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7일. 둘째날. 친절한 게스트하우스 사장님께 아침을 든든히 얻어먹고 길을 나섰다. 바다를 뒤로 하고 짙은 풀색이 깔린 널찍한 도로를 달리려니 길이 너무 좋아서 빨리 가기가 아쉬웠다.
#갑자기 나타난 풀밭(09:42)
길을 아껴가며 바퀴를 굴려가는데 오른편에 정말 난데없는 풀밭이 하나 나타났다. 풋살정도 하면 딱 좋을 것 같은 넓이의 평평한 땅에 잔디도 갓 깎아낸 것 같았다. 바다구경하기도 좋아서 잠시 자전거 세워두고 풀밭에 드러누워서 이리굴렀다 저리 굴렀다 했다. 지나가는 차 한 대 외에는 사람 한 명도 지나가지 않아서 매우 좋았다.
#시 경계(09;56)
제주시에서 서귀포시로 넘어간다는 시 경계석. 드디어 남쪽 나라 중에서도 남쪽 나라로 간다는 기분에 약간 들떴던 기억이 난다. 오른편에 계속 파란 바다가 펼쳐지는 길이었다. 쉴 새 없이 눈을 바다에 붙이고 갔다. 사진이 담지 못하는 색깔에 기분이 아쉬워서 눈에 걸쳐놨던 썬글라스를 카메라 렌즈에 겹치고도 여러번 찍어봤지만, 그 빛이 반사된 새파란 색이 나오기는 어려웠다.
#송악산(11:09)
지난 밤 같이 묵었던 게스트하우스 사람들 중 자전거 여행을 하시는 분을 두 분이나 마주쳤다. 그 중 한 여자분과는 밭과 들판을 양쪽에 둔 길고 완만한 경사길에서 여러번 앞질렀다 뒤처지기를 반복했다. 전기자전거를 끌고 가는 나는 나대로 길이 아까워 웬만하면 모터를 끄고 다녔고, 뭔가 허술해보이는 예쁜 자전거를 탄 그녀는 언덕길에 힘겨워했다. 막판에 급해지는 경사길은 거의 지구력테스트였지만 여기는 넘어갈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었다. 언덕을 돌아내려오자마자 시원스레 펼쳐지는 경사길과 그 아래 바다, 그 건너 밥공기같은 송악산을 보면 "브레이크 없이 가자"는 생각부터 든다.
#가까이에서 본 송악산(11:39)
정말 90도 각도로 불쑥 솟아오른 것 같은 송악산은 멀리서 보면 멀리서 보는대로, 가까이서 보면 가까이서 보는대로 매력이 철철 넘친다. 하지만 이 곳을 둘러싼 길 역시 경사가 만만치 않다는 게 문제다. 차로 가면 모를까, 일반 자전거로는 여러번 내려서 질질 자전거를 끌고가게 될 만한 급경사가 반복된다. 바닥 표시가 애매한 구간이 있어 길치인데다 초보자인 나는 지도를 여러번 보면서 가야 했다. '이쪽으로 가는 거 맞아?'라는 생각을 두어번정도 하게 만드는 구간.
#화순금모래해변(12:42)
점심먹기 전,아름답기로 소문났던 화순금모래해수욕장을 찾아가봤다. 사실 송악산을 지나 재미없는 내륙도로만 달리던 중, 화순으로 향하는 표지판을 보고 일단 가보았다. 결과는 정말 최악.누가 금모래해변을 이렇게 망쳐놓은건지, 대충격이었다. 빛나는 모래사장은 사라지고 곳곳이 조잡한 시설물과 공사판이었다. 실망이라기보다는, 누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하고 있는건지 의도와 계획이라도 알고 싶은...억울한 마음이 컸다.
#법환마을(15:02)
최남단 어촌마을 법환바당. 오는 길에 강정마을을 둘러보고 오느라고 시간이 조금 지났다. 강정마을을 직접 본 것은 이번에 처음이었는데 상당히 오묘한 느낌이었다. 제주민군복합형 관광미항이라는 희한한 이름 아래 거대한 신축건물들이 위압적으로 들어서있고,한 쪽에서는 옷을 맞춰 입은 사람들이 '문화제'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노래들ㅡ기타 기본코드와 기본적인 멜로디라인, 가사만 계속해서 바뀌는 듯한 그 노래들을 부르며 박수치고 있었다. 신이 나야 할 것 같은 노래들이었지만 무언가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서 그건 상당히 (개인적인 감정이지만) 그로테스크해보이기도 했다.
어쨌든 강정을 지나 서귀포앞바다를 쭉 따라오니 나온 법환마을. 넓고 푸른 바다보다는 아기자기한 어촌의 맛이 있었다. 안내판에는 제주에서 가장 해녀가 많은 곳이라고 안내판이 나와있다. 오는길에 실제로 해녀들을 많이 보긴 했다. 곳곳에서 들리는 휘익 휘익 하는 숨비소리는 생각보다 각자 다 달랐다. 해안도로에는 이들이 건져와 말리는 톳 같은 해초들이 꽉 차게 널려있었다. 톳은 실제로도 자전거를 탈 때 조심해야하는 것들 중 하나다. 자칫 정신을 놓고 달리다가는톳을 온통 다 밟고 지나가게 될 수도 있다. 엄청 얻어맞을 것이라는 생각이 우선 들었다.
