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아!!!!!" 누군가 목이 터져라 외치자 수십 명의 사람들이 전속력으로 문 앞으로 달려갔다.
25일 오후 6시경이었다. 더불어민주당에서 문제의 패스트트랙 법안들을 발의하러 오지 못하게 국회 본청 701호 의안과 앞을 이날 오전 9시부터 지키던 자유한국당 곽상도 의원이 기자들에게 "아직은 스탠바이할 필요 없어요. 민주당 쪽에서 여기 (의안과) 직원들에게 법안을 완성하려면 시간 좀 더 걸리니 기다려달라고 했대요"라고 말하던 찰나였다.
어디선가 인기척이 느껴졌다. 한 순간 하늘색 서류철을 든 한 남자가 갑자기 의안과 문을 향해 돌진했다. 막으라는 외침과 함께 현장에서 뻗치던 한국당 의원과 보좌진 수십 명이 전속력으로 이쪽 문으로 뛰어들었다.
의안과는 사무실이 커서 출입문이 여러 개다. 한쪽에서 막힌 남자는 즉시 다른 쪽 문을 향해 100미터 달리기를 하는 인간 탄환처럼 내달렸다. 그렇게 몇 번을 더 내달렸다. 하지만 "당장 막아!!!" 하는 외침과 함께 달려든 수많은 인간 방어막들을 결국 뚫지 못했다.
한국당 최연혜 의원이 특유의 새된 목소리로 미친 듯이 구호를 외쳤고, 남자는 한쪽으로 토끼몰이를 당했다. 최 의원은 격앙돼서 "나를 밟고 가!!! 우리를 밟고 가라!!!"하고 고함을 질렀다. 최 의원의 입에서는 구호 자판기처럼 쉬지 않고 "도둑 입법 민주당을 규탄한다"처럼 서너 박자로 된 구호들이 쏟아져 나왔다. 기자들과 보좌진들의 카메라도 몰려들었다.
혼자 소리지르는 최연혜 의원과 "어디야" "누구야" 웅성웅성하는 나머지들
남자는 국회 사법개혁특별위원회 더불어민주당 간사인 백혜련 의원의 보좌진이었다. 그의 손에 들려있던 하늘색 서류철에는 백 의원이 대표 발의한 '고위공직자 범죄수사처 설치 운영을 위한 법률안'이 들려있었다.
701호 앞을 뻗치던 한국당 의원들을 피해 의안 접수를 하려던 그는 거칠게 제지당하자 멋쩍은 듯 웃으며 계단실로 내려갔다. 내는 것도 비정상, 막는 것도 비정상적인 장면이었다.
돌이켜보면 그 순간이 이 난장판의 가장 직접적인 시작이었다.
다들 어안이 벙벙한 상황에서 정신을 차리려고 하던 순간, 이번에는 의안과 안에서 삐리리리 팩스 수신음이 울렸다. 민주당에서 인편 접수가 막히자 팩스 접수를 시도한 것이었다. "팩스로 들어온다!!" 따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망설이지 말자고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한국당 의원들과 보좌진은 의안과로 거침없이 돌진했다. 팩스를 받을 수 있게 생긴, 종이가 꽂힌 기계란 기계는 전부 찾아다 전선과 통신선을 뜯다시피 뽑아댔다. 거의 사활을 건 것처럼 미친 듯이 의안과를 가득 메우고 뛰어다녔다.
한국당은 "민주당이 인편 법안접수를 한 순간 즉시 등록하기 위해, 사전에 사무처와 짜고치고 이메일로 법안내용을 미리 작업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공수처법은 접수가 됐다. 형사소송법 개정안(검경 수사권 조정 관련 법안)은 결국 나오다 잘렸다. 곽상도 의원은 나중에 그 인쇄되다 만 종잇장들을 쥐고 흔들었다.
공수처법을 전산에 입력하고 있던 의안과 직원은 '사퇴 요정' 이은재 의원에게 붙들렸다. 주변을 가득 메운 카메라 플래시와 렌즈 사이에서 고개를 푹 숙인 그 직원은 "도둑 입법"이라는 욕을 괜히 들어먹으며 정말 수 분을 시달렸다. 옆에서 지켜보던 다른 직원들은 안쓰럽고 화난 눈빛으로 그쪽을 쳐다보다 말다 했다.
그렇게 시작된 그날 밤의 전쟁은 새벽녘 문제의 빠루가 등장하고 나서야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가 재개됐다. 이틀에 걸친 전투는 결국 사람도, 팩스도 아닌 전자 시스템으로 법안이 접수되며 허탈하게 끝났다.
돈을 못 보내게 창구를 막겠다고 ATM을 부숴버리겠다고 은행 셔터를 내려버리겠다고 갖은 추태를 부리던 싸움이 모바일 계좌이체로 싱겁게 막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2차전이 이어지고 있다.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국회에서는 비이성적인 일들이 왕왕 일어난다. 전국에서 선택받은 뛰어난 300인이 모인 이곳에서 말이다.
똑똑한 사람들만 모였다는 곳에서 왜 그렇게들 몸만 쓰고 있나. 각자의 속내와 꿍꿍이들이 있지만, 그 꿍꿍이가 왜 하필 이런 꼴로 발현되고 말았는가.
2014년 국회선진화법이 시행된 뒤부터야 나는 국회를 출입했다. 무용담으로만 듣던 '전설의 동물 국회'를 내 눈으로 볼 기회는 없었다. 그것이 약간 아쉽다고 생각했을 때도 있었다.
그리고 2019년, 국회 선진화법을 처음으로 위반한 사례가 될지도 모를 현장들이 쏟아졌다. 목을 조르고 주먹을 휘두르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면 가히 '초식동물 국회'라고는 할 만했다.
