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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원 Dec 27. 2021

제9화 - 전자이야기1

TDX 개발로 ICT산업의 기반을 일궜다

 사전에는 전자산업(electronic industry)이 전자공학을 기술의 기본으로 한 전자기기 제조 산업으로 정의돼 있다. 「전자공업진흥법」은 전자관・반도체소자, 기타 이와 유사한 부품을 사용하여 전자의 운동과 특성을 응용하는 기계・기구를 제조하는 사업으로 규정하고 있다. 전자와 전기산업은 구분된다. 전자산업이 전자의 운동을 정보로 하여 이용하는 기술을 핵심으로 하는데 반해 전기는 전자의 운동을 에너지로 이용하는 기술을 중심으로 성립된 산업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전자산업을 ICT산업이라 한다     

  오늘날에는 전자산업을 정보통신기술(ICT; information and communications technologies) 산업이라고도 한다. ICT산업에는 정보통신방송기기 외에도 정보통신방송서비스와 소프트웨어산업이 포함된다. ICT 통합분류체계에서도 ICT산업을 이들 3개 부문으로 분류하고 있다. 20세기 후반 이후 급속한 발전을 보이고 있는 ICT산업은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하는 부문이다.

  4차 산업혁명은 2016년 세계경제포럼(WEF; World Econo- mic Forum)에서 주창된 용어다. 증기기관 발명으로 시작된 1차 산업혁명(18세기 후반∼19세기 초반)과 전기가 등장한 이후인 2차 산업혁명(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그리고 디지털 혁명으로 일컬어지는 3차 산업혁명(20세기 후반)에 이어 4차 산업혁명은 로봇, 인공지능, 나노, 생명공학, 사물인터넷(IoT), 3D 및 자율주행차량 등 여러 분야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기술혁신을 의미한다.

ICT산업 분류체계    

 자료 : 한국전자정보통신산업진흥회     

  이제 우리나라 전자산업과 정보통신서비스의 역사 및 현황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먼저 이 장에서 방송과 유선전화, 무선통신 부문을 살펴보고, 다음 이야기 마당에서는 전자기기 및 부품 관련 사항을 설명할 계획이다.     

1927년 경성방송국 개국으로 방송이 시작됐다     

  우리나라 방송의 역사는 1927년 경성방송국이 개국되고, 1935년부터 부산, 평양, 대구, 광주 등 지방방송국도 차례로 라디오 방송을 송출하면서 시작됐다. 1945년 해방 당시 전국에는 약 30만대의 라디오가 보급돼 있었다. 1954년에는 최초의 민간방송인 기독교방송국이 개국했다. TV방송은 1961년 흑백으로 시작해서 1980년에는 컬러 방영이 개시됐다.

  현재 준공영방송인 문화방송(MBC)은 1961년에 설립됐다. 그리고 1964년에는 민간방송사로 동양방송(TBC-TV)이 서울과 부산에 개국됐으나 1980년 언론사 통폐합 조치에 따라 KBS-2TV로 편입됐다. 1990년 서울방송(SBS)이 개국한 후 1995년부터 2006년까지 PSB(부산), TBC(대구), TJB(대전), KBC(광주) 등 지역 민영방송이 차례로 방송을 시작했다. 2010년에는 TV조선, JTBC, 채널A, MBN 등 4개 종합편성채널이 개국했다. 

    

최초의 전화는 1898년 대한제국 궁내에 설치됐다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Alexander Graham Bell)이 1876년 발명한 것으로 알려진 전화기가 우리나라에는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1896년에 들어와 1898년까지 대한제국 궁내에 9대 설치됐다. 1948년 정부 수립 후 전화 사업은 정부부처인 체신부가 담당했다. 전화가입자는 1966년 30만명에 도달한 후 10년 후인 1976년에는 100만을 넘어섰다.

  「전기통신법」을 개정하여 1970년부터는 전화의 사용권만 인정하는, 이른바 청색전화 제도를 도입하고 전화가입 청약제도를 시행했다. 1971년에는 서울과 부산 간 장거리자동전화(DDD) 방식이 개통됐다. 1982년 체신부 산하에 설립된 공기업인 한국전기통신공사(한국통신)가 전화관련 사업을 체신부로부터 이관 받았다. 한국통신은 2002년 민영화되고, KT로 사명이 변경됐다.

