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애매한 위치에 있다면
미국 최고의 음대 쉐이퍼에서 거친 교육과 말투로 유명한 플레쳐 교수와 막 입학한 드러머 앤드류의 캐미가 돋보이는 영화다. 음악 영화라 하면 우리는 《비긴 어게인》, 《원스》처럼 감성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곤 한다. 그러나 본 영화는 거칠고, 남성적이며 폭력적이다.
악기 드럼은 인류 역사와 함께 말할 수 있을 만큼, 오래된 악기다. 무언가를 쳐서 소리를 내는 타악기는 예로부터 종교 예식에서 사용되곤 했다. 섣부른 판단일지 모르지만 타악기는 주로 남성이 연주하는 성향이 강하다고 생각하는데, 우리 판소리에서 고수의 역할도 남성이 하곤 했고, 아프리카 제의에서도 제의 의식에 참여하는 것은 남성 중심적이었다. (아프리카 제의를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지역마다 부족마다 다르다.)
영화는 Accelerando(점점 빠르게)의 드럼 연주로 시작한다. 그리고 지나가다 연주를 들은 플레처와의 퉁명스러운 대화가 시작된다. 그리고 영화는 점점 빠르게 우리에게 몰입감을 선사한다. 플레처와 앤드류는 일종의 완벽주의자다. 완벽주의는 하나의 강박증인데, 영화는 강박증세가 있는 두 남자의 캐미를 힘 있게 그리고 있다.
"난 지휘를 한 게 아냐. 너희가 한계를 넘어서는 걸 보고 싶었어. 난 그게 반드시 필요하다고 봐"
플레처와 앤드류의 대화 중의 한 부분이다. 누구나 사람은 인정받기 위해 살아간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혼자일 수 없는 존재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존재 아닌가? 타인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비참함. 그러나 인정을 받는 순간 찾아오는 처절한 희열. 우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애매한 위치에 서있다. 아마 플레처는 이런 세상을 알고 있지 않았을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위치에서 머무는 자체가 그에게는 한계를 인정하고 안주하는 행위로 보였을 거다. 어쩌면 플레쳐는 애매한 위치에서 명료하고 명확한 방법으로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방법을 믿고 따르는 거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은 피할 수 없는 함정의 연속이다.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라는 어느 래퍼의 랩처럼 남을 짓눌러야 생존할 것 같은 환상처럼.
플레쳐의 공격적이며 폭력적인 방법의 방향은 경쟁에 있지 않다. 자본주의 사회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 그는 미국의 권위 있는 공연장인 케네디 홀에서 앤드류에게 모든 것을 건다. 자신의 명예, 자신의 신념을. 앤드류를 누군가를 닮은 연주가가 아닌 앤드류 그 자체로 만들기 위해 그리고 플레처 자신이 더욱 플레처가 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들은 마지막에 웃는다.
더 이상 애매한 위치가 아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