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부당함을 합당함으로 변질되고 있었다.
몇 년 전,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굉장히 흥행했었다. 종교에 대한 반감과 기성세대에 대한 불신으로 인문학은 각광받았고, 많은 인문 서적과 강사들은 텔레비전과 라디오에 기존과 다른 콘텐츠로 새로움을 선사했다.
물론 정의라는 주제는 인류사적으로 끊임없는 논쟁거리다. 샌델의 베스트셀러는 지적 욕구를 채워줄 것 같은 선택지 중의 하나였다. 본 영화를 보며 샌델이 다뤘던 벤담의 공리주의가 떠오른다. 19세기 영국을 중심으로 발달한 공리주의는 다수의 최대 행복을 도덕적 원칙으로 하는 사상이다. 이는 소수의 행복보다 소수의 희생을 더 필요로 한다. 물론 지금 시대에서 적용될 원리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설득력이 없다는 사실이 우리 피부를 감싸고 있다.
정의라는 것이 참 어렵고 애매한 건 모두 알고 있다. 각 자의 입장에 따라 선택의 무게와 중요성이 다르니까. 그렇게 탁상공론의 한계는 드러난다. 개인의 정의는 상대적이기에 '소통'의 문제로 해결돼야 한다. 그러나 소통의 방법조차, 각 자의 처한 환경의 무게도 서로 다르다. 결국 서로 부딪힐 때, 서로의 정의를 끝을 알 수 없는 갈등으로 확장된다.
본 영화에서 산드라는 병가를 내고, 복직 2일 전에 직원들의 투표 결과로 해고 통보를 받는다. 함께 했던 동료들은 산드라보다 보너스를 선택했다. 투표 과정 중에 반장이 직원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음을 알게 되고, 그녀는 사장을 찾아가 재투표 제안을 한다. 결국 그녀는 월요일에 재투표 약속을 받는다. 영화는 산드라가 주말 간 동료들을 만나며 설득하는 이야기를 보여준다.
앞서 공리주의를 언급했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 산드라가 찾아간 다양한 가정에는 각자 보너스를 택한 이유가 있었다. 어떤 이는 주말 아르바이트까지 병행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누군가는 자녀 대학 문제, 누군가는 집안 수리 등 한결같이 어려운 상황을 겪고 있다. 그런 그들에게 천 유로는 결코 작은 돈이 아니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개인의 고통은 지구 전체의 고통보다 크다"라고 말했다. 이렇듯 각자 처한 상황은 고통이라는 '주관적 관점'으로는 타협될 수 없다. 공리주의의 한계는 누군가의 희생이 절대적이라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현실'이라고 불린다.
산드라는 이런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래서일까? 산드라는 억울함으로 호소한다. 남에게 일부로 불쌍하게 보이게 하는 태도는 스스로에게 비참함만을 남긴다. 더불어 우울증을 앓고 있는 그녀에겐 진정제 없이는 동료들을 만나기 어렵기까지 하다. 왜 이렇게까지 살아남으려 하는 걸까? 부당함. 그녀의 내일을 위한 시간을 막고 있는 것은 부당함이라는 무게였다.
니코즈 카잔차키스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라는 소설이 있다. 예수가 그리스도일 수 있었던 과도기적 상황을 극적으로 그려내는 작품이다. 후에 마틴 스콜세지 감독으로 영화도 제작됐다. 아쉽게도 한국에서 종교계의 반발로 상영금지되었다. 갑자기 예수 영화라니, 막돼먹은 흐름이 아닐 수 없겠다만... 본 영화 속에서 사장 앞에 직면한 산드라의 모습 속에 최후의 유혹이 담겨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이익이 된다면, 사람다움까지 저버리는 시대다. 부당함은 합당함으로 변화되었다. 인간의 이기심을 기반으로 한 이 구조는 결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산드라는 동료들을 설득하면서 희망도 보지만, 상처도 받는다. 그녀는 부당함과 합당함 사이에서 오로지 마음이 이끄는 대로, 마음이 부끄럽지 않도록 움직일 수밖에 없었던 거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그것이 변질되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