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심외경

by Wenza

내심외경(內心外境)은 밖의 모든 모습들은 내 마음의 모습과 같다는 의미다. 이런 말이 있다. "산은 산이오 물은 물이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는 말 마따나 산과 물은 불리는 그대로라는 말이다. 어떤 해석이나 화려한 표현은 필요 없다. 그것을 지칭하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지 않고, 그것을 지칭하는 행위 자체도 그저 흘려보내는 무의의 자세. 그것을 지칭하는 본인 자체로 그대로 비워 흘려보내는 통로가 되는 경지.


내심외경이라는 거창하고 심오한 말을 제목으로 내세우고, 그럴듯한 말을 하려는 필자도 우습기 짝이 없다. 몇 개월 동안 글도 쓰지 않고, 살아온 내게 뭔갈 써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드라마였다. 올해 봄에 방영됐던, <나의 아저씨>는 밤을 새우면서까지 봤다. 극 중 잘 나가던 청년이 갑자기 출가를 한다. 그 후 십여 년이 지났고, 청년 시절 헤어졌던 연인이 절에 찾아온다. 그때 말했던 말이 내심외경이었다.


세상이 나쁘게 보이고, 무언가가 나를 압박하는 듯 불안한 세상사는 결코 나를 향한 것이 아니다. 세상은 그저 순리대로 움직인다. 그것에 마음에 홀리는 건 자기 자신이다. 괴롭고 힘든 것은 세상의 문제가 아니고, 마음의 문제라는 단순하지만 명료한 진리.


이건 불교에서만 있던 가르침이 아니다. 초기 기독교 운동 중에 수도원 주의 운동이 있었다. 그들은 거룩함을 추구하였고, 악에 대적하는 공동체였다. 우리에게 익숙한 수도원은 영화나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중세의 수도원일 것 같다. 초기 기독교 수도원 주의 운동은 거룩한 교회, 즉 내부에서 광야-외부로 악마 퇴치라는 의미로 시작됐다. 광야로 떠나는 이유는 예수가 악마에게 시험을 받았던 곳이 광야였던 것이 컸다. 수도자들은 광야를 향해 본인들의 영적 고차원의 경험을 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 과정 속에서 예수가 악마의 유혹을 뿌리쳤던 것처럼 그들은 악마의 유혹을 뿌리치길 원했다.


그들의 바람과 달리 광야에는 수많은 짐승과 위험이 있었고, 광야로 떠나 살아온 이들은 많지 않았다. 종종 깨달음과 함께 돌아온 이들은 악마는 외부인 광야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악마, 삶의 문제는 내부 즉 마음의 문제였던 것이다.


현재 기독 사회에서 가장 큰 이슈는 난민과 동성애, 동성혼과 같은 문제다. 기독 사회는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한국 개신교는 교리에 얽매여 수많은 적을 만들었다. 교리는 수없이 많이 수정되고 보완되고 있다. 교리는 없어서는 안 되는 개신교회의 가치관이다. 심지어 교리가 성경과 엇비슷한 권위를 갖고 있기도 하다. 최근에는 한 신학교에서 동성애에 대한 옹호 운동을 했던 신학생이 정학 처분을 받았다.


개신교의 탄생 배경과 다르게 현 개신교는 현상 유지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가톨릭에서부터 분리되고 나왔던 개신교는 매 순간 개신(改新)했다. 그것은 시대를 읽고 그 시대에 신이 요구하는 가치를 지키는 것이다. 그것은 틀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었고, 예수와 부활, 소외된 이웃을 향한 것이어야 했다. 그러나 모든 문제의 근원 은 외부를 향하고 있으며, 내부는 거룩한 공동체라 자칭한다. 기본적인 선교학도 그렇다. 거룩한 기독 공동체에서 거룩하지 못한 외부를 향하고 있다. 이렇듯 역사 속에서 기독교는 거룩한 내부로부터 외부를 거룩하게 하는 공동체로 변했다.


말처럼 기독공동체가 거룩할까? 내부에서 외부를 향하고, 외부를 적대하는 공동체는 내심외경의 가르침을 잊고 있다. 아니 알고도 모른 척한다. 이 것이 더 나쁜 것이다. 시대는 변하고 있고, 거룩함은 결코 내외부에 있지 않다. 거룩함이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내심외경. 모든 것은 마음의 거울이다.


혐오의 대상을 주창할 수록, 그 속에 혐오만이 가득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게 내가 기독사회로 돌아가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단순함과 사고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