  1987년부터는 전화 설치를 신청하면 즉시 가설해 주는 체제에 돌입함으로써 청약제도는 사실상 폐지됐다. 이 해에 전화가입자가 1,000만명을 돌파했고, 장거리 전화의 DDD 방식이 전국적으로 실시됐다.   

  

한때 전화는 백색과 청색전화로 구분됐다     

  1970년 이전까지는 전화 가입자가 전화회선 소유권을 가졌기 때문에 이사하거나 사무실을 이전할 때 전화도 같이 가져갔고, 타인에게 양수도도 가능했다. 부동산중개소처럼 전화상이 있어 전화회선의 매매를 중개했던 것이다. 1960년대 중후반 들어 경제활동이 활성화되고 소득 수준이 향상됨에 따라 전화 수요는 급격히 증가했다. 반면에 전화회선 공급량은 연간 3∼5만회선에 불과했다. 그 결과 전화가격이 급등했다. 당시 서울 중심지를 관할했던 을지전화국 관내의 전화 1회선 가격은 웬만한 주택 한 채 값을 웃돌았다. 

  치솟는 전화회선 가격에 대응하기 위해 정부는 「전기통신법」을 개정하여 1970년 9월부터 신규 개설되는 전화에는 사용권만 부여하는 한편 전화가입 청약제도를 도입했다. 약 45만개의 기존 전화회선에 대해서는 소유권을 계속 부여하면서 별도로 관리했다. 그 명단(리스트)을 백색 용지에 기재했기에 이들이 소유한 전화는 백색전화로 불려졌다. 이후 보급되는 전화회선의 사용자, 즉 전화사용권자들은 청색 용지에 명단이 기록됨에 따라 청색전화로 분류됐다.

  신규로 전화가입을 신청하는 청약자를 1∼4순위로 구분하고, 우선순위에 따라 전화회선을 배정했다. 대부분의 청약자는 4순위였는데 1970년대 후반 서울의 4순위자에게는 청약 후 1∼3년이 지나서야 전화가 개설됐다. 그만큼 적체가 많았다. 회선 당 청약금은 중산층 봉급생활자의 한 달 급여와 맞먹는 25만5천원이었다. 전화청약 대기 현상은 1980년대 중반 이후 全전자식교환기인 TDX가 광범위하게 설치되어 매년 100만회선 이상 전화가 증설됨에 따라 해소됐다.

     

유선전화 교환방식은 네 종류로 운용돼 왔다     

  유선전화 교환 방식은 교환원이 두 가입자 간 통화를 연결해 주는 수동식, 그리고 발신자가 기계나 전자 방식으로 직접 수신자에게 연결해 통화하는 자동식으로 대별된다. 수동식은 다시 자석식과 공전식으로, 자동식은 기계식과 전자식으로 나뉜다.

  자석식이란 개별 전화기에 설치된 전원장치를 통화 요청 시에 가동시켜 교환원에게 신호를 전하는 방식이다. 공전식은 전화국에 공동으로 설치된 전원장치를 사용하여 발신자가 수화기를 들면 교환원이 인지하는 시스템이다. 기계식은 발신자가 전화기 다이얼을 돌리면 전화국에서 전기기계식 소자를 통해 수신자에게 연결하는 아날로그식 방식이다. 전자식은 발신자가 전화기의 번호키를 터치하면 전화국에서 전자 방식을 통해 수신자에게 연결하는 형태다. 전자식 교환시스템은 일부분을 전자화한 半전자식 방식과 모든 부분을 디지털화한 全전자식으로 구분된다.

  우리나라에서는 1970년대 후반까지 자석식, 공전식의 수동식 2종과 자동식 중 기계식의 세 가지 방식이 동시에 운용되기도 했다. 동시대에 일부 면단위 지역에서는 자석식이, 읍지역 등에서는 공전식이, 도시지역에서는 기계식이 사용됐다. 1979년 말에는 반전자식 교환기가 처음으로 설치됐다. 전화기도 교환방식에 따라 각각 상이하다.

