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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밍버드 Sep 03. 2018

이탈리아 북부 여행 1 (베니스)

베니스의 미술관

초여름, 가족과 함께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행선지는 이탈리아 북부 도시들 플러스 피렌체.

무려 29년전 여러 국적의 사람들과 3주 유럽 일주 단체여행에 끼어 이탈리아 북부에서 남부까지 수많은 관광지를 거의 열흘 만에 완결짓는 어마무시 일정을 끝으로 이상하게 이탈리아로 갈 수 있는 기 오지 않았다.  다음에는 좀 더 여유 있게 이탈리아를 여행해 보리라 했는데 립 밴 윙클이 무색하게 30년이 훌쩍 지나버렸다. 이번에는 주마간산식의 여행이 아니라 도시 몇 개에 집중해보고싶은 마음.

함께 떠날줄 알았던 남편은 일 때문에 일주일 후 피렌체에서 만나게 되었고 방학을 맞아 서울로 돌아온 아들과 베니스로 먼저 출발하였다. 남편 없이 이와 둘만의 여행은 처음이라 걱정과 가벼운 기대감이 교차했는데 이제는 엄마보다 머리 하나가 훌쩍 커버린 아들을 믿어보기로...  모든 귀찮은 일을 군소리없이 도맡아 하던 남편의 부재가 아쉽기는 했지만 피할 수 없으니 즐길 정도는 아니라도 부딪혀봐야지.


아들과 둘이서 베니스 도착. 마르코 폴로 공항에서 알리라구나 Alilaguna 오렌지라인 Linea Arancio을 타고 리알토Rialto에서 내려 숙소로 갔다. 위치는 리알토역에서 걸어서 5분거리로 산 마르코 광장 및 주요 관광 포인트에 인접한 쉬크한 아파트였다. 이 곳도 주요 관광지에 관리인을 두고 운영되는 기업화된 에어비앤비 숙소들 중 하나였다. 깨끗하고 세련된 곳이었지만 초기 에어비앤비가 주창하던 공유 경제의 개념과는 많이 멀어졌다는 생각에 약간 씁쓸했다.


베니스는 참으로 이상한 도시다. 아마도 눈에 보이는 사람의 90퍼센트 이상의 사람들이 관광객일 듯한데 마치 거대한 영화 세트장 혹은 17세기로 옮겨놓은 디즈니랜드같기도 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매력으로 가득한 곳이다. 자동차 심지어는 자전거 한대 보이지 않는 거리가 자연스러워  길을 걷는 어느 시점에 ‘어! 뭔가 달라’ 하는 순간이 한참 지나야 온다. 바퀴 달린 것이라고는 유모차 내지는 휠체어, 사람이 끄는 택배 수레 정도라 걷는 것이 일상이고 당연하다. 물론 길이 좁아 자동차가 다닐 수도 없지만 늘 바퀴달린 것들이 지날때  몸을 피할 준비가 된 삶에 익숙한 나로서는 얼마나 맘이 편한지. 골목길에 빽빽한 사람들까지 용서가 된다. 게다가 차대신 거미줄처럼 베니스를 엮고 있는 운하를 운행하는 작은 보트들과 곤돌라들은 이 섬을 더욱 비현실적으로 만든다.



이곳의 주요 교통 수단은 바포레토 vaporetto 라고 하는 수상 버스다. 노선도 간단하고 편리해서 한두번 타보면 금방 익숙해진다. 하루에도 몇 번씩 타게 되기 때문에 관광객들에게는 물론 정기권이 유리하고 청소년의 경우 롤링베니스카드를 구입하면 박물관 할인 혜택도 있다.


왼편에 카날 그란데 Canal Grande의 바포레토 리알토역이 보인다

베니스의 첫날을 기념하면서 숙소 근처의 추천받은 레스토랑으로 갔다. 아들과 와인 잔을 부딪치며 비주얼은 나쁘지 않았지만 맛이 가격을 따라오지 못했던 저녁식사를 마쳤다. 로컬 사람들은 관광객들이 올까봐 맛있는 레스토랑은 자식들에게도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우스개 소리를 들었는데, 베니스의 5일은 아침으로 먹던 숙소 근처 베이커리의 말고는 비싸기만 하고 맛은 그냥 애버리지를 넘기지 못하는 음식의 연속이었다. 본토에서 맛있는 이탈리안을 먹어보겠다고 작심한 아들과 나로서는 실망스런 나날들의 연속...


첫 날 저녁 나의 먹물 파스타와 아이의 라비올리

맘에 드는 레스토랑을 찾지는 못했지만 좋은 미술관들은 많이 만날 수 있었다. 베니스 미술관들의 아름다움은 오래된 건물 속에 담긴 새로움에 있다고 할까? 미술관으로 변모한 유서깊은 건물들에서 보이는 현대와 고전의 조화가 문화의 깊이를 전달해준다.

