다. 큰강은 외갓집에서 제법 멀리 떨어져 있어서 혼자서는 가질 않는다. 큰강으로 가는 길은 한쪽에 논들이 있고 반대편에 조그만 도랑 건너 야산이 이어진다. 둑길에는 구불대는 야산을 따라 미루나무가 띄엄띄엄 서 있다. 우리가 한 줄로 서서 미루나무 밑을 걸어갈 때, 나뭇가지에 붙은 매미는 목이 터질 듯 울어댔다. 미루나무에 강물처럼 감기는 햇빛과 바람은 나뭇잎을 돌면서 이슬방울을 굴리고, 반짝거리면서 튕기기까지 한다. 우리는 하늘 아래 가장 큰 미루나무를 경외하듯 매미조차도 잡으려 하지 않고 땅만 보고 걷는다.


  큰강에 갈 때는 앞서간 오빠들이 파놓은 함정을 피하기 위해 바짝 긴장해야 한다. 오빠들은 길 양쪽에 있는 풀들을 잡아당겨 매듭을 만들어놓았다. 괜히 까불고 떠들다가 매듭에 걸리면 그대로 앞에 고꾸라졌다. 여기에 걸려서 넘어진 오빠들은 부지런히 앞으로 가서 다른 풀매듭을 만들어놓았다. 나도 몇 번 넘어졌기 때문에 어디쯤 풀매듭이 있는지 감으로 안다. 길 양쪽으로 긴 풀이 무성하면 영락없이 풀매듭이 있었다. 오빠들은 자기가 만든 매듭에 다른 사람이 넘어지면 깔깔대며 허리에 손을 올리면서 ‘어쩔래?’ 하는 포즈를 잡았다. 뜨거운 열기에 데일 것처럼 런닝셔츠 어깨 언저리가 발갛게 달아오르는 여름, 미루나무 이파리 흔들리는 소리는 우리의 가슴에 바람 소리, 강물 소리로 서늘한 기운을 준다. 도도한 뙤약볕도 사랑의 표현이라면 여름 태양이 우리에게 ‘사랑이여 어쩔래?’ 하는지도 모르겠다.


  비 개인 여름 아침 뭉게구름이 걸려있던 미루나무 아래서 우리는 방학 내내 아침부터 밤중까지 뛰어다니며 ‘어쩔래?’를 할 수밖에 없는 놀이를 만들었다. 새카맣게 탄 오빠들 얼굴에서 유난히 하얗던 이빨 사이로 큰 소리가 나올 것 같다. ‘여름이다, 어쩔래?’


  내 유년의 기억 속에 미루나무가 문지기처럼 서 있다. 햇빛과 바람이 미루나무를 휘돌아 다녀가듯이 어리고 작기만 했던 우리도 미루나무가 서 있던 길을 돌면서 빛나면서 그렇게 자라났다. 여름 아침 풀 섶에 매달린 은방울을 튕기면서 ‘사랑이여 어쩔래?’에서 ‘사랑이여’를 빼보자. ‘어쩔래?’ 동심이 살아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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