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농민, 장애인, 퀴어. 그리고 18세기 프랑스 여성들
연말과 연초를 두 개의 마감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지금 하나를 막 마쳤고, 또 다른 마감을 위해 잠시 숨을 고르는 중입니다. 지난 연말, 한 해를 정리하는 글을 쓰다가 중단하고 다시 매만져봤다가 또 멈췄어요. 개인적으로 그리고 회사로서도 쉽지 않았던 한 해라, 감정과 실패와 교훈을 잘 정리해 보고 싶었거든요. 인격은 불안의 파도를 넘는 마음가짐과 태도로부터 형성된다고 믿는 사람이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그러나 아무리 비우려 해도 가득 차오르는 슬픔 앞에서 어떤 글도 말도 시작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감정을 다독이고 미리 맺었던 약속을 지키려 몸을 움직일 뿐이었어요. 생과 사라는 틈바구니 속, 삶의 우연성이 몇 겹이나 작동해 만들어낸 참사 앞에서 내 일상은 안온하게 지속되는 것이 마음 저 밑으로 계속해서 끌어 내렸습니다. 저 역시 (감히 비교할 순 없지만) 크고 작은 일을 겪으며 '우연히 살아있다'라고 감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마감과 마감 사이, 잠시 머리를 식히기 위해 든 책에 이런 구절이 있더라고요.
노동(labor)의 인간적 조건은 생명 그 자체다. […]
일(work)은 모든 자연환경과 지극히 다른 ‘인공적’ 세계를 만들어낸다.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속 문장입니다. 아렌트는 '노동'이라는 단어에는 내포된 ‘진통’ 혹은 ‘분만’이라는 의미에 주목했어요. 여성이 아이를 낳는 과정도 심신의 고통도 포함되는 노동이라는 말에는 인간의 근원적인 존엄이 담겨 있는 것이죠. 살아 있는 한 노동에서 우리는 자유로울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국어사전에서 노동을 검색해보면, 다음과 같은 정의가 나옵니다.
몸을 움직여 일을 함
[경제] 사람이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얻기 위하여 육체적 노력이나 정신적 노력을 들이는 행위
그럼 비슷한 개념으로 자주 사용되는 '일'은 어떤 뜻을 지니고 있을까요.
무엇을 이루거나 적절한 대가를 받기 위하여 어떤 장소에서 일정한 시간 동안 몸을 움직이거나 머리를 쓰는 활동. 또는 그 활동의 대상
어떤 계획과 의도에 따라 이루려고 하는 대상
어떤 내용을 가진 상황이나 장면
노동과 일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용례는 비슷하긴 하지만, 그 개념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둘에는 명료한 차이가 있습니다. '일'은 회사를 다니고, 가게를 운영하는 등 '돈을 버는', 자본주의에서 보다 생존을 위한 행위입니다. 노동은 일의 상위 개념으로서 삶과 생과 긴밀하게 접촉되어 있습니다. 만약 내가 현재 실업상태라면 '일'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노동'은 하고 있는 거거든요. 사회에서 하나의 존재로서 인정받기 위해 혹은 상태를 전이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노동보다는 일의 가치가 더욱 높은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일로써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사회에 익숙합니다. 이 사회에서 '노동'의 의미는 좀 더 '고역', '고된 일'로 여겨집니다. 상위 개념인 노동의 가치가 땅으로 떨어져 버렸지요.
저는 올해 좀 더 노동하기로 했습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만, 일본의 비평가 와카마쓰 에이스케가 풀이한 노동의 정의를 보고 그렇게 마음먹었습니다.
일을 하면서도 자신을 위로하고, 자신을 격려하며, 자신을 돕는다. 자신을 돌보고 보살핀다.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인간이 될 수 있느냐가 '노동'의 의미인 셈이다.
그리고 지난 연말과 연초 목격한 몇 몇 장면 덕분에 그렇게 마음먹었습니다.
