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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enza Jan 11. 2017

환산할 수 없는 가치 : 백 엔의 사랑

난 여자이길 포기했어

'이러다가'라는 표현을 사용해본 적이 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을 갖고 있지만, 당장 죽을 것 같진 않아서 일말의 희망을 의식적 무의식을 가지고 있는 표현이었다. 뭔가 두렵지만, "설마 그러겠어?"라는 의미다. 이런 상황을 '노답'이라고 칭하고 싶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노답'이라는 표현은 정말 답을 모르기에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답을 알지만, 실제적 현상이 변하지 않는 상황이다. 다시 말하면, 답을 이끌어 낼 능력이 없는 것.


영화 《백 엔의 사랑》의 이치코(안도 사쿠라)와 카노(아라이 히로후미)가 맞닿들인 상황을 정의하라면, '노답'이다. 나이는 먹을 대로 먹었고, 능력도 없고 모아놓은 돈도 없다. 보통 이런 이들에게 남아있는 건 자존심 하나뿐이다. 마음속 끄트머리에 남아있는 자존심이란 뚝심은 아직 남아있었다. 32살이 되도록 변변찮은 직업도 없고, 집에서조차 도움이 안 되는 이치코였다. 집 안에 틀어박혀서 만화랑 게임만 하던 그녀는 이혼 후 돌아온 동생과 싸우다 홧김에 독립을 선언해버린다. 


사회생활은 해보지 않았고, 커리어란 엄마가 운영하는 도시락 집에 일손을 도왔던 것이 전부였지만 그것마저도 엉망이었다. 그녀는 한국의 다이소처럼 백엔샾이라는 곳에서 야간 알바로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그리고 백엔샾에 매번 들려 바나나만 왕창 사가는 손님 카노를 만나게 된다. 그 둘의 만남은 낭만적이지 않았다.


"내일 나랑 여행 갈래?"



이치코가 카노를 본 건, 한 복싱장에서 성실하게 운동하는 카노의 모습이었다. 자기와 다르게 어떤 명확한 목표를 두고 사는 모습을 동경했었을까? 자신이 동경했던 사람에게 갑작스러운 데이트 신청을 받게 된다. 37세의 카노, 32세의 이치코는 동물원 데이트를 하게 된다. 사실 데이트라기보다 끌려다니는 느낌이 강하다. 


"난 여자이길 포기했어" 이치코가 동생과 말다툼하다 툭 내뱉어진 말이다. 그녀에게 들려지는 모든 말들은 그녀를 무시하는 언어들이었다. 심각하게 낮은 자존감, 일말의 자존감을 세워주는 것은 어린 남동생과의 복싱게임에서의 승리뿐이었다. 그런 이치코에게 카노의 데이트 신청은 놀라운 일이었다. 이치코는 동경의 대상에게 묻는다. "왜 저한테 데이트 신청하셨어요?" 그러자 카노는 말한다. 


"거절할 것 같지 않아서... 화났어?"



앞서 말했듯이 "이러다가"라는 뉘앙스는 이치코와 카노에게 잘 어울리는 말이라 생각한다. 이치코와 카노의 단순한 문답은 그들의 심적 상태를 드러낸다. 아무에게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는 이치코의 질문과 항상 타인이 자신을 거부할 거란 불안함이 섞인 대답은 이어진 카노의 말에서 더 깊어진다. 결국 그 정도의 카노의 관심은 다른 괜찮은 여자에게 향한다.


제목의 백 엔의 사랑은 말 그대로, 값싼 사랑을 말한다. 그 누구에게는 별 볼일 없는 가치일지 모르는 백 엔의 가치도 그들에게는 삶의 방향성을 바꿀 정도의 가치가 됐다. 이치코에게 32세의 첫 사랑은 삶을 변화시키고, 명확한 목표를 두고 집중하게 만든다. 


돈의 가치에 비례하는 우리의 가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필연적이다. 좀 더 많은 자본을 축적하고, 좀 더 높은 자리에 오르려는 욕망의 구조는 이치코와 카노에게는 별 의미가 없다. 그저 자신에게 행복이 될 수 있는 지금 그 순간의 선택지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링에 오르기 전의 이치코는 나는 "백 엔짜리"라고 말한다. 별 볼일 없는 백 엔의 가치는 그 순간 환산할 수 없는 가치로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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