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맘에게는 칸막이가 있나
얼마 전 어머니가 대화 도중 "그런 얘기 너무 많이 하면 보기 싫지 않니?"라고 물으셨다. 당시 대화는 우리 팀 선배를 주제로 한 이런 내용이었다.
ㅡ나/저번에 얘기한 우리 팀 선배 있잖아. 여자 선배. 애 둘이라고 한 분.
=어머니/"애 나이가 어떻게 되는데?"
ㅡ초등학교... 하나는 3, 4학년인가 그렇고 하나는 아직 유치원생
"애를 일찍 낳았나 보네. 그 선배가 왜?
ㅡ아까 발제 올리고 있는데 자기 화난 얘기를 막 하더라고. 아침에 애들한테 이것저것 차려주고 해야 될 일 하고 기분 좋게 나오고 싶었는데 남편이랑 애들한테 자기도 모르게 다 화내고 나와서 기분이 엄청 안 좋대
"그런 얘기를 너한테 하니?"
ㅡ하더라고. 막 스트레스 엄청 받아서 아이스커피 마시고 있다고 하시길래 한 사발 다 드시라고 했어
"근데 그런 얘기 너무 많이 하면 보기 싫지 않니? 막 회사 사람들한테 자기 애 키우는 얘기 하고 그러면."
다소 의아스러웠다. 내 어머니는 결혼과 거의 동시에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됐다. 하지만 나에게는 가끔씩 "너 나중에 결혼하고 애 낳으면 키우는 건 걱정하지 말고 일해. 애는 내가 봐줄게"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씀하시는 분이었다. 그런 어머니가 '회사에서 애 얘기하면 아마추어'라는 식으로 반문하자 나는 잠시 할 말이 없어졌다.
어머니 말씀의 요지는 "회사 다니는 여자가 너무 자기 남편 얘기하고 애들 얘기하면 좀 전문성이 부족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야"라고 덧붙였다. 여자가 직장에서 성공하기 힘든 문화에서 그런 말을 하면 프로 같지 않아'보일' 수 있다는 주장에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아주 약간은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곰곰이 떠올려보니 그런 구체적인 배우자 이야기와 애들 이야기를 우리 회사 타사를 막론하고 남자 '선배'들에게서 들었던 기억이 희미했기 때문이다.
우리 회사에는 남성 비율이 압도적인 부서가 몇 군데 있다. 정치부와 사회부다. 특히 정치부는 정당, 청와대, 외교, 통일, 국방 등 신문의 종합면을 대부분 장식하는 빡센 일들이 넘쳐나는 부서다. 평기자가 20명쯤은 되는데도 여자 숫자는 늘 한 손으로 꼽힌다. 인터넷 매체나 방송은 여성이 좀 더 늘어나는 추세지만 많은 종이신문은 여자 기자 숫자가 늘 거기서 거기다. 사회부도 마찬가지다. 사건팀, 기동팀 등 경찰 출입을 하는 팀은 편집국 전체에서 가장 기동성이 높은 부서인 만큼 평균 연차가 낮은 편이다. 어린 기자들은 성별 구분 없이 많이 들어가지만 중간 연차쯤까지만 올라가면 대부분이 남성이다. 다른 부서들과 달리, 이곳들에서는 여자가 절반쯤 차지할 때에는 "역대 가장 여성 비율이 높다. 이번 인사는 특이하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한다. 가장 험하기로 소문난 법조 출입도 마찬가지다.
이런 직장이다보니 남자 기자가 많은 출입처에 있다 보면 선배들이 하는 아이 얘기는 대부분 남자 기자들이"우리 애 얼마나 컸다" 혹은 "주말에 애 봐야 한다"는 수준의 아주 단순하고 짧은 이야기다. '가족 이야기는 최대한 자제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의도적으로 아끼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육아에 기여하는 정도가 낮다.
한 선배는 "일요일에 쉬는 것보다 평일에 대휴를 쓰는 것이 훨씬 낫다"고 말하기도 했다. 일요일에 집에 있으면 집안일을 해야 하지만 평일 대휴를 쓰면 애 엄마도 밖에 있고 애들도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있어서 자기가 쉬고 싶은 대로 쉴 수 있다는 것이다.
술 참 좋아하는 다른 선배는 "애 생기고 나서는 낮술을 엄청 먹는다"라고 했다. 근거는, 저녁에는 술 먹다 늦게 들어가면 혼나기 때문에 마시고 싶으면 낮에 많이 마셔야 한다는 것이었다.
