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세에 의해 시작된 안타까운 한국 맥주를 바라보며
술의 역사를 찾아보기 위해서 자주 체크하는 것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이다. 실록에서는 왕과의 술자리에서 양위를 주장해 세조에게 처형당한 양정의 이야기부터, 금주령을 어겨 영조에게 죽임을 당한 병마절도사 윤구연, 그리고 고급 청주를 마신 자는 처벌을 면하고, 서민들의 술인 탁주를 마신 자는 벌을 받는 유전무죄, 무전유죄와 같은 시대적 반영이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맥주 편도 역사에 어떻게 기록이 되어있나 해서 찾아봤는데, 신기하게 실록에 나와있다. 영조 대, 금주령의 항목으로 맥주가 등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맥주와 지금의 맥주는 완전히 다른 술이다. 가장 큰 차이는 현대 맥주에는 홉이 들어가지만, 한국의 고전 맥주에는 홉이 들어가지 않는다. 조선시대의 맥주가 막걸리 또는 보리로 만든 청주라면, 지금의 맥주는 독일의 맥주 순수령을 기초를 둔, 우리 술이 아닌 서양의 전유물이라고 볼 수 있다.
삐루라고도 불린 한국의 맥주
현대적인 한국 맥주의 시작은 신미양요 때로 많은 전문가는 평가하고 있다. 1871년 강화도에 미국 군함 5척이 정박을 했고, 조선과 통상을 요구했다. 이들과 돌려보내기 위한 협상가로 문정관이라는 직책의 하급 관리가 올라가게 되는데, 이때 맥주 대접을 받고 빈병을 한가득 안고 나온다. 이때가 서양 맥주가 한국에 처음 들어온 공식적인 기록이다.
이후 일본과의 불평등조약인 강화도 협약(조일수호조규)를 맺고, 일본의 맥주가 본격적으로 들어온다. 특히 1900년대 초반부터 눈에 띄는데, 이때 가장 유명한 맥주가 기린 맥주와 에비스 맥주였다. 당시 일본은 대일본맥주라고 하여 지금의 삿포로 맥주, 아사히 맥주, 에비스 맥주가 하나의 회사로 통합돼있었고, 여기에 기린 맥주 정도가 경쟁구도였다. 기린 맥주는 1888년 메이지야 (明治屋)라는 거대 유통사와 총판 계약을 맺었고, 한반도에는 1905년부터 진출을 하게 된다. 이때부터 맥주는 상류층의 향유물로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당시 한국 맥주는 맥주라는 표현보다는 주로 삐루(ビール)라는 일본식 표현을 자주 썼다. 영화 장군의 아들에서도 일본 기린맥주가 등장을 하는데, 이때도 맥주란 표현보다는 삐루라고 부른다. 당시에 기록을 보면 맹물(탄산수로 보인다)를 병에 넣고 맥주라고 팔기도 했으며, 독립운동가들이 맥주병에 석유를 넣고 친일파를 처단한 적도 있었다.
1933년 영등포에 세워진 조선 맥주와 소화기린맥주, 가정 내 맥주 보관은 우물에서
일본은 한반도 내 본격적인 진출을 위해 맥주 공장을 영등포에 세운다. 조선 맥주와 쇼와 기린맥주다. 조선 맥주는 주로 삿포로 맥주와 에비스 맥주를 만들었고, 기린 맥주는 이름 그대로 기린맥주를 만들어 한반도에 유통을 했다.
역사적 사실을 떠나, 흥미로운 것은 당시 맥주를 판매하고 저장하던 방법이었다. 당시 냉장고가 없었던 만큼 맥주를 시원하게 마시기가 어려웠는데, 이때 알려진 것은 맥주를 우물에 보관하라는 것이었다. 우물은 지하수로 연중 15도 정도를 유지했던 것. 여름에는 시원하게 겨울에는 따뜻하게 먹을 수 있는 것이었다.
영등포에 있던 조선 맥주와 기린맥주는 이후 미 군정의 입찰을 거쳐 크라운 맥주(현 하이트맥주)와 동양맥주(OB(Oriental Brewery)로 바뀌게 된다. 결국 한국 맥주의 시작은 일본 자본에 그것도 일제강점기에 이루어진 것이다. 참고로 당시 맥주 배달은 일명 짝이라고 불리는 플라스틱 케이스가 없었다. 병끼리 부딪혀 깨지는 경우도 많아, 결국 왕겨를 넣어 파손을 방지했다고 한다. 지금에 비유하면 마치 꽃게를 넣은 박스에 톱밥을 넣는 것과 비슷할 수 있다.
