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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욱 Sep 27. 2020

술들의 전쟁,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1부)

백년전쟁에 대한 간단 스토리

중세 유럽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쟁을 언급하라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교황과 유럽 제후들의 이권이 맞아떨어져서 침략전쟁으로 전락한 십자군 전쟁과 유럽의 패권을 노리던 프랑스와 영국의 백년전쟁(1337~1453)이다. 십자군 전쟁은 예루살렘 탈환과 교황의 권위를 더욱 살리려고 했으나 결과적으로 대실패, 오히려 기존의 기독교 세계관에 대해 실망, 신본주의에서 탈피할 수 있었으며, 100년 전쟁은 영주의 힘이 강했던 봉건주의가 무너지고 영국과 프랑스에 국가와 민족이라는 개념이 생긴 시대였다. 즉 근대 국가의 기틀이 마련되는 시기였다.


그 이전의 유럽은 국가와 민족이라기보다는 영주, 귀족, 왕족으로 나뉘진 세계였다. 영국의 왕도 자신이 프랑스 귀족이라고 생각했으며, 프랑스의 왕 역시 영국은 자신들의 속국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백년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영국 왕실의 언어는 프랑스어였다. 하지만, 100년간(정확하게는 116년) 간 처절한 전투를 통해 영국과 다른 프랑스인, 프랑스와 다른 영국인이라는 개념이 생기면서,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이 확립되어 간다.


백년전쟁은 프랑스 왕족 들의 전쟁

백년전쟁은 영국에 있는 프랑스 귀족과 프랑스에 거주하는 프랑스 왕족들 간의 전쟁과 같은 상황이다.

결혼을 통 해상황이 많이 얽히고설킨 장면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실질적으로 지금의 영국인, 프랑스인으로 나누기는 애매한 상황이다.


백년전쟁은 술 주산지들의 전쟁

중요한 것은 백년전쟁에 나오는 대부분의 지역이 술과 와인으로 유명했다는 것. 흥미로운 것은 상당수의 프랑스 와인 산지가 영국 편을 들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보르도(Bordeaux)와 부르고뉴(Bourgogne)다. 게다가 부르고뉴는 프랑스의 국녀라고 불리는 잔다르크의 가족과 잔다르크를 영국과 함께 죽이기도 했다(재판을 통한 화형). 보르도는 계속 영국의 지배하에 있다가 백년전쟁 마지막 전투를 장식하는 곳으로 나온다. 그리고 여기서 전사한 인물이 영국의 아킬레스라고 불리는 명장 텔버트(Talbot)다. 바로 히딩크 와인으로 불린 샤토 딸보의 주인공이다.


영화 잔다르크에서 잔다르크와 전투를 벌이는 텔버트 장군, 잔다르크에 져서 프랑스군의 포로가 되기도 한다. 그의 명성을 기린 샤토 딸보 보르도 와인. 히딩크 와인 유명하다


사건의 발단인 노르망디 공국은 사과 발효주인 시드르(Cidre)와 증류주인 깔바도스(Calvados)로 유명한 곳이다. 백년전쟁 후반에 부르고뉴 공국과 대적하는 아르마냑은 와인을 증류한 브랜디로 유명한 지역이며, 마지막으로 잔다르크에 의해 샤를 7세가 대관식을 올린 랭스 성당은 샴페인의 주산지이다. 알고 보면 백년전쟁의 중요한 지역 모두가 술의 산지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어떠한 경로로 이 백년전쟁이 생기게 되었을까?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의 유명 술 사과 발효주 시드르와 증류주인 깔바도스.


아들 없이 죽은 프랑스 왕, 다음 왕은 누가 되나?

100년 전쟁이 일어난 이유를 보면 크게 3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직모 사업을 하던 플랑드르 지방(현 벨기에 등)에 대한 지배권 다툼, 그리고 세계적인 와인 산지인 보르도(가스코뉴 지역)에 대한 지배권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프랑스 왕위 계승에 영국 왕이 딴지를 건 것. 바로 프랑스 카페 왕조의 샤를 4세(재위 1322~132)가 직계 없이 사망, 사촌인 발루아 백작(필리브 6세)이 왕이 된다. 문제는 영국 왕인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공주의 아들이었다는 것. 그래서 왕위 계승에 딴지를 건다. 자신이 더 정통성이 있다는 명분이다.


에드워드 3세 입장에서는 어차피 외가 측이라 왕이 될 가능성은 높지 않았지만, 보르도와 플랑드르 지배권을 두고 다투고 있는 상황에서 걸고 넘어가기에는 충분했던 것이다. 여기에 영국이 프랑스의 땅 반 이상을 차지했던 적도 있는데(앙주 제국), 프랑스에 계속 빼앗기고 있었고, 영국의 스코틀랜드 점령을 프랑스에게 견제 및  방해(?)당하고 있는 것도 있었다.


