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부터 고물까지, 질서 없는 도떼기시장
도떼기시장이라는 말이 딱 맞다. 이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상품, 중고품, 고물 따위 여러 종류의 물건을 도산매ㆍ방매ㆍ비밀 거래하는, 질서가 없고 시끌벅적한 비정상적 시장'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국정감사는 정확하게 도떼기시장이다.
국회에서는 국정감사의 의의를 '국정운영의 실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입법과 예산심의를 위한 자료를 수집하며 국정의 잘못된 부분을 적발·시정함으로써 입법·예산심의·국정통제 기능의 효율적인 수행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순기능은 순기능이되, 기자 입장에서는 이렇다는 의미다.
국감은 일 년에 딱 한 번 열린다. 한 달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300명의 국회의원 사무실에서 매일같이 자료를 쏟아낸다. 각자 출입하는 정당, 각자 담당하는 상임위원회의 자료만 받더라도 적어도 하루 100건 이상이다. 1% 정도는 매우 의미 있는 자료. 10% 정도는 합리적이고 괜찮은 지적, 30% 정도는 서로 겹치는 자료, 10%는 황당한 지역구 홍보, 나머지는 과거 국감자료의 단순 업데이트 버전이다. 상품, 중고품, 고물이 모두 들어있는 이유다.
참신하면서도 의미 있는 자료를 발굴해내는 건 의원실 입장에서도 어려운 일이지만 기자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국감 자료와 99% 판박이인 자료도 정말 많다. 두 가지 의미다. 피감기관이 지난해 지적받은 문제를 고칠 생각을 하지 않았거나, 의원실도 피감기관도 지쳤거나.
국감에서 드러나는 온갖 비리와 국정 난맥상들은, 설령 그것이 재탕 삼탕 우려낸 사골국물 같은 내용이더라도 사실 언론이 평소 취재하고 싶어 하는 주제들이다. 국감 기간이 아니라면 하나하나가 꽤 괜찮은 기사거리이기도 하다. 개별 기자 입장에서는 평소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정보들이기 때문이다. 취재 상대들이 거짓말을 하거나 자료를 주지 않더라도 방법이 없다.
하지만 국회는 다르다. 국회의원은 정부에 자료제출 요구권이 있기 때문이다(국회법 제128조). 국감은 더 다르다. 국감에서의 위증은 법으로 처벌받기 때문이다(국회에서의 증언·감정 등에 관한 법률 제7조). 최근 사내 미디어연구소에서 내부 참고용으로 인트라넷에 올린 글에는 "국회의원과 기자들이 가장 활발하게 정보를 교류하고, 동일한 목표를 위해 일종의 ‘협력’을 하는 중요한 기간이 국감 기간"이라고 쓰여있기도 했다.
이렇게 나온 국정감사 자료가 기사가 되는 과정은 두 가지다. 의원실에서 이메일로 자료를 '뿌리면' 기자들이 걸러내서 기사화하거나(방매放賣), 특정 의원실이 특정 매체와 따로 거래하거나(비밀거래).
통신사나 인터넷 매체는 출입기자 모두에게 풀(pool) 된 자료를 기사로 쓰는 경우도 많다. 의원실에서 아예 통신사를 통해 풀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면이 매우 한정된 종이신문이나 방송사들은 남들이 쓰지 않는, 아직 풀 되지 않은 단독 자료를 찾아야 기사로 쓸 수 있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머릿속에 구상을 가진 기자들은 의원실에 직접 "이런이런 자료를 요구해달라"며 작업을 '발주'하기도 한다. 시장이 형성되는 지점이다.
문제는 특정 의원실과 거래를 하기로 약속을 해놓고도 못 지키는 경우가 많아진다는 점이다. 자료를 받긴 받았는데 발제를 하니 편집회의에서 킬 됐다거나, 기사로 쓰라고 잡긴 했지만 내 예상보다 너무 보잘것없는 분량으로 잡핬다거나. 이유는 대체로 "얘기가 안 된다(기사가치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정말 얘기가 안 되거나 그날 지면이 부족한 경우도 있지만, 석연찮은 경우도 꽤 많다.
두 가지 일이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해당 매체는 주요 거래 대상에서 멀어지기 시작한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제대로 벌어지는 셈이다. 이를테면 조선일보의 경우 지면을 살펴보면 자유한국당에서 나온 자료로 1면과 종합면이 범벅이 되어 있지만, 나머지 신문들은 한국당 기사가 가뭄에 콩 나듯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한겨레는 정 반대이다. 국감기간에는 각 언론사가 현재 정부 정책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가 정확하게 반영된다.