#외돌개(16:38)
생각보다 시간도 남고 자전거 배터리는 아예 완전히 남아서 제주의 명물 중 하나인 외돌개를 구경하러 갔다. 내려가는 길이 상당히 급경사였지만 자전거를 믿고 일단 내려가기로 했다.
수학여행 온 중학생들이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크게 들어놓고 각자 떠들며 줄지어 다니고 있었다. 외돌개는 아무런 관심도 없어보였지만 수학여행이 원래 그런 거지 뭐. 경주가 그랬듯이, 모든 수학여행 명소는 그 나이에 갔을 때에는 '내가 여기에 뭘 보러 왔는지'는 1그램도 상관이 없다.뒤늦게서야 찾아가보고 '이렇게 좋은 곳이었다니!' 느끼라고 어렸을때 미리 답사시키는 게 아닌가 싶다. 외돌개도 참 저게 뭐라고, 싶을 수도 있지만 파란 바다 한가운데 떠있는 장화같은 것이 내 딴에는 아주 매력있었다. 먼 훗날에는 침식으로 무너지지 않을까?저 장화 안쪽의 절벽도 맑은 물에 절경이었다.
그리고 이곳을 벗어나 다시 원래 길로 올라갈 땐 실제로 정말 힘들었다. 모터를 2단으로 하고 겨우 올라갔다. 진행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었는데, 워낙 급경사다보니 '출발'을 할 수가 없었다. 지나가던 사람이 불쌍해보였는지 도와주려고 해서 체인에 돌이 끼인 척 하며 보내버리기도 했다.
#섶섬(17:58)
중문의 각종 관광지와 호텔들을 지나치고 나서 평화로운 해안길을 되찾았다. 섶섬은 이번 제주에서 만난 최고의 풍경중 하나였다. 아기자기한 맛이 우주 최강이라고 할만큼!! 길을 가다가 너무 예뻐서 잠시 멈춰서보다가, 아래쪽에 낚시꾼(?)들을 위해 만든것같은 아주 조그마한 나루터를 발견해서 곧장 내려갔다. 낚시꾼들이 조금씩 있긴 했지만 크게 시끄러우신 분들이 없어서 너무 감사했다. 그렇지 않아야만 어울리는 곳이었다. 길을 따라 쭉 내려가면 발을 담글 수도 있지만 그러기엔 다소 차가운 날씨. 남쪽 바다이지만 이곳에 앉아서 오른편을 바라보면 바다로 떨어지는 해를 볼 수도 있을 거다. 너무 예뻐서 스케치까지 했을 만큼, 섶섬 하나를 보러 나는 다시 제주를 올 수도 있을 것만 같다. 이곳에만 앉아서 한시간을 보낸 것 같다.
#하효쇠소깍해수욕장(18:53)
투명카약으로 유명한 쇠소깍 바로 옆에 있는 해수욕장. 이곳에만 오면 '아 정말 마지막 남해바다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문자 그대로 남쪽 바다, 이쪽으로는 끝없는 바다만 펼쳐지겠구나,하는 느낌의 묵직한 파도소리가 들리고 묵직한 푸른 깊이가 보인다. 돌들도 너무나 예뻐서, 정말 하나만 집어가져가고싶은 충동이 강하게 드는 곳이다.(물론 불법이다)
한창 구경하고 있는데 어떤 외국인이 말을 걸었다. 인도네시아에서 온 '자자'라는 이름의 그녀는 한국을 노숙으로 여행하는 중이라고 했다. 혼자서!! 오늘 하루종일 말을 못했다고 이야기를 거는데, 둘 다 서툰영어라 제대로 의사소통은 못했지만 즐거운 경험이었다. 다리가 다 저릴 때까지 쪼그리고 앉아 30분쯤 떠들다가 해가 저무려고 해서 일어났다.
#위미로 향하는 어딘가.......
자자랑 한참 떠드느라 시간이 다소 늦었다. 하지만 이날의 진정한 패착은 원래 가려고 했던 게스트하우스의 주소를 잘못 찍고 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5킬로는 지난 다음에야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 이후에는 정말 갈만한 게스트하우스를 찾질 못해서 개고생했다.
제주가 아무리 관광지가 됐지만 밤길은 정말 깜깜하다. 제주시내 한복판, 중문관광단지와 서귀포 시내 한복판이 아니면 아무리 큰길이라고 해도 정말 깜깜하다. 지도에는 골목길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밤에 가면 길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만큼 좁은 골목길에 단 하나의 가로등도 없다. 게다가 제주에는 유기견과 들개도 많다. 오후 8시쯤까지 마음속으로 갖은 후회를 해가며 잠시 멈출 수 있을만한 곳이 나타날때마다 휴대폰으로 게스트하우스 검색을 해봤지만 쉽지않았다. 비수기라 그런지 아예 영업을 안하는 경우도 있었다. 커다란펜션이라도 혼자 들어가서 자야 하나 절망하는 순간 나무이야기 펜션을 겨우겨우 만나서 눈물날만큼 안도했다. 나는 낯선 곳에서의 밤길이 무섭다.
#커버: 하효쇠소깍해수욕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