교환방식별 전화기 형태       

  전화교환방식이 점차 자동식으로 전환됨에 따라 수동식 교환에 종사했던 교환원들이 일자리를 잃게 됐다. KT는 2001년에 전화번호 안내법인인 한국인포서비스(KOIS)를 설립하고, 이들을 114 전화번호안내 상담원으로 채용했다. KOIS 직원 수가 설립 시에는 4,000명을 상회했으나 이들 대부분이 정년퇴직한 2020년 현재 600여명이 근무하고 있다.

     

전자식교환기를 도입한 후 전전자식교환기를 자체 개발했다     

  정부는 급증하는 통신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전자식교환기의 설치가 불가피하다고 인식하고 1차적으로 반전자식교환기 도입을 추진했다. 기계식교환기는 접속불량이 잦고 속도가 느릴 뿐 아니라 회선 증설과 유지・보수에 어려움이 있었던 까닭이다. 1978년 벨기에 BTM(현 Alkatel)사가 제작한 1만회선 용량의 M10CN 기종 2기를 도입하여 1979년 말 서울의 영동전화국(555국)과 당산전화국(676국)에 설치했다. 이로써 우리나라에도 전자교환기 시대가 열리게 됐다.

  당시 선진국 통신설비기업들은 한국의 전자식교환기 시장 규모가 100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예상하고 치열한 수주 경쟁을 벌였다. BTM사는 기술 인력에 대한 연수와 벨기에 정부의 대규모 차관 제공을 부대조건으로 입찰에 참가하여 낙찰자로 선정됐던 것이다. 연수를 다녀 온 기술자들을 중심으로 반전자식교환기의 국산화를 추진하여 1980년에 4만5천회선, 1981년에는 10만회선 분의 국산 M10CN 교환기가 설치됐다. 1983년부터는 전전자식교환기인 스웨덴 LM Ericsson사의 AXE-10를 도입・설치하기 시작했다.

  또한 전자식교환기의 국산화를 국책사업으로 추진하여 1982년 500회선 용량의 선행(先行) 시제품인 TDX-1X를 시험 개통했다. 이어 1986년에는 1만회선 규모의 TDX-1A를 개발하여 전화국에 설치했다. 1989년과 1991년에는 각각 2만회선인 TDX-1B 및 10만회선 용량의 TDX-10 개발도 완료했다. TDX란 시분할방식교환(time division exchange)의 약자로서 세계에서 10번째로 개발한 한국형 全전자교환기 명칭이다. TDX 교환기는 1991년 필리핀을 시작으로 동남아 등지에 지속적으로 수출됐고, CDMA 개발 등 우리나라 전자통신 발전의 초석으로서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다.

     

1971년부터 장거리자동전화가 시작됐다     

  장거리자동전화(DDD; direct distance dialing)는 장거리(시외) 통화 시 전화교환원 없이 통화자가 지역번호와 상대방 전화번호를 눌러서 통화하는 방식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71년 서울-부산 간 처음으로 시행됐다. 1975년 도청소재지 간에 DDD가 개통된 후 점진적으로 확대돼 오다가 1987년 농촌지역의 통화권을 읍면 단위에서 시군 단위로 광역화하는 사업이 완료됨과 동시에 전국을 대상으로 한 장거리자동전화 방식이 보급됐다.

  144개 지역번호 체계로서 서울은 두 자리, 대도시는 세 자리, 나머지 지역에는 네 자리의 지역번호가 부여됐다. 예컨대 경기도 수원시는 0331, 강원도 춘천시는 0361였다. 2000년 7월에는 네 자리 지역번호가 도 단위로 통합된 세 자리 숫자로 축소됐다. 당시에는 지역번호 수가 16개였으나 세종시가 추가되어 현재는 17개다.     

