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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원 Mar 03. 2022

제28화 - IMF이야기

현(現) 국제경제 질서는 제2차 세계 대전 교훈에서 탄생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인 1944년 7월 1일 44개국에서 온 730명의 대표단이 미국 뉴햄프셔주 휴양지인 브레튼 우즈(Bretton Woods)의 마운트 워싱턴 호텔에 모였다. 전후 국제경제체제를 논의하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7월 22일까지 진행된 회의에서 국제통화기금(IMF; International Monetary Fund)과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International Bank for Reconstruction and Development) 등 오늘날 세계경제의 근간을 형성하는 기관 창설에 합의했다. 즉, 브레튼 우즈 체제라고 하는 세계경제 운용의 틀이 마련된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과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설립에 합의했다     

  브레튼 우즈 회의에서는 1930년대 이래 노정돼 온 통화가치의 불안정 및 외환 통제, 각국 간 평가절하 경쟁과 무역거래의 제한 등을 시정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아울러 국제무역을 증진하고, 고용과 실질소득을 높이는 한편, 환율 안정과 함께 외환 자유화 및 국제수지 균형을 도모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이와 함께 개발도상국을 지원하기 위한 제도의 구축 방안도 논의했다.

  이 회의에서 전후(戰後) 국제경제 질서의 기본적인 틀이 수립됐다. 국제통화 제도는 미국 달러화를 기축통화(key currency)로 하는 금환본위제를 근간으로 하고, 달러화 가치를 금 1온스에 35달러에 고정했다. 다른 나라 통화들의 환율은 달러화에 묶어(peg)두되 환율 조정이 필요할 경우 원칙적으로 ±1% 범위 내에서만 허용하는 고정환율제(fixed exchange rate)를 채택했다.

  또한 국제경제 질서를 주관하는 기구로서 세계중앙은행 격인 IMF를 설립하고, 전후 복구와 개도국을 지원하기 위해 우리나라의 산업은행과 같은 성격의 IBRD를 창설하기로 했다. 이들 양대 기구는 1946년 워싱턴 DC에 설립됐다. 브레튼 우즈 회의에서 국제통화제도로 고정환율제가 채택되고, IMF와 IBRD 등 국제금융기구를 설립하기로 합의한 이유는 제2차 세계대전의 교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20세기 초반 선진국들의 생산력이 급격하게 증대함에 따라 세계적인 공급과잉 현상이 나타났다. 그러나 유효수요가 부족하여 급기야 1929년에는 세계적인 대공황사태가 발생했다. 이에 각국은 자국 생산물에 대한 수요를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자국 통화의 평가절하를 통해 수출 확대에 주력하는 한편, 수입 허가제와 관세 인상 등 수입을 제한하는 조치도 속속 발동했다. 특히 선진국들 간에 이러한 근린궁핍화정책(begger-thy-neighbor policy)의 경쟁적인 추진은 결국 전쟁의 빌미가 됐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본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 원인이 이러하기에 추후 전쟁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지나친 경쟁을 방지하는 제도 구축이 절실히 요구된 것이다.

  전후 세계경제 질서의 근간이 되는 IMF와 IBRD는 창설됐으나 또 하나의 축인 세계무역을 관장하는 기구는 미설치된 채 브레튼 우즈 체제가 출범하게 됐다. 당초 논의된 국제무역기구(ITO; International Trade Organization)의 설립이 미국의 반대로 무산됐기 때문이다. 이를 대신한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General Agreement on Tariff and Trade)」이 1995년 세계무역기구(World Trade Organization; WTO)가 설립될 때까지 그 기능을 수행했다.     

전후 세계경제 체제의 3대 기구   


달러화가 기축통화로 결정됐다     

  브레튼 우즈 회의에 참석한 미국 대표는 해리 덱스터 화이트(Harry Dexter White) 재무부 차관이었고, 영국에서는 저명한 경제학자인 존 매이너드 케인즈(John Maynard Keynes) 남작이 대표로 나왔다. 케인즈는 유효수요 이론의 창시자로서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한 대책으로 재정지출 확대를 주창했고, 이는 루즈벨트 대통령이 추진한 뉴딜정책의 이론적 배경이 되었다.

