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로나에서 기차를 타고 밀라노 첸트랄레에 내렸다. 매일 33만명이 이용한다는 유럽에서 가장 큰 역이다. 천정이 높은 역 내부는 거대한 신전을 연상시킨다. 수 많은 사람이 몰려 있어도 전혀 답답하지 않다. 그런데 밖에 나와 보니 너비 200미터 높이 72미터에 이른다는 첸트랄레역의 인상은 그 건축물의 역사를 알지 못하는 이들까지도 파시즘의 분위기를 느낄 만큼 대단히 위압적이다. 밀라노는 가족 모두에게 처음이라 기대가 컸는데 처음 대면한 건물이 영 아니다. 불편한 역사의 한부분이 드러나는 나름 의미 있는 건축이지만 빛나는 이탈리아 감성의 무덤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택시를 타고 두오모 근처 에어비앤비에 도착했다. 크지는 않지만 깨끗하고 세련된 원베드 아파트였다. 거실의 소파베드를 아이가 쓰기로 했다. 두오모가 걸어서 5분 거리라 짐을 대강 풀고 거리로 나왔다. 저녁 시간임에도 대성당 앞 광장과 주변은 엄청난 인파로 북적인다. 그 사람들 사이에서 밀려가며 걸었다. 밀라노의 첫 식사는 구글의 도움으로 두오모 가까운 레스토랑에서 해결. 식전 빵도 푸짐했고 캐주얼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두오모 광장과 비토리아 에마누엘레 2세 갤러리아
Antica Focacceria S. Francesco란 이름의 식당. 맛있었던 문어 샐러드
다음 날 스포르체스코 성으로 향했다.
1차 (1482-1500) 2차 (1506-13)에 걸쳐 16년간 밀라노에 체류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daVinci가 스포르체스코 성의 살라 델레 아쎄 Sala delle Asse (Room of Wooden Boards)를 프레스코로 장식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 그곳은 복원 중이라 일반에 공개되지는 않고 있다. 엄청난 규모의 성채는 아름답다기보다는 남성적이고 방어적인 인상이다.
스포르체스코성 입구
제일 먼저 미켈란젤로의 마지막 작품인 론다니니 피에타 Rondanini Pieta (1552-64)를 찾았다. 정신분석연구방법론에 의거해 쓰여진 논문들에서는 어릴적부터 어머니의 품에서 떨어져 고아아닌고아로자라난 미켈란젤로의분노가 그의 작품 속애착관계가 보이지 않는 여러 모자상들에서 드러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뭔가 애잔한 느낌의 이 미완성 피에타를 보면그럼에도 불구하고 혹 그가 인생 마지막 시기이 작품에서 자신의어머니와 화해를 이룬 것은 아닐까하는 그런 생각을 해본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성 베드로 성당
론다니니 피에타
론다니니 피에타의 여운을 뒤로하고 박물관을 둘러보았다. 규모도 크고 작품들도 너무 많아서 대략 패스. 눈길을 끄는 작품앞에서만 잠깐씩 머물렀다. 여행자의 감상법이랄까.
태피스트리 전시실. 규모도 대단하고 전시방법도 인상적이다
마돈나 리아 , 42.5cm×31.5cm, c.1501)
또 하나의 아름다운 작품을 만났다.레오나르도다빈치적인스타일과기법때문에오랫동안그의 작품으로 알려져 왔지만 최근에서야 제자 프란체스코 갈리FrancescoGalli의 작품으로 판명된 마돈나 리아 Madonna Lia 다. 2007년 이 그림을 밀라노 시에 기증한 아메데오 리아 Amedeo Lia를 기억하며 붙여진 명칭이다. 고요하면서 시적 매력이풍성한 이 그림이 감상자의 바쁜 발길을 붙든다.
성 앞의 분수는 시원하게 물을 뿜어낸다. 유월 중순인데도 상당히 더운 날이라 살짝 지친다. 조금 걷다가 구글링이고 뭐고 그냥 눈에 보이는 카페로 들어가 늦은 점심을 해결하고 근처인 암브로시아나 미술관 Pinacoteca Ambrosiana 으로 직행했다.
암브로시아나 미술관의 중정과 내부
그유명한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코덱스 아틀란티쿠스 Codex Atlanticus 와 카라바지오의 정물화때문에암브로시아나를찾았는데브뤼겔의 작품을 비롯해 마음을끄는탁월한작품들이많아서 예정보다도 오래 머무르게되었다.
1637년 이래 이곳에 소장되어 온 코덱스 아틀란티쿠스는 수학, 과학, 문학, 철학,미술 전 분야에 걸쳐레오나르도의 천재성을 드러내는 연구 노트 및 스케치들이 집대성된 기록물이다.