이동전화 보급 확대로 유선전화는 퇴조된다     

  1990년대 후반부터 이동전화 보급이 시작되고, 인터넷전화의 개통으로 유선전화 가입자 수는 2002년 2,349만명을 정점으로 감소하기 시작했다. 2019년 말 현재 1,360만명으로 줄어들었다. 반면 무선전화 보유수는 1999년 9월을 기점으로 유선전화보다 많아지기 시작했다. 2019년 현재 유선전화의 5배 이상인 6,889만명에 달한다. 현재 인터넷전화도 가입자 수도 1,000만명을 넘고 있다.      

  자료 : 미래창조과학부, 시내・이동전화 가입자 현황

  우리나라는 여타 선진국들과 마찬가지로 전화서비스가 유선전화를 거쳐 무선(이동)전화로 발전해 왔다. 그러나 동남아나 아프리카 국가들의 경우는 개인 간 통신수단이 바로 이동전화로부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유선전화 감소와 기계식 교환기 퇴출에 따라 KT지사(구 전화국)에는 유휴공간이 생겨났다. 기계식 교환기는 전자식에 비해 설치하는데 넓은 면적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전화국은 대체로 도시 중심부 등 요지에 소재한다. 따라서 KT는 금싸라기 땅을 소유한 부동산 부자인 셈이다. 최근 들어 KT는 유휴 부지를 활용하여 다른 용도로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서울 영동전화국과 신사전화국의 경우 부지의 상당 부분을 할애하여 각각 신라스테이와 Andaz란 호텔을 건립한 것이 좋은 예라 하겠다.


전신은 우정사 설립과 서로전신선 개통으로 시작됐다     

  1882년 우정사(郵政司)가 설립되고 경복궁 내에 전신이 설치된 것이 우리나라 무선통신의 효시다. 1885년 미국과 청나라의 지원으로 한성↔평양↔의주를 연결하는 서로전선(西路電線)이 개통됐다. 이어 1897년에는 한성↔공주↔대구↔부산 간 남로전선(南路電線)이 영국기술진에 의해 구축됐다.

  해방 후 무선이동통신은 1960년대부터 일부 특수층을 대상으로 서비스가 제공됐다. 그러나 본격적인 서비스는 1984년 한국통신의 자회사로 한국이동통신이 설립되면서 시작됐다. 이 해에 한국이동통신이 일반가입자를 대상으로 한 차량전화와 무선호출 등 이동통신서비스를 개시했던 것이다. 휴대전화서비스는 서울올림픽대회 개최 직전인 1988년 7월에 개통됐고, 1997년에는 PCS (개인휴대전화)도 도입됐다. 2007년 스마트폰이 등장했고, 2010년에는 우리나라의 이동전화 가입자 수가 5,000만명을 돌파했다. 

  천리안(1984년)과 하이텔(1986년)을 비롯한 PC통신 서비스는 1980년대 중후반부터 시작됐다. 인터넷을 통한 전자문서인 이메일로 대체되기까지 전자정보 형태의 문서 전달 기능을 수행하다가 2007년에 서비스를 중단했다. 1991년 영국의 Tim Berners-Lee 경이 고안한 www(world wide web)가 우리나라에도 들어와 인터넷 시대가 열렸다.

     

무선통신은 무선호출기에서 카폰을 거쳐 휴대전화로 이어졌다     

  무선호출기는 손바닥보다 작은 단말기로서 호출 시에는 사전에 정해 둔 곳으로 공중전화 등을 통해 연락하는 단방향 통신기기다. 군사용 등 특수목적용 무전기를 제외하고는 최초의 무선 통신수단이었다. 영어 명칭은 페이저(pager)이나 호출 시 ‘삐삐’라는 소리가 나서 비퍼(beeper)라고도 하며, 우리나라에서도 그냥 삐삐로 불렀다. 

