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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랑자 Jun 21. 2023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인간과 삶에 대한 고찰.

 앞서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논하며 '인간이란 무엇일까?'에 대한 의문을 던졌다. 이런 의문을 제기하며 나는 이전에 읽었던 알렉산드로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라는 책을 떠올렸다. 물론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는 자기혐오의 소재를 다루지는 않았지만, <인간실격>과 마찬가지로 인간을 통찰하기에는 적절한 작품이 아닌가 싶다. 


(책은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인간을 표현하고 있고, 책을 통해 인간을 엿볼 수 있다는 게 참 흥미로운 점이다.)


 이 책은 억울하게 수용소에 갇힌 평범한 사람, 슈호프가 수용소에서 보낸 수많은 시간 중 하루를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 작가 솔제니친은 스탈린 통치 하에서 억울하게 수용소 생활을 한 경험이 있고 미국으로 망명해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책이 더욱 생생한 걸까.


 슈호프는 독일군의 포로였다는 이유로 끌려왔다. 포로로 잡혔으니 배신자라는 논리다. 그러나 그는 하루 동안 억울해하지도 않고, 저항하지도 않는다. 그는 수용소의 생활에 적응하고 순응하고 있다. 오히려 너무 잘 적응해서 잔꾀와 처세술만 는 것처럼 보이고, 어떤 모습은 궁상맞기도 하다. 마지막 대목에서 그는 심지어 이 날을 '행복하기까지 한 날'으로 정의한다. 



슈호프는 아주 흡족한 마음으로 잠이 든다. 오늘 하루는 그에게 아주 운이 좋은 날이었다. 영창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사회주의 생활단지>로 작업을 나가지도 않았으며, 점심 때는 죽 한 그릇을 속여 더 먹었다. 그리고 반장이 작업량 조절을 잘해서 오후에는 즐거운 마음으로 벽돌 쌓기도 했다. 줄칼 조각도 검사에 걸리지 않고 무사히 가지고 들어왔다. 저녁에는 체자리 대신 순번을 맡아주고 많은 벌이를 했으며, 잎담배도 사지 않았는가. 그리고 찌뿌드드하던 몸도 이제 씻은 듯이 다 나았다. 눈앞이 캄캄한 그런 날이 아니었고, 거의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날이었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과연 그가 정말 행복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처럼 적응해서 행복하다고 느끼는 삶을 사는 게 나을까. 아니면 계속 저항해야 옳은가. 


 억압에 익숙해진 슈호프의 모습을 보면, 그가 자유라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를 빼앗기고도 행복을 논하는 모습을 지켜보면 참 미묘한 기분이 든다. 동시에 그 당시의 비참함을 눈앞에 그려볼 수 있다. 


 이걸 작성하면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를 읽은지가 좀 오래 되어서 작품 해석을 찾아보니 비인간적인 수용소 상황에서 이반이 인간의 존엄성을 내면에서 키워나가고 있다는 해석도 있었다. 어쩌면 저런 담담한 태도는 이반이 수용소에서 삶을 지켜내기 위해 스스로에게 건 최면이자, 어떻게든 삶을 살아가려는 발버둥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본다. 수용소라는 극한의 상황에서 평범한 인간의 하루를 지켜보며 인간에 대해 고민할 수 있다는 점이 이 작품의 큰 의의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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