쿠에리니 스탐팔리아 재단 La Fondazione Querini Stampalia 건물원래 쿠에리니 가문의 마지막 일원이었던 지오바니 Giovanni Querinl 의 저택이었는데 1869년 그의 사망 후 베니스시에 기증되었던 유산의 일부다. 오늘날 미술관 및 문화활동을 위한 공간으로 도서관을 포함한 재단본부로 이용되고 있다. 소장품으로는 18세기와 신고전의 가구들, 조각, 비스크 도자기, 14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는 400여점의 회화들이 있다.

방문했을 때는 각 층마다 다른 전시들이 열리고 있었다. ‘성전에서 보여진 아기 예수 Presentazione di Gesu al Tempio’ 라는 주제로 르네상스 화가인 벨리니 Giovanni Bellini 와 만테냐 Andrea Mantegna의 해석을 비교하는 재미 있는 전시가 특히 눈길을 끌었다.  현대 미술 외에는 별 관심이 없는 아들을 붙잡아서 디테일을 설명해줬지만 시원치 않은 반응이다.


Fondazione Querini Stampalia
왼편이 벨리니 오른편이 만테냐의 작품

베니스의 프라다재단 미술관 Fondazione Prada 건물 역시 280년 전에 코르네르 Corner 가문에 의해 세워진 저택으로 2011년 이후 베니스 프라다 재단의 본부로 쓰이고 있다. 방문했을 때는 ‘Machines a Penser’ 라는 타이틀의 전시가 있었다. ‘망명, 도피, 안식의 상황과 반추, 사고, 지적 생산을 가능케하는 물리적 또는 정신적 장소들 사이의 상호 관련성을 분석’ 한다는 이 전시는 1층과 2층에 걸쳐 20세기의 대표적 철학자들인 아도르노

Theodor W, Adorno (1903-1969), 하이데거 Martin Heidegger (1889-1976), 비트겐슈타인 Ludwig Wittgenstein (1889-1951) 의  망명, 도피, 안식이 이루어졌던 지역들과 주변 환경이 여러 작가의 사진, 지도와 개념적인 구조물로 형상화된 프로젝트였다.


카날 그란데에 면한 Prada Fondazione
아도르노에게 헌정된 1층 전시공간 바닥타일에는 그의 망명지가 그려져있다.

프라다 재단 미술관 가까이 위치하는 카 사로 Ca’Pesaro 현대미술관 Galleria Internazionale d’Arte Moderna 역시 카날 그란데에 면하는 아름다운 바로크 양식의 건물이다. 1층과 2층에는 클림트, 클레, 칸딘스키 및 제프 쿤스의 작품 같은 19 -20세기의 미술 작품이 주를 이룬다. 3층에는 특이하게도 동양미술 주로 에도 시대의 일본미술품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놀랄만한 양과 질의 도검류등을 볼 수 있었다. 베니스에 온다면 꼭 한 번 들려볼만한 아름다운 미술관인데도 임박한 Fiorucci의 대규모 전시 준비가 한창이어서 폐쇄된 전시실도 많았고 심지어 3층에는 에어컨도 잘 작동되지 않아서 뭔가 방치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카 페사로
카 페사로 미술관이 소장한 대표적 작품인 클림트의 유디트

사로 미술관을 가는 도중 눈여겨 보았던 오스테리아로 들어갔다. 구글 리뷰도 나쁘지 않음을 미리 확인했고 컨템퍼러리 베네치안 쿠진이라는 점도 마음에 든데다 이 건물이 사이프러스 왕비인 카테리나 코르나로가 태어난 16세기의 건물이라는 미슐랭 가이드의 친절한 설명까지 더해져 실패하지 않으리라는 기대감이 더욱 업그레이드 되었다. 무엇보다도 아이와 나는 엄청 배가 고팠다. 늦은 점심이긴 해도 우리 외에는 손님이 없다는 사실이 약간 불안했는데 역시 결과는...  텃밭에서 갓 식탁으로 올라온 듯한 샐러드는 그림만 좋았고 파스타는 그 짜기가 바닷물 정도였다. 생선튀김만 그럭저럭 위안이 되었다. 우리가 결코 까다로운 입맛의 소유자들은 아닌데 말이다. 식사를 마칠 무렵 스패니쉬로 말하는 한 커플이 들어와 앉았다. 같은 샐러드와 파스타 주문.  그들의 반응을 보고싶기도 했지만 가야할 시간.