역시나 술 좋아하는 또 다른 선배는 "전날에 술을 잔뜩 마시고 들어갔는데 아침에 와이프가 초코파이를 하나 줬다"고 농담 섞인 불만을 터뜨렸다. 속이 안 좋아서 먹기 싫어 죽겠는데 그거 하나 먹으라고 강요를 하더라는 것이다. 틈만 나면 "우리 와이프가 귀여워"라는 말을 앵무새처럼 하면서도 중간중간 들어가는 추임새는 그랬다.
남자 선배들에게 들은 가족 이야기는 대체로 이렇게 "나는 가족이 있긴 하지만, 신경을 많이 못 쓴다 (혹은 쓰기 힘들다)"는 것이 요지다. 남자 동기들이나 연차 차이가 거의 나지 않는 선후배들은 좀 구체적인 -이를테면 기저귀 값이 얼마니, 어린이집 신청을 몇 개월 때 미리 해야 하니 따위의 이야기들을 나누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어머니에게 말했던 여자 선배의 연차(10년 차 안팎)의 선배들은 어쨌든 아직 저렇다는 것이다. "와이프가 애 보러 들어오라고 한다"가 아닌, "애 보러 들어가야 한다"며 일찍 귀가하는 남자 기자는 손에 꼽힐 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 입에 회자되기도 한다. (물론 험담은 아니고 화제가 된다는 의미다.)
그런 남자 기자들 사이에서 여자 기자가 홀로 "큰 애는 영악해서 나한테 뭘 어떻게 해달라고 하는데 작은 애는 아직 땡깡만 부린다" "내가 아무리 얘기를 해도 남편이 들은 척을 하지 않는 순간 화가 폭발해버렸다" "애 둘한테 아침에 짜증을 부렸더니 순간적으로 애들이 나를 무서워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와 같은 이야기들을 늘어놓으면 그야말로 '가족 험담 늘어놓는 아줌마'만 되고 만다는 그런 인식이 조금도 이해되지 않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가정에서의 가사노동 분담 불균형과 노동현장에서의 업무, 임금 불균형도 아닌 직장에서 가볍게 나누는 일상적 대화에서까지 이런 감정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 상당히 답답했다. 여자 기자들은 여자 기자들끼리 대화하게 되는 건 결국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내가 어머니께 말씀드렸던 그 여자 선배는 입사 초기에 출산했고, 많은 선후배 여기자들에게 '선배 엄마'가 되었던 분이다. 잘 나가는 부서와 한직, 기피부서를 두루 돌며 육아를 병행하고 있다. 남들 다 겪는 산후의 우울감, 결혼 생활과 육아에서의 스트레스도 먼저 수없이 겪었던 만큼, 누군가 자기에게 "이럴 때 어떻게 해요?"라고 물어보면 적극적으로 자신의 경험을 꺼내 이야기해준다. 자기가 겪었던 힘듦을 '후배 엄마' '후배 아내' '후배 며느리'들이 그대로 겪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리라.
가정을 잃지 않으면서 자신의 커리어도 적극적으로 쌓아나가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며 진정한 프로 아닌가? 기자라는 일 자체가 출퇴근이 명확하지 않다. 퇴근을 해도 늘 대기상태여야 하고, 새벽에 전화가 와도 무조건 받아야 한다. 가정에 많은 신경을 쏟기가 특히나 어려운 직군이라는 뜻이다. 기자는 정해진 루틴을 살아가는 '직장인'이라는 표현을 조소적인 뉘앙스로 사용하기도 한다. 결혼한 여기자, 출산한 여기자 역시 제 아무리 남기자가 다수인 사회라고 해도 홀로 퇴근 후에는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모드로 전환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도 안 되고.
현장에서는 100% 기자, 가정에서는 100% 아내이자 엄마로 변신해야 회사에서 "여자도 애 타령 안 하고 기자 일 잘 한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철 지난 일 아닌가? 남녀 모두에게서 이번 주말에는 애랑 뭐하느라 재밌었다, 애가 뭐라고 떼를 써서 힘들었다, 와이프 혹은 남편과 무엇을 하고 왔다는 좀 다양한 가족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조직이 되려면 얼마나 시간이 더 지나야 할까.
#커버: tvN 신혼일기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