  이들 두 대표는 기축통화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케인즈는 방코(Bancor)란 이름의 새로운 세계통화의 창설을 제시했으나 미국은 달러화가 기축통화로서의 역할 수행이 가능하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당시 미국이 전 세계 지금용(地金用; 화폐용) 금의 70%를 보유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세계 총생산(GDP)의 50%를 차지하기 때문에 국제통화로서 달러화에 대한 지급보증 능력이 충분하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결국 미국이 경제력을 앞세워 밀어붙임으로써 달러화가 기축통화로 결정됐다.

  현재에도 세계 각국의 지금용 금은 미국의 뉴욕연방준비은행에 보관돼 있다. 미국이 연방국가라서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보스턴, 뉴욕, 필라델피아, 클리블랜드, 리치몬드, 애틀란타, 시카고, 세인트루이스, 미니애폴리스, 캔자스시티, 댈러스, 샌프란시스코 등 12개 지역연방준비은행을 산하에 두고 있는데 외환은 뉴욕연방준비은행이 통괄한다. 국별 금 지분이 변동하면 뉴욕연방준비은행 지하실에 보관된 금괴를 이동 배치하는 것으로 결제가 완료된다. 1995년 개봉된 할리우드 영화 ‘다이하드3’은 악당들이 뉴욕연방준비은행 지하실에 보관된 지금용 금괴를 탈취하다 실패한 내용의 줄거리로 제작됐다.

  세계경제 질서의 구축과는 별개로 미국은 유럽 경제의 회복을 위해 마셜플랜(Marshall Plan)을 추진했다. 국무장관 마셜의 주창으로 미국이 유럽 국가들에게 1947년부터 4년간 130억달러를 지원함으로써 1950년대 초반에는 서독을 제외한 유럽 경제가 전전(戰前) 수준으로 회복됐다. 유럽 지역에서의 공산화 확산 방지에도 목적이 있었던 마셜플랜은 유럽부흥계획(ERP; European Recovery Plan)으로도 불린다.

      

특별인출권 도입에도 불구하고 유동성 딜레마가 현실화됐다     

  세계 경제가 성장하면 교역 규모도 커지게 되고, 국제 결제에 소요되는 기축통화 수요 또한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러자면 달러화 공급량이 지속적으로 확대돼야 한다. 세계 시장에서 달러화 공급은 미국의 국제수지 적자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런데 미국의 국제수지 적자가 누적되면 필연적으로 달러화의 신뢰도가 떨어지게 된다. 이처럼 국제유동성 증가와 통화의 신인도는 양립하지 못한다는 것이 유동성 딜레마(liquidity dilemma)다. 1960년대 예일대 경제학과 트리핀(Robert Triffin) 교수가 브레튼 우즈 체제 하의 국제통화질서에서 치명적인 약점으로 지적한 논리다.

  IMF는 국제결제 시장에서 유동성 부족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으로 1969년 특별인출권(SDR; spacial drawing right) 제도를 도입했다. 이는 회원국이 외환부족 시 IMF로부터 인출해 쓸 수 있는 긴급자금이다. 자국 화폐를 IMF를 예치하고 SDR을 받아서 사용한다. SDR은 고정환율제를 유지하기 위한 제3의 국제통화인 셈이다.

