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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수 May 15. 2016

<곡성>, 나홍진의 명백한 의도

일본인과 황정민 그리고 사진기의 의미


어젯밤 곡성을 봤다.

호불호가 극히 살리는 영화라지만 본인에겐 충격적인  호인지라 수많은 리뷰를 살펴보느라 새벽에야 잠이 들었다.

영화 리뷰를 남기는 이들 대부분 영화 매니아층이라, 곡성 분석도 어느정도 비슷한 답으로 수렴하고 있었다.

일본인은 악이며 황정민도 같은 편이었더라는.

황정민이 쏜 살은 일본인이 아니라 딸을 향하고 있었더라는. 근거는 대략 황정민이 입었던 일본 속옷 훈도시였다.


나는 여기서 좀 더 나홍진 감독이 말하고자 했던 악의 구체성에 대해 얘기하기로했다. 나홍진 감독은 외지인이란 설정으로써 우연적으로 일본인을 선택했던 것일까?


그는 성경구절을 들어 보편적인 악을 얘기하고자 하는 듯 했으나, 나홍진 감독은 절대적으로 현대사에 기반을 둔 일본의 만행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껏 나홍진은 <추격자>, <황해> 를 통해 실화를 바탕으로 한국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현실적으로 그려냈다. 이러한 필모그래피를 통해 볼 때, <곡성> 또한 한국 사회의 어떠한 어둠을 은유로 표현한 것이라 생각하여 아래와 같이 해석해 보았다.


첫번째, 일본인과 황정민의 얼굴에서 드러났던 일장기


사실 나의 이 건방진 확신은 영화 내내 느꼈던 시각적 이질감에 대한 깨달음에서 시작했다.

왜놈이 동물의 시체를 파먹다가 카메라를 향해 달려들 때, 이상한 이질감을 느꼈다.

이 느낌이 뭔 지에 대해 가만히 생각해보니, 일본인의 얼굴 가운데에만 피가 동그랗게 묻어있고 몸은 유난히 깨끗한데서 오는 괴리감이었다.  (스크린 샷은 아마 개봉한지 얼마안된 지금은 찾기 어렵겠지만, 영화를 본 분들은 다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질감은 황정민이 살을 쏘는 굿을 할 때 다시 나타나는데, 황정민이 동물의 피를 얼굴에 묻히고 굿을 하다가 곽도원이 굿을 멈추자 허탈하게 정면을(정확히는 카메라 너머를) 응시하는 장면이 있다. 그때 그의 얼굴에도 하얀 옷과 극명히 대비되는 빨간 피가 동그랗게 묻어있다.


처음에는  이렇게 동물의 피로 동그랗게 물든 얼굴들이 그저 우연인 줄 알았다.  영화 전체적으로도 어렴풋이 일본인-일제시대의 일본 황정민-친일파라는 해석이 '가능' 하다. 그러나 결말을 알고 황정민과 일본인이 한편이란 해석에 확신을 갖게 되자 이 것이 일장기를 연상시키기 위한 나홍진 감독의 명백한 의도라 생각하였다.


추가글: 그리고 황정민의 이름이 일광인 것을 생각해본다면. 일광은 하나의 해가 떠오른 다는 뜻이람서?


두번 째, 일본인의 방에 있던 천황사진

그리고 간단하게 덧붙이자면 카메라에 반복적으로 잡힌 천황의 사진이 내 의견에 확신을 주었다. 단순히 보편적인 악을 얘기한다기엔 천황내외사진이 카메라에 너무 많이 잡혔다고 생각한다.  천황을 숭배하는 악마란 관객에게 무엇을 의미할 수 있을까?


세번 째, 딸아이의 알림장

그렇게 일본인과 황정민의 얼굴에 나타났던 것이 일장기라면, 딸 아이는.

 일본인과 딸이 만났던 것을 의심하는 곽도원은 딸아이의 알림장을 넘겨보게되고, 그 안에서 광기를 담은 듯한 낙서를 발견하게 된다. 대부분 욕설과 분노한 직선들이었지만, 그 속에서 분명히 여자 몸의 성기에 피가 흐른다던지 , 벗은 몸의 대머리 남자가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아이는 분명 일본인과 접촉이 있었고, 그리고 그것은 곽도원이 말로써 확언하지는 않지만 분명 성범죄였다.(일본인은 성범죄 전적도 있었다.) 딸아이는 일본인 성범죄의 피해자인듯 하다.


네 번째, 무엇이 중헌디?

사실 곽도원이 일기장을 뒤지기전에 딸아이에게 일본인과 만난 적이 있냐며 다그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딸아이는, 혹은 그 안의 귀신은, 아니 나홍진은, 곽도원에게 되려 묻는다. 무엇이 중헌디? 잠재적 피해자를 되려 범죄자를 만난 적이 있냐며 다그치는 그 모습이, 어디서 많이 본듯하다. 무엇이 중요하고, 우리는 무엇을 놓치고 있는 가?


다섯 번째, 그래서 사진기

글을 짧게 하기 위해 내 기준으로 찾아낸 모든 상징점을 쓰진 않았다. 하지만 사진기에 대해선 꼭 쓰고 싶었다. 일본인이 도망치는 황정민을 나방으로 까지 위협해서 다시 돌아오게 하여 찍게한 사진.

아무리 해석하지 않으려해도 감독이 사진기를 강조하고 있는 것은 확신하다.


도대체 사진기가 의미하는 게 뭘까 생각했는데,

사진은 어쨌든 기록의 도구이다.

일본인이 자신의 만행의 유일한 증거인 사진을 '태웠다'고 한 점과

결말에 황정민(친일파?)가 일의 마무리를 하기위해 피해자들의 사진을 찍었다는 점에서 사진은 우리의 역사기록이라고 해석하니 뭔맞물리는 느낌이었다.


 일제시대 일본이 우리나라에서 물러나갈 때 자신들의 만행을  숨기기위해 많은 장부를 태운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이후 우리의 역사기록또한 친일파에 의해서 행해지고 있다는 것도, 우리가 대항하고 있는 현실이다.

여기에 중간에 경찰이 살해 증거품인 칼을 맨손으로 다뤄 혼난 장면까지 끌어와보면, 우리나라 국민들이 역사적 증거들을 워낙 '대충' 다뤄 문제를 일으켰던 많은 사건들까지 연상되며

감독이 역사적 기록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석이 썩 나쁘지 않다는 자기 위로를 해본다.



최종적으로 내 해석을 정리하자면

일본인:일제시대 황정민:친일파 딸아이:위안부 사진기: 역사기록 이다. 무명에 대해 쓰지 않은 것은 현재 많은 분들이 하는 해석에 이의가없기 때문이다. 더 길어져봤자 안읽힐 것을 알기에 여기서 멈춘다.

사실 위의 모든 문장은 저의 허상입니다. 모든 건 나홍진 감독만이!



이후 아래와 같은 문단을 추가했습니다.

사실 브런치 팔로워가 거의 없을 때 적은 글이라

논리적으로 맞지도 않고 끄적임에 가깝습니다.


점점 봐주시는 분들이 많아지면서

제가 이렇게 생각한 이유를 더 정확히 쓰는 게 맞을 거라 생각하여 추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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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나홍진은 <추격자>, <황해> 를 통해 실화를 바탕으로 한국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현실적으로 그려냈다. 이러한 필모그래피를 통해 볼 때, <곡성> 또한 한국 사회의 어떠한 어둠을 은유로 표현한 것이라 생각하여 아래와 같이 해석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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