경호권이 발동되면 이런 모습이 된다. 이날 7층의 온도와 습도와 냄새는 사우나를 방불케 했다.
문제의 701호 출입문. 안에서도 한국당 의원과 보좌진들이 봉쇄하고 있다. 국회에서 "으쌰으쌰"를 듣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판사, 검사, 교수, 지도자, 기업인. 대단했던 사람 중에서도 정치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소수다.
대단한 동시에 호소력이 있어야 하고, 똑똑한 동시에 사람의 마음을 살 줄 알아야 한다. 인기에 목숨 걸고, 소나기 같은 비난을 견딜 수 있어야 하고, 그러다가도 일어나서 자기 하고 싶은 말은 백번이고 천 번이고 팔뚝질 하며 외칠 수 있어야 한다.
정치인은 지독하게 감정적인 사람들일 수밖에 없다. 지독하게 감정에 호소하는 정치인들이 하나의 집단적 목표 / 자신을 지켜보는 수많은 눈(언론) / 강력한 동기가 있다면 최면에 빠져들듯 자신들의 감정을 에스컬레이팅하게 된다.
이토록 비이성적으로 보이는 행동들에 각 진영들이 목숨을 걸게 되는 건 전략이나 계획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모두들 비열해지고, 치졸해지고, 점점 우리의 논리에만 빠져들며, 나의 과거는 잊게 된다. 원래도 이곳은 '내가 살려면 남을 죽여야 하는 곳'이었지만, 그 전쟁이 물리적인 형태로 나타나면 말 그대로 남을 죽이는 데에만 매몰되는 상황에 빠져버린다.
누군가는 특정 시점을 거론하며 "그때 그렇게만 안 했어도 이 지경까지는 안 왔다"며 책임론을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일단 선전포고가 되면 그런 것들을 다 필요 없다. 멈출 수 없는 바퀴처럼, 누가 더 적군의 머리를 많이 따 오는지만이 중요하며, 선봉장은 오로지 개선장군이 되는 데에만 목숨을 걸게 된다.
이건, 그래서 선거제를 이렇게 처리하는 게 맞는지, 공수처가 필요한지는 모두 떠나서 하는 이야기다.
전쟁 후에는 많은 것들이 남는다
격렬한 전투가 한 차례씩 지나갈 때마다 국회는 전쟁터의 모습을 갖춰갔다.
문제의 25일 밤이 지난 뒤 이 곳의 모습은 많은 것들을 함축해 보여줬다.
찢어진 종이와 구겨진 물병과 떨어진 단추들
한바탕 하고 지나가면 바닥에는 많은 것들이 나뒹군다. 누군가의 자켓과 셔츠에서 떨어진 단추들까지 굴러다닌다. 33년 만에 발동됐다는 국회의장의 경호권에 방호과 직원들이 출동한 뒤에는 직원들의 무전기까지 돌아다녔다. 격투를 벌인 한국당 보좌진들이 땀에 전 채로 "무전기 잃어버리신 분" 하며 방호과 직원들에게 바닥에서 주운 무전기를 도로 건네주는 촌극도 벌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깔고 앉고, 밟고 올라서고, 의도치 않게 발로 찬 것은 하필 이날 정부가 제출한 추가경정 예산안 설명자료였다.
25일은 정부가 국회에 추경예산안을 제출한 날이다. 제출된 자료는 있지만 심사할 사람은 없었다. 이날 의안과 앞에 쌓여있던 산더미 같은 설명자료들은 기자들과 보좌진들의 의자와 테이블과 사다리로서의 역할을 일단 충실히 했다. 잘 포장이 되어있어서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바로 위의 사진처럼 찢어발겨져 7층의 재가 되었을 것이다.
6층(사진상 가운데 층)의 과방위 회의실로 갑자기 몰려드는 사람들.
국회의사당 본청은 태권 v가 나온다는 그 돔 아래로 가운데가 2.5층의 '로텐더홀'까지 뻥 뚫려 있는 구조다. 가운데로 가면 다른 층이 훤히 내다보인다. 위 사진은 7층이 잠시 소강상태일 때 찍었다.
정신 좀 붙들어 매려고 비교적 고요한 다른 층을 구경하고 있는데, 갑자기 6층의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회의실 쪽에 대 혼란이 일어나며 사람들이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사개특위였는지 정개특위였는지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 둘 중의 한 특위가 장소를 저곳으로 기습적으로 바꿔서 열린 것이었다.
그런 식으로 이틀 동안 여야는 국회 내 갖은 회의실이란 회의실은 전부 다 돌아다니며 기습 회의를 열기 위한 눈치싸움을 벌였다. 층층마다 각 당에서 파견한 염탐꾼들도 많았다.
빠루와 망치가 지나간 자리를 한국당이 현장보존이라며 덕지덕지 돗자리로 붙여놓은 모습.
25일 새벽, 즉 26일 오전 방호원들이 의안과 문을 열겠다고 때려 부순 흔적을 한국당은 '현장보존을 해야 한다'며 귀하신 돗자리로 막아놨다. 여전히 망치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민주당은 '우리가 한 것 아니다', 한국당은 '민주당 보좌진이라는 증거자료가 다 있다', 국회 사무처는 '우리 거 맞다'며 진실공방 중이다.
어찌 되었든, 한국당의 의도와 상관없이 저 문은 현장 보존 차원뿐 아니라 역사 증거물로써 보존할 가치가 있을 것 같다. 이번 폭력 사태가 국회선진화법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벌어진 초식동물 국회로 역사에 남게 하자는 반성 차원에서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