60년대 최고의 추석 선물이었던 맥주.
맥주는 해방 이후에도 꾸준히 고급 품목이었다. 주세만 해도 160%로 주요 세수원 중에 하나였다. 최고의 추석 선물 중 하나였고, 맥주의 TV 광고는 승마, 조정, 테니스 등 고급 스포츠와 늘 함께 했다.
60년대의 크라운 맥주. 출처 하이트진로
크라운과 OB의 경쟁구도
1950년대까지는 크라운 맥주가 OB맥주보다 점유율이 높았다. 하지만 무리한 대리점 확장에 크라운 맥주는 부도가 나고, 60년대에 한일은행의 관리 대상이었다. 부산의 대선 발효(현 부산 C1(시원) 소주로 유명한 대선주조)가 인수를 하면서 시장 점유율을 40%까지 이끌었다. 결국 이때까지만 해도 OB가 60%, 크라운 맥주가 40%를 차지하는 양강 구도로 흘러간다. 참고로 이 시대에 흑맥주도 등장을 한다. 의외로 맥주에 다양성이 존재했던 시대인 것이다.
1970년대 등장한 새로운 맥주 회사 이젠벡(한독맥주)과 OB의 경쟁
1975년 양강 체제였던 한국의 맥주 시장에 도전장을 내는 회사가 하나 생긴다. 독일의 이젠벡(Isebeck) 맥주와 기술 제휴를 통해 마산에 공장을 세우고 공격적인 마케팅에 들어간 한독맥주다. 한독맥주는 제품을 출시한 3개월 만에 15%의 점유율을 기록하는 등 품귀 현상을 일으킬 정도로 선풍을 일으킨다. 무엇보다 맥주 거품을 꽃처럼 묘사하며 풍미를 자극하는 모습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의 이젠벡 맥주의 광고 문구였다. “바로 이제부터는 이젠벡입니다”라는 카피라잇이었다. OB나 크라운 맥주는 이제는 너무 많이 마셨으니 새로운 것을 즐기라는 당시로는 도발적인 내용이었다. 이에 OB 맥주는 대응하는 문구를 만든다. 내용은 “친구는 역시 옛 친구, 맥주는 역시 OB”라는 내용이었다. 옛 친구와 같은 맥주가 최고라는 뜻이며, 다른 맥주를 마시는 것을 은근히 친구를 저버리는 듯한 느낌으로 풍긴다. 결국 한독 맥주는 무리한 정부 관료들에 대한 로비와 주권 등을 위조, 결국 2년 만에 대표가 구속이 되는 등 파산에 이르게 되어, 크라운 맥주에 인수합병이 된다. 이로써 한국의 맥주 시장은 다시 양강 구도로 흘러가게 된다.
1980년대 회식에 등장하는 맥주 문화, 칼라TV의 보급이 맥주 시장 확산으로
1970년대까지 한국의 대표 술은 소주도 맥주도 아닌, 막걸리였다. 특히 1974년도에는 74% 이상의 출고량을 가져가면서, 국민 술로 여겨진다. 하지만 생막걸리라는 관리의 어려움, 적은 자본으로 인한 마케팅의 부재, 무엇보다 80년대 칼라TV의 보급으로 맥주의 황금색과 거품이 더욱 띄게 된다. 그러면서 OB맥주는 강력한 마케팅을 진행하는데, 기존의 고급술의 이미지에서 회식으로 즐기는 광고를 선보인다.
업무가 끝나면 모두 시원한 맥주를 마시러 가는 풍경을 연출한 것이다. 이를 통해 OB맥주는 고급 시장에서 누구나 다 마실 수있는 거대한 대중시장으로 본격진출한다. 하지만 크라운 맥주는 여전히 고급 이미지를 풍기며 즐기는 콘셉트를 유지한다. 옛것을 버리지 못하는 모습으로 이어가는 것이었다.