이러한 복잡적인 배경이 시작된 것은 그로부터 300년 전, 서기 1066년으로 올라간다. 바로 노르망디 공국의 영국 정복이다.

백년전쟁의 오래된 시작, 프랑스 신하 국가 노르망디 공국의 영국 정복

노르망디 공국의 영국 정복은 백년전쟁의 시발점이라고 부를 수 있다. 노르망디 공국은 노르만인(바이킹 계열)이 프랑스에 세운 프랑스의 신하 국가였다. 이들의 계속된 침입을 받은 서프랑크 왕국의 샤를 3세가 아예 노르만족의 힘을 인정하고 그들을 봉신으로 삼은 것이었다. 당시 노르만족의 추장인 롤로에게 센 강 하류의 노르망디 지역을 주고,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결국 롤로는 911년 로베르(Robert)라는 세례명을 받고 실질적인 독립국을 이룩한다. 그리고 이 롤로의 고손자가 1066년 잉글랜드 왕국을 정복한 기욤(Guillaume), 영어명 윌리엄 1세다.  


미드 바이킹스에서는 노르만 공국을 세운 롤로가 살짝 각색되어 등장한다.


프랑스 왕국(당시 서프랑크 왕국)의 신하인 노르망디 공국이 영국을 점령하자, 자연스럽게 영국 역시 프랑스의 관할권 안에 들어가게 된다. 이미 프랑스의 관할권에 있었던 노르망디 공국은 바이킹이라기보다는 프랑스의 문화와 사상을 답습한 거의 프랑스인의 모습으로 영국에 들어가게 된다. 이때부터 영어는 본격적인 프랑스어의 영향을 받게 된다. 특히 지배계층의 언어는 대부분 프랑스어로 진행, 영국의 고급 단어의 상당수를 이루게 되는 계기를 가져온다.


결혼으로 제국을 만든 영국

이후 윌리엄 1세의 셋째 아들인 헨리 1세는 딸 마틸다의 남편으로 프랑스의 앙주 백작(Geoffrey V, Count of Anjou)을 맞이하게 된다. 일반적인 결혼이라면 딸을 보내는 것이겠지만, 이번 경우에는 사위가 들어오는 데릴사위 형태다.


이 둘의 아들이 바로 헨리 2세(플렌태저넷 왕가)가 되는데, 결국 노르만과 프랑스인의 피가 반반 섞인 셈이었다. 그러면서 노르망디 공국의 남쪽 아래에 있던 프랑스 지역의 앙주 땅을 영국(플렌태저넷 왕가)이 가져가게 된다. 

<프랑스 내 앙주 가문과 결혼 및 혼인을 통해 통치 영역이 넓어진 영국 플랜태저넷 왕가의 앙주 제국. 12세기~13세기까지 이 지역을 통치했으며 남으로는 피레네 산맥, 북으로는 아일랜드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하지만 이후 프랑스 왕 필립 2세에게 계속 영토를 빼앗기게 되고, 이후에 가스코뉴(보르도가 있는) 지방만 남게 되고, 이러한 것이 백년전쟁으로 이어졌다>

프랑스 왕비와 결혼한 영국의 왕. 덤으로 보르도 등 거대한 영토도 챙겨

여기에 헨리 2세(당시는 앙주 백작 신분)는 프랑스의 왕비와 결혼하는 황당 스토리를 가지게 된다. 바로, 프랑스 왕 루이 7세의 왕비 엘레노아와 사랑에 빠지면서, 그녀가 헨리 2세와 결혼하게 된 것이다(1152년). 당시 엘레노아는 29세, 헨리 2세는 19세, 10살의 차이를 사랑으로 극복한 것이다. 게다가  이 엘레노아는 그냥 몸만 온 것이 아니었다. 결혼 지참금으로 아키텐 지방을 가져오게 된다.  바로 이 지역이 아키텐의 중심도시가 바로 세계적인 와인 산지인 보르도인 것이다. 그로부터 2년 후, 헨리 2세는 영국의 정식 왕으로 취임하게 된다. 즉, 이때부터 보르도는 영국의 땅이 된 것이다.


빼앗긴 우리 땅. 프랑스 내 영국 땅을 되찾아야 한다.

헨리 2세는 프랑스 땅에 프랑스보다 더 큰 영토를 가지게 되었으며, 잉글랜드 자체도 거의 통일을 시키는 등 영국의 기반을 잘 다지는 왕이 된다. 그리고 이 헨리 2세에게 아들이 태어나는데, 그가 바로 사자왕 리처드다. 하지만 1199년 왕이 된 지 10년 만에 전장의 왕답게 전사를 하고, 이후 왕은 동생인 존으로 넘어가게 된다.


