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의 사회 : 차이나 타운

by Wenza
쓸모가 없네




영화 속의 엄마(김혜수)의 대사다. 이 대사를 소개한 이유는 영화《차이나 타운》이 지속적으로 존재의 근거를 '쓸모'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쓸모의 결과는 '돈'이 되고 있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간다. 또한 이 사회가 주는 부정적인 영향에 대해 분노하지만, 이 사회를 유지하는 이들도 우리 자신이다. 이 사회가 우리에게 가하는 '쓸모'라는 정의를 고상하게 보이지 않고, 처절하게 그려간다.


엄마(김혜수)의 가족들은 인신매매 공동체이다. 이들에게 쓸모의 최후는 사람 자신의 몸이다. 우리는 영화의 배경을 보면서 생명을 무가치하게 다루는 모습을 보며 경악할 수 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고, 우리 또한 타인을 대할 때 '쓸모'라는 잔인한 기준을 은연중에 갖고 있지 않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의 가치는 돈으로 계산되고, 실제로 정부에서 규정한 사람의 최저 시간 값은 6,030원이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도 무시되지 않는 것은 '벌이'의 문제인데, 잔인하게도 이 벌이의 많고 적음이 사람의 가치를 정한다. 차이나타운도 동일하다. 물론 표현이 거칠고, 불법적이어도. 영화《차이나 타운》이 보여 주고 싶은 것은 영화와 대치되고 있는 현실 세계,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모습 자체가 현실이라는 거다.



일영(김고은)은 어디서 온지 모르는 지하철 10번 캐비닛에 버려진 아이였다. 그 아이를 노숙자들이 데리고 있다가 차이나타운에 팔게 된다. 흐르는 강에 떠다니는 아기 모세처럼 일영도 삶의 흐름에 맡긴다. 자신의 존재 이유도 묻지 않는다. 그냥 그렇게 산다. 그런 일영에게 엄마는 이렇게 말하는데,


내가 널 왜 계속 데리고 있는 것 같니?
너는 잘하질 않거든, 잘할 생각도 그래서 데리고 있는 거야


이 대사에서 일영의 정체성이 드러난다. 아무런 목적 없고, 희망이 없는 존재. 희망이 없으면 아무런 노력이 필요 없다. 살아있으려는 희망 하나 없는 일영은 밀린 이자를 받으러 부채자의 집에 간다. 거기서 석현(보검)을 만난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부채자들과는 다르다. 사실 일영의 삶 속에서 아무도 그녀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주지 않았다. 하지만 석현은 일영에게 친절을 베푼다.



이 친절이 일영은 변화시킨다. 석현을 목숨까지 걸면서 지키려고 하는데, 여기서 일영의 쓸모는 없어진다. 정확히 말하면 돈이 안 되는 일을 하기 시작한다. 일영은 생전 없었던 지키고 싶은 이가 생긴 게다. 돈보다 더 소중한 것,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석현은 일영에게 어둠에서 빛을 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다.



엄마라는 사람은 많은 버려진 애들을 데리고 먹여 살린 사람이다. 문제는 하는 일이 인신매매라는 점. 일영이 석현 때문에 맘이 흔들린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엄마는 만난다. 그리고 비 오는 밤에 일영과 엄마는 한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고, 여기서 엄마가 제를 올다.


"누구한테 하는 거예요?"
"내 엄마.."
"엄마도 엄마가 있어요?"
"넌 엄마가 없니?"
"좋은 분이신가 봐요"
"내가 죽였는데, 여기서"


이 장면에서 엄마의 가정사를 최초로 말하는 장면이다. 아마 이때부터 일영에게 특별함을 느끼지 않았을까?



'쓸모'라는 표현은 사실 사람에게 쓰이면 안 된다. 사람이 사물화 될 때 사용되는 표현이 '쓸모'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쓸모'에서 벗어나려면 그것보다 상위의 가치를 선택해야 하는데, 그 선택이 우리네 맘처럼 쉽지가 않다. 잘 알듯이 쓸모없으면 돈이 안된다. 그럼 죽는 거다. 어찌 보면 더럽고 힘든 세상 속에서 우리가 선택할 것은 많지 않을 수 있다. 영화는 마지막의 엄마의 대사를 통해 잔인한 세상 속에서 살아남길 바라듯이 말한다.


죽을 때까지 죽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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