결국 80년대 말에는 OB맥주는 80%, 크라운 맥주는 20%의 점유율을 가졌고, 서울에서는 아예 OB맥주가 90%를 차지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당시 OB는 회사의 이미지 및 마케팅력으로 크라운 맥주를 제치고 시장 점유율 100%를 만들 수 있었으나 독과점법에 접촉되는 것을 우려, 일부러 크라운 맥주에게 약간의 시장을 양보했다고까지 전해진다.
1990년대 하이트의 맥주의 대두와 두산 반도체의 페놀 유출
1991년, 맥주 체계를 뒤바뀌는 사건이 하나 발생한다. 그 유명한 두산 반도체의 맹독 물질 페놀 유출 사건이다. 페놀 원액 저장 탱크에서 페놀수지 생산라인으로 통하는 파이프가 파열되어 발생했다. 유출된 페놀은 대구광역시의 상수원인 다사 취수장으로 유입되었는데, 이때 대구 시민들이 수돗물에서 냄새가 난다는 신고가 있었는데, 취수장에서는 원인 규명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다량의 염소 소독제를 투입해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이었다. 페놀은 염소와 반응하면 독성이 더욱 강해지는데, 이 때문에 대구는 물론 밀양, 함안, 부산까지 페놀이 검출되어버린다. 이 사건으로 낙동강 주변의 피해를 입은 지역에서는 두산그룹에 대한 불매운동까지 벌어졌고, 당시 자회사였던 OB맥주는 직격탄을 받는다.
이에 홍천으로 제2공장을 옮겼던 크라운 맥주는 강원도에서 나오는 지하 150m 암반수라는 하이트 맥주를 93년도에 출시하고 대박을 터트린다. 신선한 물에 목말랐던 소비자의 심리를 정확히 꿰뚫은 것이다. 원래 하이트 맥주는 지하 암반수로 차별점을 내세울 생각은 없었다. 초기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비열처리공법이었다.
이전까지는 맥주의 재발효를 막기 위해 끓여서 멸균한 채로 유통했지만, 하이트는 업계 최초로 마이크로 필터를 이용, 재발효의 주원인인 효모를 걸러냈다. 이렇게 되면 열을 가하지 않아 신선한 맛이 나며, 일본의 대표 생맥주들이 이 방법을 주로 사용해왔다.
하지만 결국 소비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비열처리란 말보다는 좋은 물이란 것을 강조, 1996년 맥주 1위를 탈환하게 되며, 1998년에는 아예 사명도 조선 맥주에서 하이트맥주로 변경하게 된다. OB는 IMF때 인터부르라는 외국기업에 매각이 고, 맥주 사업에 진출했던 진로그룹의 진로쿠어스사를 인수, 이때 진로 쿠어스의 CASS가 OB의 산하 제품이 된다. 이후 OB는 여러 회사에 매각이 되다가 결국 2012년 인터부르가 주축이 된 세계 최대의 맥주 기업인 AB인베브에 인수합병되게 되고, 하이트 역시 진로를 인수, 소맥을 아우르는 회사가 된다.
2012년부터는 다시 카스와 처음처럼의 소맥이 <카스처럼>이란 이름으로 대히트, OB가 하이트에 다시 역전을 하게 되며, 2014년 롯데주류의 클라우드 출시 및 정부의 크래프트 맥주에 대한 시설 완화를 통해 크래프트 맥주 양조장이 급격히 늘어 최근에는 다양한 맥주를 즐길 수 있는 문화가 되었다.
외세에 의해 시작된 한국 맥주, 이제는 인정하고 발전을 더 해야할 때
신미양요 때부터 시작된 근대의 한국 맥주 역사를 보면 결국 외세의 침입과 자본에 의해 그 시작이 결정된 듯하다. 따라서, 그 역사를 자랑스럽게 여길 수도 없었으며, 늘 굳이 알리고 싶지 않은 역사였다. 하지만 술의 역사 및 인문학이 관심을 받게 되며, 자연스럽게 조명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사실을 더욱 공개해서 맥주에 대한 역사관을 같이 공유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래야지만 모든 것을 감안한 채, 미래지향적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좋건 나쁘건 우리에게는 150년이라는 맥주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written by 명욱
*해당 내용은 2017년 SBS 팟캐스트 말술남녀에 출연하면서 정리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