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다름을 말하다가 같음을 인정하지 않을 때가 있다.
장자의 호접지몽이라는 말이 있다. 호접지몽이란 장자가 어느 날 문득 졸았는데, 그 꿈에 자신이 나비가 되어 자유롭게 날고 있었다. 꿈을 깨고 나니, 실감 나는 꿈으로 나비가 사람의 꿈을 꾸는지 사람이 나비의 꿈을 꾸는지 모르는 환상을 통해 현실의 모호함을 말해준다. 가상과 현실의 대칭은 이상과 현실의 만남이며, 더 나아가 현실과 현실의 융합이다.
영화《업사이드 다운》은 재미있는 세계관을 갖고 있다. 쌍둥이 같은 두 행성은 대치되어 존재하고, 두 행성의 중력으로 인해 각 행성의 모든 물질은 각 행성으로 끌리게 되어 있다. 영화에서는 상부 도시와 하부 도시로 구분하고 있고, 상부는 부유한 사회를 하부는 가난하고 회색빛 도시를 그리고 있다. 공존할 수 없는 세계 속에서 하부 도시의 한 남자와 상부 도시의 한 여자가 사랑에 빠진다.
영화는 현실 속에서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그려내고 있다. 이뤄질 수 없다고 말하게 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선험적인 중력이라는 '존재 이전'의 것이다. 각 중력은 개인의 소속에 대한 근거이며, 자연의 주어진 힘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자연보다 작은 개인은 자연의 힘에 순종하게 된다.
다른 하나는 두 행성 간의 계급적 사회 구조이다. 상부 사회는 상대적으로 발전되어 있고, 부유하게 사는 반면에 하부 사회는 석유와 같은 자원만 제공할 뿐 거의 식민지와 다르지 않다. 더불어 상부 사회에 소속된 사람은 하부 사회에 소속된 이들과 만날 수 없으며, 만나게 되어도 갑과 을의 관계에 불과하다. 어쩌면 이런 사회구조와 관계에 대해서 두 사람의 관계가 혁명적인 입장을 취하거나 전복적인 행동을 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남주인공 아담은 이름만 들어도 히브리 창조 이야기 속의 태초의 사람 '아담'을 기억하게 한다. 여주인공 에덴도 마찬가지로 히브리 창조 이야기 속의 완벽한 세상의 이름이다. 종교적으로 볼 때, 에덴을 떠났던 아담이 에덴을 회복하여 두 세상으로 분리된 변질된 세상을 새롭게 하여 새로운 에덴을 형성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꼭 그렇게 볼 이유는 없다.본 영화 속의 상부나 하부 서로의 입장에서 거꾸로 된 세상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일까?우리는 상대성으로 인해 옳고 그름의 줄타기를 필연적으로 하게 된다.
영화는 내내 하부 사회의 세상은 그르고, 더러우며 가난한 세상으로 그리고 있으며, 약자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에 반해 상부 사회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이런 구조에 익숙하다. 이와 비슷한 멧 데이먼 주연의 영화《엘리시움》도 동일한 구조를 갖고 있다. 그러나 엘리시움은 그런 구조와 혜택을 누리는 상부 세계에 대한 심판에 대한 염원이 담겨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본 영화는 구조적 전복을 혁명적 운동으로 그리고 있지 않다.
엄격하게 구분 짓는 상부와 하부의 관계는 서로 다르지 않음을 인정했을 때, 하나가 된다. 우리는 어쩌면 '다름'만을 주창하다가 서로 간의 연합의 문제에 거리를 두게 되는 것 같다. 우리는 다르면서 같다. 그건 변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린 서로를 알면서 모른다. 그렇기에 모르는 대상을 배척하는 것이 아닌 서로의 이름을 툭 던져 알려줄 때 아닌가? 이름은 내 모든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