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폐쇄성과 타인의 폐쇄성
우리는 진실된 개인들의 범람으로 인해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모호한 시대에 있다. 기준의 부재.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했던가? 우리는 다양한 개인 취향과 타인 취존이라는 미명 하에 타인에 대한 간접적 무시 속에서 살아간다고 해도 무방하다. 우리네 삶 속에서 종종하는 되는 지혜의 말 "안 맞으면 만나지 말라"라는 말이 당연스레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렇듯. 우리는 기준의 부재 속에서 혼돈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간단하게 "믿을 것은 나밖에 없다"며, 세상 혼자 사는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 정말 그런가? 우선 세상 혼자 사는 것이라는 환상은 , 우리네 부모님들의 존재로부터 깨지고 만다. 우리는 태어나서부터 필연적으로 혼자 사는 존재가 될 수 없는 운명을 갖고 있다.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생명이니까. 생명은 어쩌면 상호 도움이 전제되어 있는 까다로운 존재일지도 모른다.
"믿을 것은 나 밖에 없다."라는 말은 속고 속이는, 남을 밟고 올라서야 하는 자본주의 사회가 만든 경쟁구조로 상호 도움의 존재가 상호 불신의 존재로 만들었다는 증거다. 어쩌면 불신의 선언은 상처의 고백일 수도 있다. 누군가를 믿었다가 믿음에 좌절한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거다. 그러한 경험은 자라나 불신으로 발전한다.
어떤 대상에게 자신의 기대와 믿음을 투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무언가를 사유할 때 전제되는 당연한 믿음이 있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대상에 대해 미숙한 이해로 인해 생기는 좌절은 결코 쉽게 넘어갈 수 없는 부분이다. 대상을 이해했을 경우에, 믿음이 좌절되는 상처는 있을 수 없으니까.
우리는 수도 없이 우리 자신을 믿곤 한다. 그런데, 냉정하게 생각하자. 내가 믿을 만한가? 개인이 경험하는 시공간은 제한적이고, 개인의 변화하는 감정도 불안정하다. 타인에 대한 정보에 대한 습득도 편협적이다. 개인이 알고 있는 사실과 타인이 알고 있는 사실은 서로 다르다. 우리는 우리에 대한 질문을 할수록 우리는 믿을 만한 존재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게 된다.
프랑스의 철학자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무한'이라는 범위 안에 절대자와 '타인'(나 외의 모든 것)을 두었다. 앞서 말한 "믿을 건 나 밖에 없다"라는 말은 '무지'에 대한 두려움에서 시작된다. 내가 반응을 모르는 대상에 대한 용기가 없이는 믿을 수 없는 자신을 믿음에 대한 모순이 생긴다.
어쩌면 알 수 없음에 대한 두려움을 향하여 한걸음 내딛는 것보다 그럴듯한 기준을 붙들고 모토로 삼고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수 있다. 물론 이 방법이 편하다. 그러나 누군가가 정해놓은 기준은 결국 타인의 기준이고, 정보의 부재로 인해 결국 불확실한 것을 잡게 된다. 잘 생각해보자. 단체나 기관에서 주는 정보는 제한되어 있으며, 정보를 취득하려면 해당 기관에 기득권에 소속되어야 한다. 종교나 회사 같은 개방 되면서 폐쇄된 공간은 정보를 갖고 있지 않은 이들이 선언하는 기준들은 미지의 것들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렇듯 타인의 기준과 자신의 기준 중에 선택하는 것은 애매하고 모호하다. 그럼에도 필자가 이런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것은 타인의 폐쇄성과 개인의 폐쇄성에서 머무는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폐쇄성 가운데 나는 "무지에로의 용기"로 부르고 싶다. 폴 틸리히의 "존재에로의 용기"를 바꾼 표현이다.
우리는 타인이든 개인이든, 단체이든 알 수 없음의 소용돌이 안에 살고 있다. 이런 삶 속에서 우리는 좋든 싫든 상처를 받거나 감동을 받기도 한다. 이는 무지의 시간 속에서 무지의 것이 우리를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개인은 개인의 경험 안에서 모든 것을 차단하는 '개인의 폐쇄성'에 머물면 안 된다. 더불어 '타인의 폐쇄성' 또한 동일하다. 공동체의 정보 권력뿐만 아니라 개인 외의 모든 것에 대한 두려움에 정체되는 것이 아닌, 그 앞에 한걸음 걸음으로서 부딪치는 거다.
이해라는 복잡하고, 귀찮은 것은 Via Dolorosa(십자가의 길)만큼 평탄치 않다. 이해라는 것 자체가 내 기준과 생각을 억압한 뒤에 상대의 삶을 포용하며, 듣는 행위기에. 이렇기에 우리네 삶 속에서의 갈등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필연적 갈등. 우리 네 삶은 이 필연적 갈등 속에서 정체될 것인지 걸어갈 것인지에 대한 선택지에서 끝없이 부딪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