거래는 수요와 공급이 맞아야 이뤄진다. 의원실 입장에서는 늦어도 특정 피감기관의 국정감사 당일 조간신문, 또는 전날 TV 종합 뉴스에서 자신들이 준비한 자료를 빵 터뜨려서 주목을 받아야 국감 당일 질의에 활용할 수 있다. 의원실과 피감기관들은 늘 자료제출 시한을 놓고 줄다리기를 벌인다.
때문에 국감 직전에 자료를 제출받고 자기 친한 기자를 붙잡아 "당장 내일자로 써줄 수 없냐"라고 막무가내로 요구하는 의원실 보좌진들도 많다. 마찬가지로 퀭한 보좌진들을 붙들고 당장 내일자로 쓸 수 있는 '완성된, 그리고 얘기되는' 자료를 내놓으라며 하이에나처럼 의원회관들을 헤매는 기자들도 많다.
국회의 '극성수기'인 국감 기간 동안 보좌진들에게는 야근이 당연시된다. 상임위별로 수십 개에 이르는 피감기관에서 제출한 자료를 읽기만 하는 데에도 시간이 빠듯하다. 라꾸라꾸 침대를 갖다 놓는 곳도 수두룩하다. 주말이든 새벽이든 시간을 가리지 않고 국감 메일 자료를 발송하는 의원실도 많다. 한 보좌진은 월요일 조간 신문용 자료를 보내 놓고 토요일에 연락해 "기사 쓰기로 결정됐냐"라고 묻기도 했다. "전날은 되어봐야 알 수 있다"라고 하자 "주말 없는 삶을 살다 보니 오늘이 일요일인 줄 알았다"며 어지러워하기도 했다. '오전' 3시에 기사가 온라인으로 출고된 것을 확인하자마자 "방금 기사 뜬 거 잘 봤는데 여기 이거는 틀렸다"는 수정해달라고 카톡을 보내 놓은 비서관도 있었다. 모두들 이쯤 되면 거의 취한 상태로 하루하루를 난다.
이건 1년에 한 번 정기적으로 이뤄지는 국정감사에서 기자들이 어떤 식으로 국감기사를 쓰는지 아주 간단하게 대충 요약한 내용이다. 모두가 '중요도' 못지않게 '희소성'을 갈구하는 상황에서 사장(死藏)되는 자료들은 사실 수두룩하다. 기자들의 머릿수와 사람들의 관심사, 시간은 모두 한정됐기 때문이다.
의원들도 자신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자료를 보좌진들이 써준 대로 읽다 보니 깊이 있는 질의를 하기는 힘들다. 한 의원은 "진기명기 쇼 같은 국감을 해서 뭐하냐"며 '국감 폐지론자'를 자처하기도 했다. 국감의 연관검색어는 주로 맹탕, 수박 겉핥기, 구태, 무용론이다.
누군가 "후진적인 시스템일수록 시기별로 일의 밀도가 크게 차이 난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미친듯한 성수기와 할 일 없는 비수기 사이를 오가는 것이 아니라 적정 수준의 일을 상시적으로 하는 것이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에도, 국정을 국민들에게 알리는 데에도 모두 유리하다.
이 때문에 국회에서 쉬지 않고 나오는 제안 중 하나가 '상시국감(관련해 최근에 나온 명지대 김형준 교수의 기고)'이다. 굴곡지게 꺾이고 튀어나온 그래프를 평평하게 펼치자는 것이다. 핵심은 일 년에 한 철 몰아서 수백 개 피감기관에게 "당장 자료를 내놓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라고 달달 볶는 대신 상임위별로 피감기관을 중요도에 따라 선별해 1년 내내 차례로 살피자는 주장인데, 설득력 있다. 실제 2014년에는 정말 상시국감으로 제도가 개선될 뻔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흐지부지됐다. 사실 국감제도를 개선하자는 현역 의원들의 의지가 강하지도 않다. 온 국민의 이목을 집중시켜놓은 타이밍에 여야 간에 주요 이슈를 두고 '티 나게' 싸울 수 있는 좋은 기회인 데다, 개별 의원의 입장에서도 현재 (혹은 점찍어둔) 지역구에 본인을 홍보할 수 있는 좋은 '마케팅 수단'이기 때문이다. '아는 놈들이 더하다'는 말이 딱 맞는 국감도 어느덧 막바지다. 정당들은 후루룩 결과보고서를 말고 의원들은 대충 시정요구를 보내면 기관들은 작년 자료를 복사-붙여넣기 하여 처리결과를 보낼 것이고, 그럼 언제 그랬냐는 듯 올해의 국감도 9할은 곧 잊힐 것이다.
#커버 : V30. 국감 기간 기자실 앞에는 항상 보도자료가 줄지어 쌓여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