  1982년 말 200-○○○○이라는 번호체계로 도입됐는데 월 사용료가 대기업의 대졸 초임 수준인 20만원으로 매우 비쌌다. 초기에는 정부 고위직이나 의사 등 특수직종 인사들이 주로 사용했다.  1986년부터는 한국이동통신(식별번호 012)과 서울이동통신(식별번호 015) 등 지역별 사업자들이 무선호출 서비스를 제공했다. 답신할 전화번호나 숫자로 된 메시지의 전달이 가능해졌고, 단말기 가격과 이용료도 현저하게 낮아졌다. 그래서 무선호출기 보급대수는 급격히 늘어나 1997년에는 1,500만대에 달했다. 그러나 이후 이동전화와 PCS의 보급이 늘어남에 따라 점차 소멸됐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자동차에 부착된 전화장치로 통화하는 카폰(car phone) 서비스는 1984년부터 본격화됐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카폰은 1960년 각료들 자동차에 처음 설치됐으며, 당시에는 주요 정부인사, 대기업 CEO 등 소수의 특수층들만 이용했던 서비스였다. 그러나 주파수 공유가 되지 않는 시기여서 무전기와 동일한 방식으로 운용되는 통신수단이었다. 때문에 보급량이 300여대로 극히 제한적이었고 사용료도 매우 비쌌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카폰 서비스가 개시된 초기에는 단말기 가격이 당시 현대자동차 ‘포니2’ 가격의 거의 2배나 되는 400만원 이상으로 고가였다. 그래서 부(富)의 상징으로 인식됐고, 카폰 없이 안테나만 설치해서 다니는 자동차들도 생겨났다. 1990년대 들어 휴대전화 보급이 늘어남에 따라 카폰 수요는 급감했다. 그러다가 1999년 아날로그 방식 이동통신 시스템의 종료와 함께 시장에서 사라지게 됐다.

     

이동전화는 벽돌전화기에서 PCS, 스마트폰으로 발전했다     

  이동전화기는 1973년 미국의 전자업체 모토롤라가 개발했지만 이동전화 네트워크는 일본이 1979년 세계 최초로 구축했다. 우리나라에서는 1988년부터 011이란 식별번호로 휴대용전화 서비스가 시작됐다. 초창기 이동전화기는 크고 무거워 벽돌이라고 불리었다. 이동전화 가입자 수는 1990년 말 8만명에서 신세기통신이 출범한 1996년 4월에는 518만명으로 증가했고, 1998년 1,000만명을 돌파한 후 매년 급증하여 2019년 현재 약 7,000만명에 이른다.

  1994년 이동전화 시장에 경쟁체제를 도입한다는 목적으로 신세기통신이 설립되어 1995년 017이란 식별번호로 이동전화를 개통했다. 1994년에는 한국이동통신이 선경그룹에 인수됐고, 이후 SK텔레콤(SKT)으로 사명이 변경됐다. 1996년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code-division multiple access)을 이용한 이동통신 서비스가 세계 최초로 상용화됐다.

  1997년에는 정부가 PCS(personal communication service; 개인휴대통신) 이동통신 사업자 3사를 선정했다. 한국통신프리텔(KTF)은 016, 한솔PCS는 018, LG텔레콤은 019의 식별번호로 서비스를 개통했다. 이로써 휴대전화서비스 시장은 기존의 셀룰라 폰(cellular phone)으로 서비스하는 2사와 함께 5사 체제로 형성됐다. 이후 한솔PCS를 KTF가 인수하고, 2002년에는 신세기통신을 SKT가 인수함으로써 SKT, KTF, LG텔레콤 3사 체제로 재편됐다.

  PCS는 셀룰라 폰에 비해 높은 주파수 대역을 사용한다. 주파수 대역이 높으면 양자 간 간섭 없이 독립적으로 동일 주파수를 이용할 수 있는 통화권인 셀(cell) 크기가 작아진다. 그래서 PCS는 기지국을 상대적으로 많이 설치해야 서비스가 가능하다. 현재는 PCS 전용주파수 대역이 폐지됐으며, 2014년부터는 이동전화의 식별번호를 010으로 통합하여 운영하고 있다.

  2007년 미국 애플사는 아이폰이란 이름으로 스마트폰을 개발했다. 곧 이어 삼성전자와 LG전자도 스마트폰 갤럭시와 옵티머스를 출시했다. 이동통신은 정보전송속도에 따라 세대를 구분한다. 음성통화만 가능한 1G(1세대)는 1984년에 시작됐고, 2G는 1991년 CDMA2000으로, 동영상 시청이 가능한 3G는 1998년부터였으며, 2013년 4G인 LTE를 거쳐 2019년부터는 5G 시대에 돌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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