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맹이가 다 크도록 살았던 우리집은 2층짜리 다세대 주택이었다. 동서로 길었던 옥상엔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옥탑방과 LPG 가스통 두어개가 있었고, 한 편에 늘어진 빨랫줄과 텃밭, 쓰이지 않는 장독들이 있었다. 가끔 게으른 고양이들이 뜨끈한 바닥에 드러누운채 배를 내놓고 해바라기를 하기도 했다.
손을 뻗으면 빨래줄에 넉넉하게 닿을 만큼 키가 크고 나자 엄마는 심부름을 자주 시켰다. 여름날이면 낮동안 하늘빛이 쨍하도록 하얬다. 하늘이 사나운 뙤약볕을 거두고 해가 점차 뉘엿해질 무렵이면 엄마는 "정수야 옥상 가서 빨래 좀 걷어와라."
빨래를 걷어오는 심부름은 정말로 기분이 좋았다. 그 말을 듣자마자 쓰레빠를 꿰어신고 옥상으로 성큼성큼 올라갔다. 한낮을 견딘 수건들은 종이처럼 각이 져서 딱딱하고 뜨끈하게 말라있었다. 빨래집게를 하나하나 풀어 수건을 끌어내리면, 남은 다른 쪽 팔로 한껏 받쳐 안아야 했다.
네 가족의 여름 수건 빨래를 조그만 품에 벅차도록 안으면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많아서, 조심조심 계단을 걸어내려가야 했다. 깨끗하고 따땃한 온 세상을 한 가득 끌어 안는 것 같았다. 한여름의 열기를 한껏 머금은 수건이 품은 뜨거운 햇빛냄새.
그 여름 옥상의 풍경들을 그려본다. 열매가 알알이 여문 앞집의 살구나무, 먼 산에 시선을 가만히 두고 자세히 보면 천천히 한 몸처럼 흔들리던 나무들, 어디선가 "하-하-하-"하고 들려오던 비웃음새 울음소리, 매일 같은 시간에 계단에 쪼그려 사람 구경하던 앞집 혜성이네 할머니, 텃밭에 잡초처럼 자라던 딸기와 상추, 질긴 쑥갓, 대파 따위의 것들, 그리고 그것들을 가만히, 아무 생각없이 오래오래도 바라보았던 햇볕 속의 나.
#2000년대 초반 어느 날의 갈현동. 나와 동생의 곰인형도 가끔씩 햇볕에 말리곤 했다. 예뻤던 옛 집은 오래 전에 허물어지고 재미없는 신축 빌라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