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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눈으로 감각하는 땅

뮤지컬 푸른 나비의 숲

by 미미정
Screenshot 2025-01-19 at 10.00.21 PM.png 장애물 혹은 휴식처 - 다의적 의미를 지닌 나무 그루터기

* 작년 12월 25일, [뮤지컬 푸른나비의 숲]을 관람한 뒤, 쓰여진 글입니다.

* 모두예술극장(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의 원고 청탁 의뢰를 받았습니다.




다리가 네 개 달린 의자가 있다. 어느 날, 다리 하나가 부러졌다. 사람들은 이 의자에 앉으면 넘어질 것이라고 예상한다. 다리 하나가 없는 의자는 본래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거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한편 다리가 세 개인 의자가 있다. 고르지 않은 지면에서도 균형을 잡고 온전히 서있다. ‘결함 있는 존재’로 결정짓기 전에, ‘다른 존재’를 살피는 감각이 필요하다. 이는 의미를 전환하는 행위를 뜻한다. ‘의미(意味)’는 말이나 글의 뜻, 행위나 현상이 지닌 뜻, 사물이나 현상의 가치라는 정의를 갖고 있다. 의미란 태어나고 자라면서 사회와 문화로부터 자연스럽게 학습되고 각인되는 개념이다. 그러나 객관적인 동시에 주관적이다. 특정 상황과 환경에서, 우연한 사건에 의해 의미가 굴절하거나 재탄생하기도 한다.


뮤지컬 <푸른 나비의 숲>은 시공간을 이동할 수 있는 ‘푸른 나비’가 양로원에서 만난 어느 할아버지의 기억 속을 여행하며 시작한다. 그곳에는 ‘던’이라는 아이가 있다. 눈이 보이지 않는 던은 원하는 모습으로 살 수 있게 만들어준다는 바람의 샘물을 찾는 중이다. 숲을 헤매던 중에 뾰족한 귀를 가지고 태어나 숲속 오두막에서 엄마와 단둘이 사는 ‘써니’를 만났다. 둘은 바람의 샘물은 함께 찾기로 한다. 푸른 나비는 그들의 여정을 따라간다. 단순해 보이는 듯한 이야기에는 다수의 은유가 촘촘하게 새겨져 있다. 이 글은 은유에 내포된 의미 전환을 따라간다.




1. 모순

던과 써니가 여행한 세상들에서 통용되는 ‘정상’의 의미는 모두 다르다. ‘다름’이 소거된 ‘회색 마을’에서는 누구나 회색 옷을 입어야만 한다. 회색 마을의 아이들에게 푸른 나비의 색은 이상하다. 얼른 잡아서 회색으로 만들어주고 싶다. 뾰족한 귀를 가진 써니 역시 괴물이고, 눈도 보이지 않으면서 숲 길이 무섭지 않다고 말하는 던은 거짓말쟁이다. 한편, 회색 마을을 지나 당도한 ‘거꾸로 나무의 숲’에는 다름을 가진 사람들만 모여 산다. 숲의 주민들은 던과 써니에게 이곳은 안전하니 함께 살자고 권유한다. 그러나 고립 위에서 작동하는 안전은 또 다른 배제를 낳는다. 두 장소에는 자신과 다른 타인의 자리가 없다.


회색 마을과 거꾸로 나무의 숲은 현실에 있다. 회색 마을은 비장애인 중심으로 설계된 교실, 식당, 사무실, 지하철 같은 곳이다. ‘왜 보이지 않는가’에 대한 질문은 생략된 체, 어디에서도 장애를 마주치지 않는 일상이 익숙하다. 그렇다면 회색 마을의 정상성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가. 바로 시설이다. 장애인, 미혼모, 노인 등 곁을 내주고 싶지 않은 대상으로 호명된 이들이 이곳에 감춰진다. ‘안전’과 ‘편의’라는 명분은 그들을 일상에서 떼어냈다가 이내 소거한다. 보이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었다. 다름을 가진 사람들만 모여사는 ‘거꾸로 나무의 숲’은 장애인 생활 시설을 비유한다. 이곳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존재할 권리’에 대한 물음이 생략된다.


정상이라는 개념은 사회의 낙인일지도 모른다. 써니는 분리와 배제 위에 세워진 두 세계 어디에도 자신의 자리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원하는 세계는 어떤 모습으로든 원하는 사람의 옆에서 살 수 있는 곳이다. 누구에게나 열린 포용의 장소를 꿈꾸며 써니는 ‘푸른 나비의 숲’을 찾아갔다.



2. 읽는 귀

그렇다면 던은 어디로 갔을까. 눈이 보이지 않는 던은 곳곳에 나무뿌리들이 돋아 있는 울퉁불퉁한 길도 두려워하지 않고 걷는 아이였다. 처음 이 모습을 본 회색 마을의 아이들은 자신보다 씩씩한 던을 질투하며 그의 지팡이를 뺏어버리기도 했다. 던은 나무 밑동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지만, 이내 일어나 발바닥으로 지면을 ‘읽고’ 반사되는 소리로 공간의 넓이를 ‘보며’ 자연물의 냄새로 길을 ‘그려냈다’. 감각 언어를 골고루 사용하여 세상을 파악했다. 주로 시각 정보로 세상을 그려내는 회색 마을의 아이들에게 깊고 어두운 숲은 두려움의 대상이지만, 던에게는 다양한 감각으로 대화하는 장소일 뿐이었다.


