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은 정보를 공유하지 않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권력은 정보를 공유하지 않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소수가 다수에게 정보를 온전히 공유하지 않는 한 소수는 다수가 모르게 소수만의 특권을 누릴 수 있다. 어쩌면 음모론처럼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권력은 정보를 공유하지 않는 데서부터 시작한다"라는 명제는 우리 사회 근간을 이루고 있다. 필자는 개신교인이다. 교회 다니면서 전도사나 신학도들에게 많은 질문들을 하지만, 그들은 적정선까지만 대응하고 이외에는 "모르는 게 좋아"라는 식으로 대답하곤 했다. 나는 이런 태도가 굉장히 괘씸하였다. 또한 그들이 무언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것이 내가 신학을 공부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였다. 필자는 개신교 중에 신학적으로 중도에서 약간 급진적인 신학 성격을 갖고 있는 학교에서 공부했고, 호기심이 많았기에 급진적 신학과 역사적 예수에 대한 공부에 흥미를 갖게 됐다. 확실히 그들이 숨겨왔던 것들의 정보들은 충격적으로 다가오곤 했다. 여러 학계에서는 성경의 문자적 무오성을 부정하고 있으며, 성서의 보도된 예수의 보도도 수십 년 이후에 기록된 오도 가능성이 짙는 보도라는 사실이다. 물론 이런 정보가 내 신앙에 큰 동요를 주지 않았다.
어느 순간 내가 알고 있는 신학적 지식의 우월성을 생각한 계기가 있는데, 그건 교회 내에서 성도 간의 논쟁이나 토론이 생길 때마다 너무나도 말하기 쉬운 문제들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상대가 모르는 것은 어느새 우월감을 형성한다. 그리고 적당히 수준에 맞춰서 정보를 흘려준다.
그렇다. 내가 혐오하던 그들의 태도를 내가 답습하고 있었다. 그런 내 모습에 다시 혐오감을 느끼게 된다. 어느 학문이나 자기 전공에 자신감은 충만하다. 자신이 공부하는 것에 대한 자신감과 확신이다. 한 학회의 발표를 듣고 있는데, 서로 다른 전공을 가진 교수들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서로의 영역을 말하게 될 경우에 더욱 조심히 다룬다. 이렇듯 정보의 부재는 두려움과 조심스러움을 낳는다.
1518년 마르틴 루터가 하이델베르크에서 종교개혁을 했음을 세계사를 지나쳐봤으면 다들 알만한 역사다. 이 종교개혁의 힘은 인쇄술에 있었다. 루터는 교회의 성직자들만이 알고 있었던 성경의 내용을 민간인들이 읽을 수 있게 번역한 것이다. 그 전의 교회의 부패를 꺼낼 수 없었던 이유는 성경이라는 권위 때문이었으나, 그 권위의 내용은 성직자를 통해서만 들을 수 있었다. 이렇듯 정보의 공유를 하지 않음은 부패를 낳게 된다.
정보는 권력이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도 숫퇘지 나폴레옹의 독재체제 속에서 조금씩 계명들을 변화를 주면서 정보를 속이고, 공유하지 않음으로써 많은 동물들의 희생과 죽음을 낳았다. 우리는 앎의 욕구에 충실해야 한다. 누구나 그래야 한다. 앎에 게으를 때, 우리는 언젠가 도구 취급받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