얀 브뤼겔 Jan Brueghel the Elder (1568-1625)의 작품들
암브로시아나의 도서관 Biblioteca 에 전시중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코덱스 아틀란티쿠스의 일부
코덱스 아틀란티쿠스와 같은 공간에 전시되고 있는 카라바지오의 정물화 (46cm×64.5cm, c.1566)
카라바지오MichelangeloMerisi daCaravaggio(1571-1610)의정물화속에서무화과, 사과, 배, 복숭아, 포도로 가득한 바구니는 화면 가장자리까지 바짝 다가와 감상자 앞으로 쏟아질듯하다. 잘 익었거나 조금씩 색이 변하고또 썩어가기도하는 과일들은 삶의 과정을 은유로 설명하는 북유럽 정물화의 전통을 따른다. 극사실적 표현기법을통한착각의효과는 바로크적이다. 이그림이그려졌던그시절부터지금까지수백년간이과일바구니의생생함에감탄했을많은사람들을떠올려본다.이렇게미술품들은시간이흐르면서더욱생명력을얻는다.
또 다른 르네상스 화가 폴라이올로PierodelPollaiolo의'소녀의초상'또한 단번에 눈길을 끄는 작품이다.주인공의정체는알려져있지않으나단단하고기품있는자세,장신구및의상으로신분을짐작할뿐이다.하늘이배경이되어더욱도드라지는프로필의윤곽선,발그스레한입술과뺨의터치,과하지않은진주머리장식과목걸이,귀를덮은베일의뛰어난묘사가그림에아취를더한다.
그 어느 미술관보다도 브레라에서는 감상자와 미술관 사이의 거리감이 좁혀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관람객들에게배타적 영역이었던 미술품 복원실이나 스토리지 공간도 일부이긴 하지만 공개되어 있는데다가 어떤 작품들에는 일반적인작품 해설과 더불어시인이나 과학자와같은 '비미술전문가'들의 감상이 첨부되어 있어 그림 읽는 재미를 더한다.
안드레아 만테냐 Andrea Mantegna 의 성모자상,1485, 이를 설명하는 두 개의 레이블 중 하나인 소설가 사라 더난트 Sarah Dunant 의 문학적인 해설
안드레아 만테냐, 죽은 그리스도 Dead Christ, 68×81 cm c. 1483
르네상스 화가 만테냐 Andrea Mantegna의 '죽은 그리스도'에는 극단적인단축법 forshortening 이 적용되었다. 거의 반강제적으로 감상자들을 화면 가까이로 끌어당겨 그리스도의 손과 발에 난 상처를 보여주면서 이 죽음의 고통에 감정을 이입시킨다.그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단축도가 정확하지 않은 부자연스러운 발크기 정도는 잊게된다. 너무나 파격적인 표현 방법때문에 이 작품이 작가 자신의 개인 소장용이었으리라는 설도 전해진다.
카라바지오, 에마우스의 저녁 Supper at Emmaus, 1606
카라바지오의 '에마우스의 저녁' 역시 브레라에서 놓치지 말아야할 작품 중 하나다.제자들이 엠마오에서 저녁식사를 하는 도중 함께 식사하던 인물이 부활한 그리스도임을 알게되는 순간을 묘사하였다.그가 그린 런던 내셔날 갤러리 소장인 또 다른'에마우스의 저녁'과 비교하는 재미도 있다.
브레라의 진지한 감상자
밀라노를 떠나기 전날 너무 피곤해서 좀 쉬겠다는 아이를 두고 두오모 광장에 위치한노벤첸토
Il Museo del Novencento 를 찾았다. 노벤첸토는 20세기 이탈리아의대표적 미술작품들을 소장 전시하고 있다.각층을 연결하는 내부의 나선형 램프는구겐하임을 연상시킨다.
노벤첸토미술관과 내부의 나선형 램프
움베르토 보치오니, 지노 세베르니, 쟈코모 발라등 이탈리아 미래주의 작가들의 대표작들을 모두 한 곳에서 볼 수 있어 반가왔다.
움베르토 보치오니, Unique Forms of Continuity in Space, 1913 와 지노 세베리니, Dynamism of a Dancer, 1912
루치오 폰타나 Lucio Fontana, 네온 Neon 설치물이 걸린 공간 밖으로 두오모 광장이 내려다 보인다
댄 플라빈 Dan Flavin (1933-1996)의 설치작품이 있는 산타 마리아 아눈치아타 성당에서 밀라노 일정의 마무리를 짓고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언제가 될지 모르는 다음을 위해 남겨둔다.
숙소로 돌아오다 저절로 발길이 식자재의 천국 Peck으로 향했다. 마음같아서는 통째로 서울에 옮겨놓고싶은 곳이다. 최상급 퀄리티때문에 값도 만만치 않고 가져갈 수있는 식재료도 제한되어 있어 그림의 떡인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구경만해도 즐겁다. 여행 이후의 일상에 맛을 더해 줄 진한 향기의 얼그레이 티, 커피, 오렌지허니를 카트에담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