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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정수 Mar 20. 2020

내 장래희망은 은퇴였다.

눈 감았다 뜨면 이미 중년이 되어있길 바랐다.


특별히 지친 것도 아닌데, 모든 중간 과정을 건너뛰고 싶었다. 구들은 정신 나간 소리라고 했다.

이미 결혼을 했고, 이미 한참 전에 낳은 애는 이미 훌륭하게 커서 제 몫을 하고 있고, 나는 직장에서 적당히 성공적인 생활을 하다가 마침내 은퇴를 눈앞에 뒀고, 이제 남은 일은 매일 무엇을 하고 지내면 행복할지 고민하는 것이길 바랐다. 더 이상 평일과 휴일을 구분하지 않고도 내가 원할 때 원하는 만큼 훌쩍 떠날 수 있길 바랐다.


그러니까, 정확히 짚자면 건강하고 넉넉한 은퇴자로 직행하고 싶었다.




사람들은 젊음은 억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거라고 했다. 나이가 들면 하루하루 예전 같지 않다고 했다. 네가 젊기 때문에 젊음이 소중한 줄 모르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 시간을 멈출 수 있다면 누구든 거기에 영원의 표지석을 세우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젊음 장래희망일 수 없다. 이미 지나기 때문이다.


내게 젊음은 짐, 땡겨쓴 빚, 종신할부금만 남은  상품 같았다. 모든 것이 유예된 상태 같았다.

길고 지난삶의 중간에 서서 앞을 바라보면, 빚쟁이들이 줄지어 손을 내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성취보다는 괴로움에 가까울 것 같았다.


결혼한 사람은 미혼을 부러워한다. 아이를 낳은 사람은 애 생기기 전에 놀아두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학부모들은 이 입시 지옥이 언제 끝나느냐는 넋두리를 풀었다. 모두가 괴롭다고만 했다. 그들은 한숨을 쉬며 내가 부럽다고 했다. 나는 불행으로부터 오래도록 벗어나지 못할 미래를 본 것만 같았다.  


마침내 자녀까지 결혼시킨 사람만이 정말 오랜만에 무언가로부터 조금은, 조금은 해방된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앞으로 남은 나의 시간은, 적어도 그때까진 모두 구속과 속박의 반복일 것만 같았다.




그 과정을 모두 건너뛰고 싶어서, 나는 눈을 감았다 뜨면 이미 은퇴한 뒤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다시 사람들은 말했다, 네가 젊어서 좋은 게 좋은 줄 모르는구나. 여전히 불행한 얼굴을 하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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