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의 녹과 함께
배가 수면 가까이 누워있는 모습을 보는 건 참으로 기묘했다.
배는 본래 물 위에 똑바로 선 채 떠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 배가 누워있다.
사실 애초에 나는 그 배의 똑바른 모습보다 그렇지 않은 모습이 훨씬 익숙했다.
배의 이름은 세월호였다.
어제였다. 한 후배는 카톡 중 나에게 “선배도 팽목항 키즈시군요”라고 얘기했다. 나는 “사실은 안산 키즈”라고 대강 답했다.
‘키즈’라는 어감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크게 틀리지는 않은 표현인 것 같았다.
우리 동기들은 세월호 키즈였다. 취재의 8할을 세월호로 배웠고, 기자생활을 시작한 첫 1년의 8할 또한 세월호였다.
2014년 4월 16일, 그날을 똑똑히 기억한다. 마포라인 수습이었던 나는 서대문서 앞 농협 건물 1층의 ‘오가페’라는 카페에서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다. 모처럼 선배가 인터넷 검색 미션을 줘서 경찰서를 돌지 않아도 되는 날이었다. 비교적 편안한 마음으로 선배가 보내준 기사를 읽고 자료를 찾아보고 있던 도중 뉴스가 떴다. 제주로 가던 배가 사고가 났다는 속보였다.
그러려니 했다. 맑고 평안한 날이었고, 폭풍우는 없었다. 때때로 “어디에서 헬기가 떨어졌다” “어디에서 화재가 났다” “어디에서 전세버스 추돌사고가 일어났다”는 속보가 뜨는 것은 일상이었다. 대체로 크지 않은 인명피해로 끝나곤 했다. 더군다나 서울 은평구 서대문구 마포구를 관장하는 마포라인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곳이었다.
그 때였다. 사수 선배에게 전화가 왔다. 안산 단원고 학생들이 탄 배가 사고가 난 건데 일단 너는 형님(차량 운전하시는 분)차를 타고 안산으로 지금 당장 내려가라는 것이었다. 선배는 덧붙였다.
“혹시 하루이틀정도 있을 수도 있으니까 양말 같은 것 챙기고.”
황급히 서대문서 2진 기자실로 올라갔다. 쓰레기장 같은 그곳에서 약간의 속옷을 챙겼다. 편의점에서 2개들이 발목양말도 급한 대로 샀다. 그리고 내려간 안산 단원고, 그곳은 지옥이었다.
하루는 이틀이 됐고, 이틀은 일주일, 일주일은 결국 46일이 되었다. 46일 동안 하루도 빼지 않고 뉴스에서는 배가 쓰러지는 영상이 나왔다. 쓰러지고 있든, 완전 침몰이든, 우리는 단 한 번도 세월호가 멀쩡하게 운행되는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기울어진 그 각도가 세월호의 정체성을 이뤘다. 바다가 있는 목포와 진도가 생지옥이었다면 분향소가 있는 안산은 검은 지옥이었다. 그곳엔 죽음밖에 없었다. 죽지 않은 아이는 안산으로 올라오지 않았다. 아무도 웃지 않았고 아무도 색깔있는 옷을 입지 않았다. 봄이 왔고 토끼풀은 꽃을 피웠지만 모든 곳에 죽음이 묻어있었다.
46일이 지난 뒤, 급작스런 인사로 출입처를 옮겼다. 한 켠에 아주 조금 ‘마음이 이제 가벼워질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혀 아니었다. 내 인사와 거의 동시에 유가족들은 자리를 안산에서 내 새 출입처로 옮겼다. 세월호특별법 논의가 시작된 것이다. 자리는 옮겼지만 여전히 나는 매일같이 그 기우뚱한 배를 보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더 자세히 살피게 됐다. 각도, 내부모습, 난간, 그리고 보이지 않는 좌현의 모습까지도.
시간은 흘러갔다. 그 사이에 나는 출입처를 또 옮겨 다녔다. 세월호에 관한 한, 어느 순간부터 나는 기자로서의 책임감을 회피하고 시민으로서의 슬픔만을 간직하기 시작했다. 세월호에 대한 내 취재는 단원고와 특별법 안에 갇혀있었다. "세월호의 진실을 밝혀달라"는 외침들이 들려오면 나는 동조했을 뿐, 진실을 찾는데 나서지 않았다. 무서웠고 힘들었고 내 '나와바리'가 아니라며 피했다. 바다 아래 오래도록 세월호가 가라앉은 동안 그 배는 내 머릿속의 하나의 상징이자 관념처럼 자리 잡았다. 영원히 기울어진, 영원히 희고 거대한, 영원히 가라앉기만 하는 그 모습을 그리며 우리의 트라우마도 영원할까봐 두려웠다.
그런데 어제 밤이었다. 팀 방에 “4시간 30분 후 세월호 수면위로 올라옵니다”라는 보고가 올라왔다. 술에 취한 채 나는 버스 안이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21시간에 걸친 검찰 조사가 끝난 다음날이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슬픔이 아닌 무언가 압도하는 기분이 가슴을 짓눌렀다. 형체가 명확치 않았던 내 안의 공포증이 실체로 드러나려 하고 있었다. 어둔 밤바다, 그 위에 번쩍이는 불빛들.
그리고 몇 시간 뒤, 배가 아주 반듯하게 누운 채 떠오르고 있었다. 희지도 않고 단단하지도 않았다. 소름끼칠 만큼 거대하고 흉측하리만치 녹슨 세월호였다. 막상 눈으로 보고 나자 두려움이 엄습하는 동시에 가슴이 꽉 막히는 느낌이었다. 3년의 회한이 배를 갉아먹는 동안 내가 단 한 조각이라도 이 배의 인양에 도움을 준 것이 있었나, 에 대해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배는 정말 1cm, 1cm씩 조금씩 올라왔다. 녹슨 유리조각 같은 배가 점점 드러나는데 얼마가 걸릴까. 맹골수도, 동거차도, 바지선, 과 같이 3년 전 처음 들었을 때 어감이 참으로 낯설었던 그 단어들이 자막으로 여전히 스쳐지나간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안산 분향소에서 매일 인사하듯 찾았던 아이들의 영정 앞에 오랜만에 편지를 두고 오면 그들은 “친구들이 올라왔대”라는 소식을 읽을 수 있을까. 완전히 건져진 후 똑바로 서게 될 거대한 녹슨 배를 나는 똑바로 쳐다볼 수 있을까. 바다 속 세월호가 꺼내지면 기자로서 책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내 마음의 짐도 함께 꺼낼 수 있을까. 영원할 것만 같은, 그 명치 깊숙한 곳에 걸려있는 젖은 솜뭉치 같은 짐을.
#커버: 2014/4/17 안산 단원고 교무실 앞. Gx
모든 미수습자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