2024년 12월 3일, 계엄령이 선포되었습니다. 여러 행위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누군가는 분개하고, 누군가는 뛰쳐나가고, 누군가는 눈을 감았습니다. 저는 행위의 주체가 되기도 하고, 다른 행위 주체와 대화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한 남성을 만났습니다. 계엄 선포 당일 23시 30분 국회로 달려간 60대 남성입니다. 너무나 중요한 일이지만 저는 그 얘기를 듣고 놀랐습니다. 결과론적으로는 시대의식에 깨어있는 군인들 덕분에 큰 일은 없었지만, 우리는 이미 80년대 어떤 폭력이 있었는지 역사와 기록으로서 잘 알고 있는데 말입니다. 저는 그에게 계엄군의 무력이 무섭지 않았냐고 물었습니다. 그의 답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는 '빚을 갚기 위해 움직였다'고 답했습니다. 민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대학생은 아니었던 그는 어느 순간부터 이한열 열사와 같은 분들 덕에 '살아남았다'고 생각해왔다고 합니다. 일종의 부채감이 그를 국회로 보낸거 같습니다. 3일 밤과 4일 새벽, 그는 이름도 모르는 타인의 팔과 자신의 팔을 엮어 바리케이드를 만들었습니다. 이 시간은 두려움을 내어주고 과거의 자신을 일정 부분 보듬어 내었습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해소되지 않는 '마음의 침전물'을 외면하지 않고, 돌보고 보살피기 위해 행동한 것이죠. 이윽고 그는 계엄을 막아냅니다.
또한 저는 지난 12월 7일 여의도에서 수많은 젊은 여성들을 만났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국민의힘 국회의원들이 탄핵결의안 소추 표결을 거부하고 회의장을 나서는 순간, 앞뒤좌우 이름도 모르는 대중(여성)들과 저는 그들의 이름을 한 명씩 호명했습니다. 역사에 남을 내란동조자 105인 국회의원의 이름을 우리는 한 명 씩 외쳤습니다. 국민의 대표자의 이름은 무명의 국민들에 의해 한 명 씩 호명되는 광경이었습니다. 무명의 대중과 유명의 권력자. 저에겐 참으로 모순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아름다움을 느꼈습니다.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 나라를 지키는 역할은 무명의 대중에게 있다는 점에서요. 이 무명의 대중은 사실 조금 외로웠을 것입니다. 그동안 대한민국의 정치는 젊은 청년 세대의 대표성을 '이성애자/비장애/남성'에 맞춰왔기 때문입니다. 젊은 청년을 위한 정책 어디서도 '여성'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여성들은 영하의 날씨에도 광장으로 뛰쳐나왔습니다. 언론과 대중은 그 모습이 신기했나 봅니다. '기특하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성은 언제나 광장에 있었습니다. 이 사회가 여성을 주목하는 방향성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치거나 기록되지 않았던 것뿐입니다. '구조적 성차별이 없다'라고 외치는 대통령, 이 나라에 사는 여성들은 동료 남성들과 비교했을 때 30%의 임금을 덜 받고, 맞벌이어도 3배의 시간을 더 가사노동을 견딥니다. 140년 뒤에나 이런 성차별이 해소된다고 통계청은 발표합니다. '대표성'에서 오랫동안 배제되어 온 젊은 여성들은 벼랑 끝에 서서 세상에 문제 제기를 하기 위해 나왔습니다. 어쩌면 여성들은 기이한 배제가 작동하는 이 나라에서 마지막 힘을 끌어내 자신을 돌보기 위해 광장에 선 것일지도 모릅니다.
가끔 길을 잃은 것 같을 때 저는 가만히 이 삽화를 들여다보곤 합니다. 좋아하는 삽화입니다. 역사가 얼마나 폭력적인지, 또 그 속에서 얼마나 아름다운 개인이 있었는지 잘 드러내는 작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Epoque de la Révolution. Suite de Passy à Versailles(대혁명의 시기. 파시*에서 베르사유까지의 행진)>라고 명명된 삽화입니다. 창칼과 이가 빠진 도끼, 몽둥이 그리고 대포를 끌고 어디론가 가는 여성 군중이 보입니다. 그들의 옷차림을 자세히 보면 부유한 집단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프랑스 대혁명 시기,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는 빵 가격과 왕실 군대의 반혁명적 행동에 분개한 여성 농민과 민중입니다.
