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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정수 Aug 13. 2017

헷갈리는 은어(隱語)

"네가 말하는 건 마와리가 아니라 하리꼬미일 거야"

"너도 그... '마와리'같은 거 돌았어?"

드라마 <피노키오>가 (잠시) 유행하고 난 뒤, 사람들이 너도나도 신기해하며 물어봤다. '오 나도 전문용어 한 번 써보고 싶은데?' '이런 거 물어보면 어떻게 알았냐고 할까?'라는 마음이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듣는 나로서는 한숨만 푹 쉴 수밖에 없는 질문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리고 꽤 많은 기자들도 '마와리'의 뜻을 제대로 모른다. 당신이 물어보는 게 뭘 의도하는지는 추측할 수 있지만, 마와리는 그때 쓰는 말이 아니란 말이다.


이 모든 게 국적불명의 언론계 은어 때문이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10년 전에도, 20년 전에도 지적됐던 문제가 여전히 그대로인 걸 보면, 오히려 아직도 흥미를 갖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보면 "그만 씁시다!"만 외치기보다는 "제대로나 씁시다!"라고 하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하다. 용어 자체는 너무 많이 알려졌지만 정작 많은 사람들이 뜻은 제대로 모르는 언론계 은어들, 내부에서는 꽤나 많이 쓰이고 재미도 있지만 별로 알려지지는 않은 것을 아주 몇 개만 추려봤다.



사쓰? 마와리? 하리꼬미?

제일 답답한 질문은 앞에서도 말한 "요즘도 마와리 돌아?"다. 수습기자처럼 사냐는 말일 거라고 추측한다. 100번이고 말하지만 마와리 안 돌아도 되는 기자는 없다. 왜냐고? 마와리 안 도는 기자는 직무유기이기 때문이다....(안 돌아도 되는 사람은 없지만 실제로 안 도는 사람들이 있다는, 꽤 많다는 건 사실 문제다.)

사람들이 마와리와 하리꼬미를 헷갈리는 이유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지옥의 '수습'기자 시절 때문인 것 같다. 대부분의 메이저 언론사들은 신입 기자를 뽑으면 우선 몇 개월씩 수습으로 돌린 뒤 각자의 부서로 배치한다. 신문사에는 여러 가지 부서가 있지만 수습은 무조건 사회부 사건팀(다른 이름으로는 경찰팀)에서 시작한다. 즉, 경찰기자로 시작하는 것이다.


여기서 혼동이 시작된다. 경찰기자는 말이 경찰이지, 경찰뿐 아니라 대학, 시민단체, 병원 등등 자기 라인(맡은 구역)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사고를 다 챙겨야 한다. 하지만 본질은 어쨌든 경찰이기 때문에 자기 라인에 있는 경찰서를 계속 도는 것이 기본이다. 돈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오전엔 이 경찰서를 갔다가 오후엔 저 경찰서를 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라인 안의 사람들을 두루 사귀어놓고 연락을 주고받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어쨌든 이 경찰(察)서를 도는(廻) 경찰기자를 한자로 찰회(察廻)라고 쓴다. 찰회를 일본어로 읽으면 사쓰마와리다. 대충 사스마리라고도 한다. 사쓰마와리를 줄여서 사쓰라고도 한다. 즉 사쓰마와리 또는 사쓰는 경찰기자를 뜻한다. 수습기자가 아니라 경찰기자다. 수습들이 사건팀에서 수습 시절을 날 뿐이지, 사건팀 경찰팀 기자가 수습기자인 게 아니다.



'마와리'는 다 돌아요

'사쓰'가 아니라 '마와리'라는 단어가 단독으로 쓰일 때가 있다. '마와리돈다'라는 단어로 쓰일 때다. 사실 마와리돈다는 말은 '외갓집'이나 '역전앞'처럼 의미가 중복된 단어다.


