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가 로마의 박해로부터 벗어나고, 로마의 국교가 되었을 무렵부터 기독교에서는 중심을 잡을 필요가 있었다. 그간 유럽 전역에 퍼져있던 다양한 성격의 기독교 공동체들을 하나의 기준과 교리로 통일해야 했다. 가톨릭, 말 그대로 보편성, 일반적인 교회가 되어야 했다. 가장 우선시했던 것은 정경확립 작업이었는데, 기독교 테두리 안에 있는 모든 공동체가 동일한 성경을 봐야 했다. 이 과정에서 정경과 외경이 나뉘고, 권위 있는 문서(현재의 정경)와 그렇지 않은 문서(외경 및 정통적 신학의 방향과 다른 문서들)가 달라진다.
정경이라는 기준이 생김으로 인해, 그 외에 외경들은 권위를 잃고 금서 취급을 받는다. 정경이 확립된다면, 기독교를 관리하고 대표할 만한 책임자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책임자가 기독교 지식과 영성이 만인에게 인정을 받아야 하고, 대표자의 족보도 합법적이어야 했다. 최초의 교황은 성 베드로라 인정받고 있다. 성 베드로로부터 이어져 온 신학적인 족보가 있어야 했다.
"하나님은 움직이십니다."...."성 베드로도 결혼했잖아요."
성경에서 베드로의 모습은 가톨릭에서 말하는 교황 무오의 모습과는 다르다. 베드로는 예수를 부인했고, 예수의 승천 이후에도 이방인들과 식사 중에 예루살렘 파 초대 기독교인들이 가까이 오니 도망가는 모습도 보인다. 사도 바울은 그런 베드로의 모습을 질책하기도 했다. 베드로 조차 죄인이었다.
영화 <두 교황>은 현 교황과 다음 교황의 대화와 나눔으로 진행된다. 현 교황인 베네딕토는 보수적인 입장의 사람이고, 프란시스코는 진보적인 입장의 사람이다. 각자의 신앙과 기준은 경험 속에서 나타난다. 독일 사람인 베네딕토는 원칙과 기준이 중요했고, 그 기준에 의해 살아가는 사람이다. 사람보다 규칙이 먼저가 되었을 땐, 어떤 상황에서는 가혹할 수 있다. 프란시스코는 아르헨티나 사람이고, 오히려 서민적인 삶을 찾고 기준과 원칙이 교리 중심이 아닌 사람 중심으로 움직인다.
극 중 두 교황의 입장은 결코 개인과 집단의 관점으로 보기보다는, 개인이면서 슈퍼에고로서 존재해야 하는 딜레마의 문제다. 자아를 유지하면서, 초자아여야 하는 모순적인 존재가 교황인 것이다. 규칙과 교리를 수호해야 하는 교황은 초자아를 유지하면서도 집단 내에 생기는 어둠은 감추는 폐쇄적인 인간적인 자아도 공존하고 있다. 더불어 신과의 소통으로 자유로워야 하는 영적 지도자이기에 자유롭지 않은 존재인 것이다. 영화는 두 교황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며, 그들도 자아를 유지하는 인간임을 강조한다.
역사는 계속해서 변화하고 개혁한다. 그 과정 중에 인간은 선택을 하고, 무엇이 옳은 것인지 모를 어떠한 결과가 도래할지 모를 일을 기다린다. 권력자의 선택은 그렇기에 더욱 무겁고 고귀하다. 그들의 선택에 따라 수없이 많은 이들의 기쁨과 슬픔을 판가를 수 있기에... 한 종교의 수장의 권력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들의 흔들림은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큰 상처와 아픔을 주고 있다. 물론 그들은 이겨내고 신 앞에 겸손하게 살아가겠다만, 그들의 잘못은 결코 잊힐 수 없는 흔적이다.
우리는 가끔 기준과 원칙이라는 슈퍼에고에 제압당하곤 한다. 그 규칙을 어기거나 벗어나는 것도 그들의 선택이고, 책임이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고, 모든 선택은 후회와 책망을 낳는다. 세상은 불공평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들면서, 모든 것을 얻고 싶은 욕망도 든다. 두 교황은 각자 다른 삶과 다른 선택을 했고, 돌이킬 수 없었다. 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고, 앞으로 교황의 권위가 어떻게 묘사될지 궁금하고 기대된다.
좀 더 나은 삶을 살길 바라며
마땅히 선택해야 할 순간이 지금처럼 앞으로 올 것이다.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자기 자신도 보기 싫은 본인의 모습을 마주할 때, 우리는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