던에게는 ‘읽는 귀’가 있었다. 써니와 친구가 될 수 있던 것도 바로 이 감각 덕분이었다. 던의 귀는 난생처음 본 대상을 향한 반가움이 담긴 떨리는 호흡과 다가갈까 말까 주저하는 발자국 소리를 ‘감지했다’. 울퉁불퉁한 지면 위에서도 균형을 잡는 다리가 세 개인 의자처럼 누구도 듣지 못했던 써니의 마음을 던은 읽을 수 있었다. 보이지 않는 눈은 읽는 귀를 ‘개발’하며 시각 정보 너머의 세상을 그려냈다. 그러나, 함께할수록 써니의 얼굴을 두 눈으로 보고 싶다. 그 마음은 던을 바람의 샘물로 향하게 했고, 결국 원하던 ‘보는 눈’을 갖게 했다. 그러나 더는 써니의 목소리를 읽을 수 없었다. 세상을 읽던 귀는 그 감각을 쏟아지는 시각 정보를 읽기 위해 양보한 것 같다. 다리가 세 개인 의자와 네 개인 의자는 모두 서있지만, 다리 하나에 분배되는 하중이 다른 것처럼 말이다. 던은 사회가 규정하는 정상성에 속하게 됐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 양로원에서 과거를 회고하는 노인이 됐다. 처음 푸른 나비가 만났던 그 할아버지다.



3. 마음의 눈

던이 쟁취했던 시력은 노화로 인해 기능을 잃는다. 그는 다시 보이지 않는 눈, 장애의 세계로 들어왔다. 할아버지가 된 던의 시간대는 읽는 귀와 같은 입체적 감각이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가 ‘훈련’해야 하는 대상임을 증명한다. 잠시나마 ‘일시적 비장애인’의 상태에 있을 뿐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일시적 비장애인은 어떻게 입체적 감각을 형성할 수 있을까.


눈 목(目)과 눈 안(眼), 모두 ‘보는 기관’을 의미한다. 그러나 전자가 눈이라는 구체적인 신체기관이라면, 후자는 바라보는 사람의 눈동자라는 의미를 지니며, ‘심안(心眼)’이라는 표현으로 확장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느끼는 눈, 누구에게나 마음의 눈이 있다. <푸른 나비의 숲>에는 마음의 눈을 감각하는 연출이 있었다. 무대 위 배우들의 바로 옆에서 함께 연기하는 ‘수어 통역 배우’의 역할이다. 베리어 프리를 지향하는 연극 연출에는 주로 무대 한 켠에 수어 통역사의 자리가 마련된다. 한 명 혹은 소수의 통역사는 모든 배우의 대사를 수어로 통역한다. 훌륭한 시도이고, 필수적인 연출이지만 농인 관람객의 입장에서는 극의 내외부에서 ‘시차’가 발생한다. 기존 방식과는 다르게 <푸른 나비의 숲>에는 열두 명의 배우의 ‘옆에’ 일곱 명의 수어 통역 배우가 있다. 이들은 단순히 통역만 하는 것이 아니라, 표정과 안무를 통해 즉각적이고 입체적인 정보를 전달한다. 극 내외부에서 발생하는 시공간의 간극을 감소시키는 동시에 의미의 전환을 만들어 낸다. 대표적인 장면이 있다. 던과 써니가 처음 만났던 장면에서 던에게만 들리는 써니의 노래는 ‘허밍’이었다. 농인 관객에게는 청각 정보가, 비장애인 관객에게는 언어 정보가 누락된 허밍은 수어 배우의 ‘독무’로 표현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목소리가 던과 써니 사이를 오가고 메아리치며 움직인다. 허밍과 춤. 두 비언어적 요소의 결합은 관객의 마음의 눈을 통해 연극을 확장시키는 새로운 언어가 됐다. 누락된 정보를 새로운 감각으로 표현하기, 의미는 한계를 다르게 바라볼 때 변화한다.




지난 12월 24일, 한국은 초고령사회에 진입했다. 65세 이상의 국민이 5명 중 1명이라는 뜻이다. 2025년일 것이라는 기존 예측보다도 앞섰다. 우리는 빠르게 늙고 있다. 이는 장애가 일상에 놓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장애와 비장애 사이, 정상성의 모순 사이. 어설프게 공고한 이 낡은 기준들에 재정의가 필요하다. 세상은 말과 글로만 쓰이지 않는다. 행과 행 사이, 상황과 맥락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숨겨진 의미들이 수없이 많다. 보이지 않는 것을 읽어내는 마음의 눈이 절실히 요구되는 사회에 당도했다. ‘푸른 나비의 숲’을 바로 지금 여기, 우리의 땅에 만들 시점이다.



정수경, 전시 및 출판기획사 또 프레스(toh press)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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