문법적인걸 제쳐놓고 보자. 경찰기자는 경찰서를 돌아야 하니까 '찰회'가 된다. 하지만 자기 맡은 나와바리(구역)를 다 돌아야 하는 건 경찰기자가 아닌 어느 부서의 기자나 마찬가지다. 국회 출입기자라면 의원실을 돌아야 하고, 산업부 기자라면 기업을, 정부 부처 출입기자라면 부처 내 각 부서들을 돌아야 한다. 이 도는게 다 마와리다. 자기 구역도 모르고 가만히 앉아있으면 기자가 아니다.


그러니까, 온 지구를 다 돌 수 없는 국제부 기자만 빼면 모든 기자는 '마와리를 돌아야' 하는 것이다. 팀별로 각종 주요 인터넷 사이트나 커뮤니티를 도는 것까지 '인터넷 마와리'라고 농반진반으로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기자들한테 드라마 <피노키오>를 본 소감으로 "요새도 수습처럼 힘들게 살아?"라는 걸 물어보고 싶을 때 "요즘도 마와리 돌아?"라고 물어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건 그냥 "요즘 일은 하니?"라는 뜻이다.



"그럼 그... 힘들어 보이는 그건 뭐니"

그렇다고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불쌍한 수습 시절을 부르는 은어가 따로 있는 건 아니다. 다만 수습 시절의 생활을 특징짓는 단어로는 '하리꼬미'가 있다. 하리꼬미(はりこみ)는 일본어로는 '잠복'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세 가지 정도의 의미로 쓰이는 것 같다.


1. 출판업계 용어=인쇄물 크기가 정해지면 용지 위에 앉히는 작업이라고 한다(검색 결과...). 예를 들어 종이가 A3 사이즈이고 내가 인쇄해야 하는 건 명함사이즈라면 애초에 A3 용지 위에 명함 수십 장을 어떻게 배치해서 한 번에 인쇄할지 배열을 한다는 의미라고나 할까... 요즘은 '터 잡기'라는 우리말이나 임포지션(imposition)이라는 영어표현으로 바꿔서 많이 쓰는 것 같다. 왜 하리꼬미라는 단어를 애초에 쓰게 됐던 건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다.


2. 언론계 용어A=말 그대로 잠복. 이건 사회부 기자가 가장 많이 하지만 필요할 때에는 모든 부서의 기자들이 가리지 않고 할 수밖에 없다. 요새는 '뻗치기'라는 한글 용어로 거의 순화된 것 같다. 취재원을 만나거나 특정 상황을 목격하기 위해 무한히 기다리는 걸 의미. 뻗치기 중의 최악은 추운 겨울날 야외 뻗치기라고 할 수 있다.


3. 언론계 용어B=경찰서에서 먹고자며 취재하는 생활. 1진 기자실이 있는 경찰서가 있고 2진 기자실이 있는 경찰서가 있다. 1진 기자실은 그래도 비교적 사무실 느낌이라고 할 수 있지만, 2진 기자실은 쓰레기 더미라고 할 수 있다. 상황이 좋은 곳은 침대가 있기도 하지만, 많은 곳에는 그냥 방바닥이 하나 있고, 유래를 알 수 없는 냄새나는 이불과 침낭, 옷가지, 수건, 쓰레기, 가방 등등이 널브러져 있다. 이곳에서 새벽에는 두어 시간씩밖에 못 자며 씻지도 못하고 남녀도 없이 대충 엎어져 자고, 그 이외의 시간에는 좀비처럼 경찰서를 전전하는 생활을 이른바 '하리꼬미'라고 한다.




1, 2의 의미는 대체로 한글 표현으로 순화된 것 같다. 3은 아직 하리꼬미'라고 불린다. 어감이 비슷해서인지 많은 일반인들이 자꾸 이 하리꼬미와 마와리를 헷갈리는 것 같지만 둘은 엄연히 다른 단어다. 어쨌든 '사쓰'는 그냥 경찰기자, '마와리돈다'는 그냥 마와리 생략하고 '돈다', 하리꼬미3은 '경찰서 수습'정도로만 바꿔도 아주 직관적일 텐데, 언어순화라는 건 결국 시간이 약이다.



커버=2017. 8. 5. V10.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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