베니스방문의 가장 큰 이유중 하나였던 지오르지오네 Giorgione (1478-1510) 의 폭풍우 La Tempesta 를 보기위해 아카데미아 미술관 Gallerie dell’Accademia로 향했다. 전성기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베니스 화가 지오르지오네의 작품은 부드러움과 시적이면서도 수수께끼같은 모호함으로 감상자를 매료시킨다. 벨리니의 제자였던 지오르지오네는 서른을 갓 넘어 요절한 만큼 남아있는 작품 수도 많지 않다. 지오르지오네 사후 그의 몇몇 미완성작품을 그의 제자이자 동료였던 티지아노 Titian, Tiziano Vecelli (1488 ? -1576) 가 완성했다고 전해지고 그때문에 그의 작품이 티지아노의 작품으로 전해져 오기도 하는 등 아직도 논쟁은 진행중이다.


지오르지오네의 템페스트

멀리서는 번갯불이 번쩍이고 하늘은 갑자기 어두워지는데 살랑살랑 움직이기 시작하는 나뭇가지에서 빠르게 변화하는 차가운 대기의 움직임이 느껴진다. 불안과 긴장은 감상자의 몫이고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여인과 그를 바라보는 목동의 평안함은 이 그림의 해석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특별히 폭풍우같은 험한 날씨에 늘 감격하는 나에게 이 작은 그림에서 느껴지는 강한 울림은 다함이 없다.

소장품만큼 아름다운 아카데미아 미술관 전시실의 천정과 대리석 바닥

베니스에 가면 누구나 반드시 들리는 산마르코 광장에 위치한 두칼레 궁전 Palazzo Ducale 은 이 도시의 상징으로 아름다운 고딕 건물이다. 베네치아 총독 Doge 의 주거지이자 정치, 행정의 중심지이기도 했던 이 건물의 천정과 벽은 내부는 티지아노, 베로네제 Paolo Veronese, 틴토레토 Jacopo Tintoretto, 티에폴로 Giovanni Battista Tiepolo 같은 르네상스, 바로크 거장들의 회화 작품들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사진만으로는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의 규모와 아름다움은 당시 베니스의 영화를 그대로 반영한다.


평의원 회의실 Sala del Maggior Consiglio 정면에 보이는 그림이 틴토레토의 천국 Paradiso 이다
두칼레 궁 내부 감옥으로 연결된 탄식의 다리 Ponte dei Sospiri 에서 내려다 보이는 운하

여러 베니스의 미술관들 중 아이가 제일 좋아한 곳은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이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건물자체도 페기 구겐하임의 저택이었던 만큼 정감있고 아름다운데다가 20세기 현대미술 콜렉션의 퀄리티가 남다르다. 그녀의 개인 소장품이었던 큐비즘, 초현실주의 , 미래주의,  추상표현주의 작가들의 대표적인 작품들이 가득하다.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 입구. 건물 파사드는 카날 그란데와 면해있다
 쟈코메티와 아르프의 작품등이 전시된 조각정원과 잭슨 폴락의 전시실

베니스에서의 마지막 날은  황금의 집이라는 뜻의 아름다운 카 도로 Ca’ d’Oro 저택 방문으로 마무리지었다. 원래 건물 외관의 도금장식 때문에 그런 별칭이 붙여졌는데 1428년에서 30년사이 콘타리니 가문을 위해 건축되었고 마지막 소유주인 지오르지오 프랑케티 남작이 이탈리아 정부에 건물과 자신의 소장품들을 기부한 이후 미술관이 되었다.  배를 타고 카날 그란데를 지나다 보면 돌이 아니라 마치 레이스로 짜놓은 듯한 아름다운 건물들이 수없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건물을 뽑는다면 단연 카 도로가 아닐까 싶다.

1층은 운하에 면한 다른 저택과 마찬가지로 배가 닿는 곳과 중정이 이어지고, 거주공간이던 2.3층이 전시 공간이다.


카날 그란데 건너편에서 바라본 카도로 저택과 운하에 면한 건물 1층 내부
1층 중정
2층 전시실과 Matteo Eletto의 대리석 흉상

2층 전시실에는 만테냐의  성 세바스챤을 비롯한 많은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도 베르가모 출신의 조각가 바르톨로메오 디 프란체스코 Bartolomeo di Francesco 가 16세기 초에 조각한 Matteo Eletto의 흉상이 눈길을 끌었다. 로마시대의 극 사실적 초상 조각을 연상시키는 이 조각은 마치 감상자와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는 듯했다. 성직자의 로만 칼라 위로 보이는 굵은 목주름들, 타협을 모르는 고집스런 입매, 얇은 입술, 날카로운 파인 눈매와 굳어진 미간 주름은 설명 한줄 없어도 Matteo Eletto가 어떤 사람이며 어떤 생애를 살았는지 말해준다.


아름다운 무라노와 부라노 섬

5박 6일간의 짧은 베니스 여정을 뒤돌아 볼 때 어딜가나 너무 많았던 관광객들, 아픈 다리, 비싸지만 맛없는 음식의 기억들은  마치 컴퓨터 그래픽으로 지저분한 배경을 없앤 그림처럼 희미해지고, 대신 꿈같던 아름다운 풍경만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것이 바로 그 어디도 아닌 베니스의 마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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