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를 떠나 회사 내근직으로 처음 들어온 지 100일쯤 되어간다. 나는 종이신문이라는 사양산업에 종사하고 있고, 그중에서도 가장 사양 부서인 지면 편집 부서로 최근 인사발령을 받았다.
일을 시작한 초반부터 편집부에 꼭 와보고 싶었고, 좀 늦게나마 원하던 바가 이뤄져서 하루하루 일이 재미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내가 이 부서에서 계속 일할 수 있을까"는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다. 이 질문은 사실, 숨겨져 있는 전제인 "이 부서가 존속한다면"이라는 가정이 더 중요하다.
미래는 4차 산업혁명시대라고 부르짖는 언론사에서, 가장 아날로그적인 부서에 착륙했다.
연필과 지우개와 50cm 자
우린 전 부서를 통틀어 가장 많은 종이를 소모한다. 종이와 연필, 지우개와 50cm 자를 붙들고 일한다.
레이아웃부터 정한다. 속칭 '도화지'라고 부르는 신문지 크기 갱지에 테트리스하듯 기사와 제목, 사진의 위치와 크기를 정한다. 사진도 그냥 고르는 게 아니라, 모두 인쇄해봐야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화면으로 보는 사진과 인쇄해 보는 사진은 아주 느낌이 달랐다. 매번 사진을 접어 이렇게 저렇게 트리밍 해보느라 내 양쪽 엄지손톱은 매번 까맣게 때가 탄다.
이런 식이다. 총 네 꼭지가 들어간 경제면을 짰던 날.
제목을 달 때에는 글자 수 제한에 맞춰 손가락을 꼽아가며 제목을 썼다 지웠다 고심한다. 제목을 쓴 종이를 데스크에게 '직접' '걸어가서' 넘긴다. 데스크가 연필로 직직 자필로 고친 뒤 부장에게 넘긴다. 부장도 연필을 들고 고친다. 고쳐진 제목지가 내 자리로 돌아온다. 편집자와 쌍을 이뤄 일하는 편집지원팀 직원은 갈겨쓴 글씨를 해독해 조판 프로그램에 타이핑한다.
이 부서에 오기 전에는 내가 기사를 쓰면 매우 전산적인 방식을 통해 지면에 얹힐 거라 추측했는데, 오산이었다.
무엇이 중요한지 판단을 거듭하는 일
제목을 뽑는 건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사진을 택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기사를 읽지 않으니까. 우리는 기사를 담는 신문을 만들면서도, 기사를 읽지 않는 독자를 위한 일을 해주는 셈이다. 그러므로, 요새 하는 훈련은 면마다 빼곡히 들어찬 기사들을 좀 더 빠르게 다듬어, 가장 정확한 '요약본'을 만드는 것이다.
편집부의 모든 일은 결국은 무엇이 얼마나 중요한지 판단하는 일이다. 내가 맡은 면에 들어올 기사들이 정해지면, 중요한 기사는 크게, 덜 중요한 기사는 작게 분량을 주문한다. 중요도는 지면 왼쪽 위가 가장 크고, 오른쪽 아래가 대체로 가장 작다. 사진과 부속물(시각물)의 크기를 정하는 것도 물론 편집부의 일이다.
기사 분량과 별도로 제목도 분량을 정해야 한다. 중요한 기사는 전체 칼럼을 가로지르는 43포인트 '통단' 제목을 단다. 부제목은 때로 대여섯 줄을 넘어가기도 한다. 사소한 기사일수록 제목도 작다. 단신은 기사 본문과 같은 크기에 서체만 다른 수준이다.
취재부서에서 쓴 기사가 넘어오면, 미리 짜 놓은 지면에 넣는다. 이때 분량이 넘치게 들어오면 편집부에서 조정해야 한다. 덜 중요한 내용부터 자르고 중요한 내용은 살려둔다. 기사의 맥락과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면, 엉뚱한 부분을 잘라서 기사를 막판에 망쳐버릴 수도 있다. 그래서 어떤 한 선배는, 결국 이 작업이 편집부 전체 업무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어려운 핵심 업무라고도 했다.
중요한 건 분명한데, 점점 눈에 보이지 않아
편집은 정말 낯선 기자의 일이다. 가장 많은 발제와 기사를 읽어야 하고, 가장 마지막에 가장 핵심을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나름대로 치열하고 중요하지만, 정작 아무것도 취재하지 않고, 지면에는 내 이름 석자와 메일 주소는커녕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는다. 편집이란 건 대체로 욕먹는 게 다반사, 잘해봐야 본전인 일인 것 같기도 하다.
무언가 굉장히 비효율적이라는 느낌도 지울 수 없다. 우리 회사의 많은 편집기자들은 20년 차 이상이다. 조판 작업자들도 많게는 십수 년 동안 일한 베테랑이다. 숙달된 사람들이 정해진 시간 안에 무언가를 뚝딱뚝딱 실수 없이 이뤄낸다. 한편으로는 이 많은 작업들을 이 많은 사람들이 수작업으로만 진행하는 것이 과연 최선일까, 라는 생각이 계속해서 든다.
결국 뉴스를 볼 때 내가 보는 건 8할이 제목과 사진이요, 2할이 기사였다는 사실을 하루하루 자각하는 요새. 편집부에서의 100일을 지나면서 여러 가지 것들이 궁금해진다.
-편집은 앞으로 점점 더 중요해질 수 있을까
-'지면' 편집은 앞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잘 단 제목'과 '기레기의 쓰레기 같은 제목'은 무엇이 정말로 다를까
-'재미없는 제목'과 '정확한 제목'은 또 무엇이 다를까.
사실 이곳의 선배들도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는 종류의 질문들이다. 혹은, 나름의 답이 있지만 서로 간에 쉽게 통일되지 않는 질문들이기도 하다.
출입처를 드나들면서는 '이 곳이 세상의 전부'라는 착각에 빠져 살았다. 출입처를 벗어나니, 이 크고 견고해 보였던 세계가 실상은 아무나 돌팔매질을 하는 연못, 가물어 말라가는 연못이라는 뒤늦은 생각이 든다. 지금은 이 곳의 생산품을 최종 포장해 세상에 내어놓는 일을 배운다. 조금 더 배우면 저 질문들에 나의 답도 내어놓을 수 있을까.
#커버 : 이 곳에서의 작업도구들. 인사발령 직후, 남는 샤프펜슬이 없어서 집에 굴러다니던 아무 연필을 가져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인생에 본 적 없는 역대급 몽당연필이 되더니 곧 어딘가로 숨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