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동물의 가장 큰 차이가 무엇인가? 우리는 보통, '이성'이라고 말하곤 하죠. 이는 하나의 이원론적인 생각입니다. 즉, 정신과 육체를 분리하여 서로 대립되는 관계로써 이해하는 거죠. 영화 《해무》에서는 인간이 극단적인 상황으로 밀려났을 때 나타나는 인간들의 생존을 향한 욕망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영화를 보며 단연 돋보였던 장면을 꼽으라면, 기관실에 숨어있다가 기관장의 죽음을 목격한 뒤의 정사 장면이었습니다. 어업으로 돈을 벌지 못해 선원들의 생계를 유지하지 못하게 된 선장은 정체모를 인원들을 태워 운송해야만 했어요.
그들은 탈북민이었고, 선원들과 마찬가지로 어디서도 받아주지 않는 떠돌이 신세였고요. 허나 세상은 그들을 돕지 않았고, 정부의 감사로 수십 명의 탈북민들을 고기저장장소에 숨기게 됩니다. 오래된 냉각기의 고장으로 인한 프레온가스 유출로 인해 탈북민들은 죽음에 이르게 돼요. 이에 죄책감으로 미쳐버린 기관장은 어떻게든 그들의 소식을 남쪽의 가족들에게 전해주려 하지만, 선장은 선원과 자신의 생존을 향한 욕망에 사로잡혀 기관장을 살해하게 됩니다.
이때, 기관실에 숨어 있던 주인공인 선원 막내'동식'과 탈북 여인 '홍매'는 자신의 가족들과 같은 이들의 죽음을 목격하게 됩니다. 곧, 자신들의 죽음이 임박했음에 대해 두려워합니다. 서로 울음을 머금고, 서로를 위로합니다. 여기서, 동식과 홍매는 살인 현장에서 정사를 벌입니다.
영화를 본 이들은 "이게 무슨 얼토당토않은 장면인가!"라며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수많은 동지들이 죽고, 시체를 유기하는 상황 속에서 선장이 기관장까지 살해하는 상황에, 갑자기 무슨 정사를 벌이는 걸까요?
이처럼 죽음의 체험은 성에 대한 충동으로 이어집니다.
"영화《에로스의 눈물》(1961)에서 바타유는 "작은 죽음과 결정적 죽음의 동일성"에 관해 이야기한다. '작은 죽음(petit mort)', 즉 성적 결합의 정점에 숨이 멎는 듯한 그 경련을 바타유는 "궁극적 죽음의 맛보기"라 부른다. 오르가슴이란 결국 작은 죽음의 형태로 궁극적 죽음을 미리 맛보는 것에 불과하다."(진중권, 미학 에세이 p.81)
배 안에서 여성은 하나의 '대상'으로 전락합니다. 동물의 세계에서 암컷은 하나의 대상에 불과하죠. 어찌 보면 비약이라 할 수 있지만, 수컷이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암컷 말입니다. 더 나아가 본 영화에서 여성이 남성의 본능적인 성적 충동을 해소하는 대상으로서 자리 잡게 됩니다. 동식은 홍매를 사랑하고 살리려고 살인까지 자행합니다.
허나 필자는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주인공도 극 중의 다른 뱃사람들과 다르지 않으며 여성을 대상화하는 것에 예외적이지 않아요. 그도 힘으로 제압하는 사회의 구성원일 뿐이죠.(실제로 선장 및 선원들도 무언가를 지키려 하는 점에서 주인공과 동일합니다.)
영화의 끝자락에 동식과 홍매는 배에서 탈출해서 해안으로 밀려 모래사장 위에 누워있어요. 동식과 홍매는 서로 사랑을 확인했지만, 그녀는 동식을 떠나게 됩니다. 왜? 그녀는 그녀를 대상화하는 힘의 사회에서 떠나 홀로 힘으로 일어서는 겁니다.
뭐, 결론적으로 나는 임박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사회적인 죽음, 생물학적인 죽음) 가득 채워있는 이 영화를 보면서 '인간과 동물은 한 끗 차이구나'라는 생각이 드네요. 저는 이 영화를 보며, 간디의 이야기가 떠올어요. 간디는 자신의 아버지의 장례식 때, 아내와의 잠자리 도중 자신에게 역겨움을 느끼게 되죠. 이 역겨움이란 본능이 정신을 지배함을 직시했기 때문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