  도입 당시 1SDR은 미화 1달러와 동일한 금 0.88671g의 가치를 지녔다. 그러나 달러화의 금태환이 정지되고 평가 절하가 단행된 이후인 1974년부터는 달러화, 영국 파운드화 등 세계교역 1% 이상인 상위 16개국 통화와 연계된 복수통화바스켓 방식으로 SDR의 가치를 산출했다. 1980년 이후에는 통화바스켓을 미국, 영국, 프랑스, 서독, 일본 등 5개국 통화로 축소했고, 2015년 12월부터는 중국의 위안화가 통화바스켓에 편입됐다. 현재 SDR의 가치 산정에 적용되는 통화별 가중치는 미국 달러화가 41.73%이고, 유로화는 30.93%, 그리고 중국 위안화 10.92%, 일본 엔화 8.33%, 영국의 파운드 스털링 8.09%로 구성돼 있다.

     

미국은 달러화의 금태환 정지를 선언했다     

  1971년 8월 미국 닉슨 대통령이 달러화의 금태환 정지를 선언함으로써 금본위제도를 기반으로 한 브레튼 우즈 체제는 종료됐다. 서독과 일본 경제가 회복함에 따라 미국 경제의 상대적 지위가 약화된 데다 베트남전쟁 수행 등으로 미국의 재정 및 무역적자, 즉 쌍둥이적자가 확대일로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트리핀 교수가 지적한 유동성 딜레마는 현실화됐다. 금태환 정지의 조짐은 1960년대 중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프랑스 드골 대통령은 1965년부터 자국이 보유한 달러화를 금으로 교환해 줄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결국 1971년 7월 1억9,100만달러를 금으로 바꾸었다. 함께 참여한 스위스는 5,000만달러를 교환했다. 이에 앞서 서독은 1971년 5월 브레튼 우즈 체제에서 탈퇴를 선언했다.

  미국의 금태환 정지 선언에 따라 그해 12월 워싱턴 DC에 소재한 스미소니안 박물관에서 선진 10개국 재무장관 회의가 개최됐다. 금 1온스를 종전 35달러에서 38달러로 조정함으로써 달러화를 평가절하하고, 환율 변동폭도 ±1%에서 ±2.25%로 확대하기로 의결했다. 1973년 3월에는 금 1온스에 44.22달러로 달러화의 2차 평가절하가 단행됐다. 달러화의 금태환이 정지된 이후의 국제통화 질서를 회의 장소의 이름을 따서 스미소니안 체제라고 한다.

  스미소니안 체제도 오래 가지 못했다. 달러화의 신인도 하락이 지속되자 IMF는 대책 수립을 위해 1976년 1월 자메이카 킹스턴에서 제5차 IMF 잠정위원회를 개최했다. 이 회의에서 환율 제도를 사실상 변동환율제로 전환하고, 대외거래 준비자산도 달러화 대신 SDR 중심으로 전환을 결정함으로써 킹스턴 체제가 탄생했다. 이로써 국제통화제도는 금본위제에서 브레튼 우즈 체제로, 이어 스미소니안 체제 및 킹스턴 체제로 이행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플라자 합의'는 일본의 잃어버린 20년 단초가 됐다     

  1985년 8월 G5 재무장관들이 뉴욕의 센트럴 파크에 있는 플라자호텔에 모였다. 일본과 서독의 무역흑자 폭이 확대일로인 반면 미국의 국제수지는 지속적으로 악화되고 있어 이에 대한 대응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일본 엔화와 서독 마르크화를 절상하기로 합의했다. 이 결정을 ‘플라자 합의’라 한다.

  그 결과 엔화 환율은 달러당 240엔 수준에서 1988년에는 120엔으로 2배나 상승했다. 이로써 일본 경제에 버블이 발생했고, 잃어버린 10년 내지는 20년이 시작됐다. 서독의 경우는 마르크화의 평가절상 폭이 엔화보다 작았고, 충격도 효과적으로 극복했다. 우리나라는 이 시기에 저유가와 저환율, 그리고 저금리의 이른바 3저 호황을 구가할 수 있었고, 그 결과 1986년부터 3년간 국제수지 흑자를 기록했다.

