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지금껏 가장 많이 방문한 곳은 서쪽이다. 바다 위로 해가 지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전거 대여점 사장님은 용두암에서 시작해 서쪽으로,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라고 하셨다. 바람 방향이나 지형 같은 것들을 고려한 방향 아닐까 생각한다. 급한 오르막보다는 급한 내리막이 아주 조금 더 많았던 것 같다.
제주 초행길이라면 네이버 지도 어플을 켜면 정신적 안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제주환상자전거길이 진한 보라색으로 선명하게 표시되기 때문이다. 어차피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친절한 도로안내 덕분에 대부분의 구간에서는 웬만하면 길을 잃어버리고 싶어도 잃어버릴 수 없을 것이다.
첫째 날은 용두암에서부터 차귀도까지,
에코트립에서 자전거를 빌리고 처음으로 자전거길에 들어서면 용연계곡 위의 구름다리를 건너야 한다. 자전거를 끌고 나오자마자 보이는 작은 교차로를 대각선으로 건너서 조금만 올라가면 곧바로 공원 같은 것이 나타난다. 이 길이 아닌 것 같지만 분명 바닥에 하늘색 '제주 환상 자전거길' 표시가 그려져 있을 것이다. 쭉 따라가서 나무로 만들어진 구름다리를 건넌다. 작은 스팟이지만 천천히 구경하기 좋다.
사진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북쪽을 바라보면 푸른 바다가, 바닥은 아주 맑고 깊은 물이, 뒤편으로는 영롱한 색깔의 계곡이 다채롭게 나타나는 것이다. 산뜻한 시작을 하기 아주 좋은 곳. 다리를 지나자마자 꼬불거리는 길을 따라 경사가 오르락내리락한다. 용두암이 보일 것이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길에 좋았던 보리밭. 나는 운전면허를 따지 않았다. 카트라이더 게임만 해도 역주행을 곧잘 할 만큼 운전 감이 없는 데다 자동차 자체를 싫어한다. 차도에서의 인위적인 규칙도 싫어한다. 사람은 걸어가다가 잠시 멈추고 싶으면 그 자리에 멈춰 서도 아무도 위협하지 않는다. 길 오른편에 서 있어도 왼쪽으로 꺾어야 하면 그냥 꺾으면 되고, 어딘가를 지나쳤을 때에는 그냥 그 자리에서 뒤로 돌아가면 되는데 왜 차도는 그렇게도 복잡한지... 자전거는 다행히 차보다는 사람에 가까운 것 같다.
출발한 뒤 한 시간쯤 슬렁슬렁 바퀴를 굴리다 만난 어느 오르막에서, 멋진 풍광을 오른편에 마주쳤다. 거친 금발 같은 보리밭이 갓 푸른빛을 띄기 시작한 하늘과 그대로 맞붙어있었다. 보리밭의 주인은 이렇게 멋진 땅과 바다와 하늘 속으로 매일같이 출근하는 걸까.
밭 안쪽으로 길이 살짝 나 있길래 자전거를 멈춰놓고 들어갔다. 서보기도 하고 앉아보기도 하고, 바다 쪽을 향했다가 길 쪽을 향해 서 보기도 했다.
위치는 정확하지 않지만, 하귀를 지나 애월로 향하는 해안길을 따라가다 보면 바다 구경을 할 수 있도록 만든 나무 데크가 간간이 눈에 띈다.
제주는 사람 사는 땅과 사람 사는 맞붙어있다. 육지에서는 동해도 서해도 남해도 방파제, 거대한 고속도로, 철조망 따위로 가로막혀있어 접근할 수가 없다. 하지만 제주에서는 바다를 만지고 싶으면 그냥 바다로 걸어가면 된다. 나무데크가 있으면 편리하고 안전하기는 하지만, 없는 곳은 그냥 가면 된다. 여기에서도 자전거 잠시 대놓고 난간 앞에 앉아 다리 흔들거리며 잠시 쉬어갔다.
중간중간 점심도 먹으며, 애월 해안도로를 쭉 타고 간다. 마음 같아서는 예전에 들렀던 마틸다라는 LP바를 들르고 싶었는데, 오후 3시에 문을 여는 곳으로 기억하기 때문에 시간이 맞지 않아서 그냥 패스.
해안을 바짝 따라가는 자전거도로는 대부분 바다 쪽으로 일정 간격으로 현무암들을 세우거나 낮은 시멘트 담을 쌓아뒀다. 애월항을 전후해서부터는 저렇게 바다 쪽으로 낮은 벽화담을 마련해둔 구간이 있다. 중간중간 길을 열어놓은 곳을 보면 바다로 나가는 길이 있다. 시멘트로 닦아놓은 경우도 있고, 그냥 검은 돌들을 적당히 쌓아놓은 경우도 있다. 어찌 됐건, 발가락 앞까지 들어오는 바닷물을 구경하는 데는 아무 지장도 없다.
도로를 따라가다 보니 월령리 선인장 마을로 향하는 표지석이 보이길래 한 바퀴 돌아봤다. 현무암으로 둘러쌓은 밭(?) 안에 손바닥선인장이 가득하다. 잡초 같다고 말하면 다소 실례일 수도 있지만, 정말 그런 느낌이다. 실제로 이곳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야생' 선인장 군락이다. 멕시코가 고향인 선인장 씨앗들이 바닷물을 타고 들어와 정착한 것이라고 한다. 중간중간 말라붙은 둥글넓적한 선인장들이 마을 곳곳을 점령한 모습은 어찌 보면 조금 수척한 느낌이기도 하다. 토속적으로 이국적인 느낌.
이즈음부터 해서 빗방울이 한두 개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제주의 안 그래도 강한 바람이 머리를 후려칠 만큼 강하게 불어서 더 이상은 딴 곳으로 빠지지 않고 곧장 밟아 차귀도에 예약한 첫날 게스트하우스로 직진했다. 어지간하면 해안을 따라가던 자전거도로가 이쯤에서 크게 안쪽으로 돌아간다. 올레 12코스 말미, 한경면에 있는 오름인 당산봉 뒤쪽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태풍 같은 바람을 헤치고 약간 경사진 길을 겨우겨우 뚫고 숙소에 도착했다.
#커버: 오후부터 급격하게 흐려졌던 첫날. 애월해안도로 달리면서 중간중간 담 사이에 나 있는 틈에 앉으면 이런 뷰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