약 7,000명의 여성들은 파리 뛸르리 궁에서 베르사유 궁까지 약 20km를 걸어갔습니다. 도착 후 그들은 궁전을 애워싸고 하루밤을 노숙했습니다. 다음날 궁전에 진입해 루이16세와의 파리 귀환을 요구했습니다. 결국 프랑스 왕 일가는 분개한 군중과 함께 파리로 돌아와 튈르리 궁에 감금되었습니다. 오랜 기간동안 진행된 정치적 교섭과 협상은 결국 여성 군중의 행진으로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성난 여성이 결국 권력의 핵심을 끌어 낸 것이지요.
여기에도 모순이 있습니다. 삽화가의 이름이나 이 여성들의 이름을 역사는 기록하지 않았습니만, 무명의 누군가는 자신의 삶을 지켜내기 위해 두려움을 무릎쓰고 행진한 것이지요. 역사와 그 다음 세대는 그들을 주목하지 않았을지라도, 결국 변화를 이끌어 낸 당사자라는 점은 바뀌지 않는 사실입니다.
* Passy(파시)는 수도 파리에서 베르사유로 가는 길 초입에 있는 지역입니다. 여성 군중은 파리 이곳저곳에서 파시까지 모인 후, 여기서 베르사유까지 함께 행진합니다. 지금은 파리 16구에 속해 있습니다.
2025년 1월 5일. 이름 모를 여성들이, 노동자가 눈을 맞으며 한남동 대통령 관저 앞에 있었습니다.
여성, 장애인, 퀴어, 농민. 정치와 사회가 단 한 번도 중심으로 초대하지 않았던 이들입니다. 다양한 중요도 사이에서 언제나 '나중'으로 호명되는 집단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광장으로 쏟아져 나와 시국을 규탄하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리를 지켰습니다. 각각의 개인들. 각각의 정체성들. 각각의 집단들. 사회에서 떠밀렸던 사람들이 세상을 조금 견딜 수 있는 곳으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국회로 뛰어간 60대의 남성,
광장에 선 젊은 여성들,
3세기 전의 프랑스 여성들,
그리고 키세스로 불리는 다양한 집단의 이 시위대를 보며 저는 노동의 가치를 확인했습니다.
삶의 어느 순간 누군가가 규정한 기준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된 사람들이 조금 더 나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광장에서 자리를 지켰습니다. 어쩌면 자신을 돌보기 위해 섰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발언은 옆의 타인의 고통을 껴안습니다. 여성의, 장애인의, 퀴어의, 농민의... 역설적이죠. 이들은 생에 어디서도 빗겨나갈 수 없는 '노동'을 몸소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양한 목소리를 듣는 민주주의, 아무도 배제하지 않는 민주주의를 위한 의제를 다듬어 나가고 있습니다.
노동은 아픔, 슬픔, 진통... 삶을 피하지 않고 살아가는 모든 과정입니다. 삶에 대한 존엄성을 바탕으로 한 노동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타인의 삶을 연결시키거나 견인합니다. 삶의 진통을 끌어안는 노동은 궁극적으로 옆의 누군가, 미래의 누군가의 마음을 작게나마 이해하게 합니다. 작년 말과 올해 초, 그리고 먼 과거의 여성들(그러나 익숙한)을 보며 저는 '나를 돌보고 보살피는 행위(노동)는 우선 나를 살리고 나아가 미래의 누군가를 살린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올해 '노동'을 더 해보기로 했습니다. 일하는 틈틈이 '마음의 침전물'을 조금 더 들여다 보려고 합니다. 제 삶과 결부된 노동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 누구와 연결되게 할까 궁금합니다. 그때 저는 누구의 손을 마주잡고 있을까요. 아주 먼 과거에서부터 기록되지 않았지만 혹은 잊혔지만 지금의 우리를 살렸던 수많은 주체들을 생각하며, 제 노동이 어느 날 미래의 나와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제게 2025년은 노동을 귀하게 여기는 한 해였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