  G5란 미국, 일본, 서독, 프랑스, 영국 등 서방 선진 5개국을 지칭한다. G는 그룹(group)의 머리글자다. 이들 5개국 재무장관들은 1975년부터 모임을 가져왔다. 당초 1차 석유사태의 대응을 위한 회의체였으나 세계경제 전반을 논의하는 장으로 확대됐다. ‘플라자 합의’ 이후에는 이탈리아와 캐나다를 포함한 G7으로 확대되고, 정상회담으로 격상됐다.

  2000년대 중반부터 신흥강국으로 부상한 중국과 초강대국 미국을 지칭하는 G2란 용어도 등장했으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신흥국들이 참여하는 G20 정상회의도 개최되고 있다. 그러나 뉴욕대 루비니 교수는 국제사회에서 G20이 실질적으로 공조를 이루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며 'G-Zero'로 표현한 바 있다.

     

G7 회의는 글로벌 금융위기로 G20으로 확대됐다     

  1997년 하반기 들어 아시아에서 외환위기가 발생했다. 동남아의 거품경제 붕괴, 경상수지 적자 확대, 환율정책 실패 등에 따라 태국의 바트화가 폭락함으로써 위기는 촉발됐다. 이어서 우리나라에도 IMF 환란이 시작됐다. 금융시장에서 달러화가 썰물처럼 빠져나갔고, 환율은 2배나 급등하는 등 금융시장이 붕괴됐다. 이는 자연스럽게 실물 경제의 침체로 이어졌다.

  일반적으로 외환위기에 대한 처방은 ▲ IMF 등에 구제금융 신청, ▲ 모라토리엄(채무변제 중지) 선언, ▲ 정부의 외환통제 등이다. 그런데 구제금융을 신청하면 IMF가 국내 경제정책에 개입하게 된다. 금리인상과 재정지출 축소, 기업과 경제의 구조조정 등을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대해서도 이러한 요구는 당연히 있었다. 그래서 당시 우리 국민들은 IMF를 ‘저승사자’로까지 인식하기도 했다.

  2008년에는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했다.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로 인해 세계 금융시장은 혼란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금융위기는 실물경제 침체로 이어졌고 범세계적 대응이 요구됐다. 이에 아시아 외환위기 이후 주요 신흥국들도 함께 참여하는 G20 재무장관 및 중앙은행 총재 회의를 2008년부터 정상회의로 격상하는데 합의했다. 제5차 G20 정상회의는 2010년 11월 11∼12일 양일간 서울에서 개최됐으며, 이어 12일과 13일에는 도쿄에서 APEC 정상회의가 열렸다.     

G5에서 G20으로 확대 과정    


국제회의 개최는 일정 결정부터 치열한 외교전이 펼쳐진다     

  G20 서울정상회의의 비화를 소개한다. 먼저 회담 일자를 두고 한・일 양국은 치열한 외교전을 벌였다. G20과 APEC 회원국은 3분의 2가 겹친다. 한국과 일본은 인접한 국가라서 연이어 회의를 개최하기로 했는데 비슷한 주제를 논의하기 때문에 뒤에 열리는 회의에는 관심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APEC 회의가 이미 확정된 시점에서 G20 회의가 결정됐기에 한국은 APEC에 앞서 개최하는 방안을 추진했고, 결과적으로 외교전에서 승리하여 먼저 G20 정상회담이 열리게 됐다.

  막상 11월 11일 개최로 결정되고 나니 또 다른 문제가 제기됐다. 11월 11일이 우리나라에서는 특정 과자제품과 관련된 날짜로 알려져 있지만 미국과 유럽에서는 중요한 기념일이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일로서 재향군인의 날(Veterans Day)로 지정돼 있기 때문이다. 이들 국가들에서는 국가원수가 참석한 가운데 기념식을 거행하는 것이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다. 참고로 우리나라의 재향군인의 날은 한글날 전일인 10월 8일이다.

