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 권리와 시뮬라크르 : 채피

by Wenza

최근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결로 인공지능이 사회적인 파장이 커졌고, 인공지능에 대해 경고하는 메시지를 갖고 있는 영화나 현 과학에서 인공지능의 발전이 어느 선까지 도달했는지 주목을 받았다. 《터미네이터 시리즈》, 《A.I.》, 《아이로봇》등 인공지능과 로봇의 발전이 사람에게 어떤 영향과 고민거리를 주는지 경고하고 있다. 그렇다면 본 영화 《채피》는 다른 영화와 동일한 주제를 가지고 있을까? 다르다.



영화《채피》는 범죄가 끊이지 않는 요하네스버그에 인간 경찰의 죽음이 날로 많아지자 로봇 경찰을 개발해 투입하기로 결정한다. 로봇 경찰을 투입함으로써 범죄율이 급감했고, 경찰 사상률도 낮아졌다. 로봇 경찰을 개발한 무기회사의 개발자 디온은 무기 개발보다는 인공지능에 대한 환상으로 가득했다. 그에 반해 개발자 빈센트는 스카우트보다 더욱 강력한 로봇을 만들어야 한다고 어필하지만 사회는 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인권이라는 표현은 정치와 사회문제를 다룰 때 자주 사용하는 단어이다. 사람이 태어나면서 기본적으로 가지는 고유한 권리를 말한다. 서구 문화와 동양 문화에 대해 단순하게 나눠보면 인간 중심(서구)의 문화인지와 자연중심(동양)의 문화이다. 본인은 모순적이게도 서구 문화에 익숙해서 인간 중심적인 과거 역사의 모습을 예로 들겠다. 중세 때만 해도 인간은 자신의 공동체 외의 다른 단체에 대한 적개심이 많았다. 또한 지구에는 신의 자녀인 인간만의 터전이라고 믿고 있었다. 더 나아가 산업혁명 이후 인간 중심 사고가 심화되어 자연을 생명이 아닌 발전의 도구로만 생각한다. 결국엔 우리에게 익숙한 환경문제와 지구온난화의 급속화를 초래하게 된다. 이후 인간 중심적-남성 중심적인 역사를 반성하고, 여성주의와 환경주의 운동이 일어난다. 더불어 인간이 누려야 할 가치와 권리에 대한 강조도 심화되고 있는 실황이다. 이런 과정에서 환경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동물들의 권리보호 운동도 일어나고 있다.


도대체 뭔데 구구절절 지루한 얘기를 하고 있느냐고? 영화 《채피》는 로봇의 권리에 대한, 정확히 말하면 인공지능에 대한 권리를 말하고 있다. 영화 속에서 스카우트 22번은 잔 고장이 많은 폐경찰 로봇이다. 그런 로봇에게 디온은 완성된 인공지능을 탑재하면서, 영화가 갖고 있는 메시지를 던지기 시작한다.



채피는 사람의 성장과정에서 겪는 다양한 지식과 경험을 하게 된다. 교육도 받고, 모방도 하면서 채피는 또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성장하게 된다. 영화 속 갱스터 요란비는 채피를 키우는 엄마다. 그녀는 채피를 자기 자녀처럼 대하는 데, 그 과정에서 채피의 정체성이 확립된다. 채피가 집으로 돌아온 후 요란비는 채피에게 동화를 읽어준다.

네 모습은 상관없어
안에 무엇이 있냐가 특별한 거야
그것이 널 다르게 만들어
그 안에 네 영혼이


그녀의 말로 인해 채피는 자신의 가치에 대해 의심을 하지 않는다. 최근에《트랜 센더스》라는 영화가 개봉한 적이 있었다. 그 영화는 조니 뎁 주연으로 미래에 대한 경각심과 환상을 그려냈는데, 한 인간이 결국 디지털화되어 정보화시대에서 신과 같은 존재가 되어서 실체화의 과정까지 보여주었다. 더불어서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모방에서 모방의 과정을 보면서 쟝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 개념을 언급했었는데, 본 영화 속에서도 모방의 모방으로 결국에는 원본과 사본의 차이가 사라지는 신비를 보게 된다.



시뮬라크르라는 표현은 모방을 의미하고 있다. 보드리야르는 산업발전과 미디어 발전을 보면서 더 이상의 실제는 의미가 없을지 모른다라는 의미의 주장을 한다. 원본을 복사한 사본이 디지털화되어 완벽하게 원본의 아우라를 뛰어넘을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경고한 것이다. 더 이상 무엇이 원본이고 사본인지 모르는 이 사태. 보드리야르가 말한 시뮬라크르다. 《채피》는 이를 실현한다.


미래학자 짐 데이토


짐 데이토라는 미래학자가 로봇 권리 장정에 대한 필요성을 말하고 있다. 우스운 말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사실이고 우리가 준비해야 할 또 다른 미래의 모습이다. 인권이라는 표현은 대상에 대한 권리보호를 위해 사용된다. 그러나 더 깊이 사유해보면 인권은 그 대상에 대한 가치 이전에 인간 스스로의 태도의 문제를 지적하는 거다.


짐 데이토가 로봇 자체의 권리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인간이 생명과 자연에게 폭력을 무차별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인권의 역할이듯이 로봇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인권은 자신 외의 존재에 대한 태도를 말한다. 내가 생각하는 인권은 나 외의 것들에 대해 폭력을 사용하지 않으며, 대화와 소통으로, 더 나아가 공감하는 전 지구적 동행 관계를 위해 있는 개념이다. 그렇기에 로봇 인권이 언급되거나 환경운동이나 여성운동의 발발하는 이유도 혐오가 아닌 동행하는 관계, 동고(同苦)하는 관계, 이해하고 배려하는 관계를 위한 마라톤이 아닐까?



닐 블롬캠프는 영화《엘리시움》의 감독이다. 《엘리시움》이 기이한 수직관계에 대한 디스토피아적 선언이라면, 영화《채피》는 폭력과 공포로 다스리는 사회에 대한 불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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