  우리나라의 시각이 시차 상 크게 빠른 까닭에 미국과 유럽에서 기념식을 거행한 이후 당일 서울에 도착하기가 어렵다.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새벽에 기념식을 마치고 급히 출발했지만 만찬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미국의 경우는 더 큰 문제였다. 시차가 유럽보다도 커서 당일 출발해서는 도저히 회의에 참석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항공기가 제트기류를 역행해야하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래서 우리는 서울의 미8군 영내에서 기념식을 거행하는 방안을 제시했고, 미국 측이 좋은 생각이라며 받아들였다. 오바마 대통령은 11월 4일에 출발하여 인도와 인도네시아를 거쳐 한국에 도착했다.

  또 하나의 에피소드는 11월 11일 공식만찬이 있었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일어난 일이다. 미국과 중국의 정상은 가장 늦게 입장하는 것을 권위로 여겨 서로 눈치를 보며 지연 입장을 시도했다. 결국 오바마와 후진타오 두 정상은 30분 정도 늦은 시각 무렵 거의 동시에 만찬장으로 들어왔다.

     

IBRD는 세계은행(World Bank) 그룹으로 확대됐다     

  IBRD는 브레튼 우즈 회의에서 IMF와 함께 설립하기로 합의한 후 1946년 8월 발족됐다. 전쟁피해의 복구와 개발을 목적으로 설립된 기관이나 현재는 개도국을 대상으로 한 개발금융 지원이 주된 업무다. 선진국의 높은 신용도를 기반으로 자금을 조달하여 개도국들에게 매년 500억∼600억달러 규모의 차관을 제공한다. 개도국 정부와 정부투자기관(공기업)을 대상으로 산업과 사회간접자본시설 부문에 대한 장기 융자가 대부분이다. IMF에 가입하면 자동적으로 IBRD 회원국이 된다.  

  세계은행은 IBRD를 비롯하여 저개발국을 집중 지원하는 국제개발협회(IDA; International Development Association), 국제금융공사(IFC; International Finance Corporation), 국제투자보증기구(MIGA; Multilateral Investment Guarantee Agency),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 International Centre for Settlement of Investment Disputes) 등 5개 기관으로 구성돼 있다. 이들은 세계은행 그룹으로 불리며 총재직은 항상 미국인이 맡는다. 현재 세계은행 총재는 한국계 미국인 김용에 이어 취임한 맬피스 전 미국 재무차관이다. 반면 IMF 총재는 언제나 유럽 출신 인사다. 불가리아 출신의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전 세계은행 부총재가 2019년 10월부터 IMF 총재직을 수행하고 있다.

  지역별로 역내 국가를 대상으로 개발금융을 지원하는 다자간개발은행(MDB; multilateral development bank)도 운용되고 있다. 아시아개발은행, 아프리카개발은행 등이 그것이다. 중국 주도로 2016년에 설립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도 여기에 속하는 국제금융기관이다.

다자간개발은행 현황                    


우리나라는 1989년부터 IMF 차관 공여국이 됐다     

  우리나라는 1955년 8월 58번째 회원국으로 IMF와 IBRD에 가입했고, 1964년에는 IMF 한국사무소가 개설됐다. 1964∼87년간IMF로부터 대기성차관으로 26억SDR을 인출했다. 1988년에 인출한 외채를 전액 상환했고, 1989년부터는 IMF 차관 공여국으로 전환했다. 1997년 외환위기가 발생하자 다시 IMF에 210억달러의 구제금융을 신청했지만 2001년 8월 남은 196억달러를 조기에 상환함으로써 IMF 관리체제는 종료됐다.

  세계은행으로부터는 1962년 1,400만달러의 철도차관을 시작으로 금융 지원을 계속 받아 왔다. 1989년 1인당 국민소득이 세계은행 융자지원 대상 기준(4,080달러)을 상회하는 4,400달러에 달하자 융자졸업계획서를 제출했고, 1995년부터는 융자대상국에서 제외됐다. IBRD의 의결권은 투자비율로 결정되는데 우리나라는 1.66%의 의결권 보유한 15위의 투자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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