문제는 존이 형처럼 모험심도 용기도 없었고, 형을 따라 아버지를 배만, 형을 왕의 자리에 앉을 수 있게 한 인물이다. 그러면서 프랑스에 계속해서 땅을 모두 빼앗기게 된다. 노르망디도 아키텐 지역도 보르도 주변을 제외하고는 모두 빼앗긴다.


1180년대 앙주 제국을 건설한 영국(붉은색). 하지만 존 왕이 취임한 이후 계속 땅을 빼앗겨 결국 보르도 및 가스코뉴 지방 외에는 모두 프랑스에 빼앗기게 된다.

결국 권력조차 약해져 귀족들에게 대표가 없는 곳에 세금은 없고, 세금을 거두러면 귀족과 신하의 동의를 얻으라는 대헌장(마그나카르타)에 사인을 하게 된다. 결국 이때부터 영국은 프랑스의 내의 자국 땅을 다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존 왕이 죽고 나서 그의 아들이 헨리 3세로 즉위한다. 하지만, 프랑스인인 프로방스 백작의 딸 엘레오노르와 결혼을 하게 되면서 귀족들에게 미움을 받게 되고, 아버지의 굴욕을 생각해서인지, 대헌장을 무시하는 처사를 진행하자 또 귀족들이 들고일어났다. 그것도 여동생의 남편인 프랑스 출신 귀족 시몽 드 몽프르(Simon de Monfort)였다.  결국 그는 뛰어난 전술로 헨리 3세를 꺾으며 지방의 대표를 불러 의회를 탄생시키고, 상원과 하원이 태어나는 민주주의의 기틀도 마련했다. 알고 보면 영국의 민주주의도 프랑스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은 것이다.


영국이라는 정체성이 시작된 시기. 시몽 드 몽프르가 죽으면서


하지만, 시몽 드 몽프르는 헨리 3세의 조카인 에드워드에게 일격을 당하면서, 전장에서 전사, 이후에 아들인 에드워드가 왕이 되면서 에드워드 1세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그러면서 이제 영국에서는 프랑스어가 아닌 영어를 쓰게 한다. 영국인의 정체성이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는 적이라는 이미지가 강해지기 시작한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 백년전쟁 직전의 영국 스토리


참고로 이 에드워드 1세가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 등장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바로 숙적 스코틀랜드를 크게 격파하고 멜 깁슨이 연기한 스코틀랜드 독립영웅 윌리엄 월레스를 사형시킨 공적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에드워드 1세의 며느리가 이 영화에서 소피 마르소가 연기한 프랑스 공주인 이사벨라다. 이사벨라는 영국의 왕자 에드워드 2세와 결혼하고(1308년), 왕으로 부족했던 자신의 남편을 폐위, 아들인 에드워드 3세를 왕으로 옹립시킨 어마어마한 배포의 여인이었다.   


영와 브레이브 하트에 등장한 에드워드 1세. 멜깁슨이 프리덤을 외칠 때 그는 죽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상은 2년 후에 죽었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 프랑스 공주 이사벨라를 연기한 소피 마르소. 영국 왕과 결혼 100년 전쟁의 씨앗인 왕귀 계승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남편을 폐위, 아들을 왕으로 옹립한다.


에드워드 2세는 여러모로 능력이 없었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도 나오지만, 배넉번 전투에서 스코틀랜드의 로버트 1세에게 처참하게 깨지고,  스코틀랜드에 대한 지배권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부인인 소피 마르소(이사벨라)에 의해 쫓겨나고, 왕위를 아들(에드워드 3세)에게 빼앗길 수밖에 없었던 운명이었던 듯하다.


영국의 적 스코틀랜드 왕은 프랑스로 망명, 프랑스의 반역자는 영국으로 망명

프랑스 공주 이사벨라(소피 마르소 연기)의 아들인 에드워드 3세는 스코틀랜드의 로버트 1세가 사망하자, 또 스코틀랜드에 침공을 감행한다. 그리고 결국 결국 로버트 1세의 아들인 데이비드 2세(1329 ~ 1371)를 왕위에서 쫓아낸다. 문제는 이 데이비드 2세가 프랑스로 도망가서 필리프 6세의 보호를 받게 된 것이다. 에드워드 3세는 그의 송환을 프랑스에 요구했으나 결국 프랑스는 거절한다. 그러자 에드워드 3세도 프랑스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아루 투아의 백작 로베르 3세의 망명을 받아주었고, 여기에 프랑스가 반발하면서 두 왕조의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하였다.


프랑스의 대규모 함선이 도버해협을 지나가다

이러한 상황에서 프랑스의 대규모 함선이 도버해협을 지나갈 일이 생긴다.  프랑스 왕 필리프 6세는 아비뇽 유수를 통해 왕권이 강화된 상황에서 십자군을 준비했지만, 교황의 반대로 이루지 못한다. 이에 필리프 6세는 무력시위를 위해 프랑스 남부인 마르세이유에 집결한 함대를 파리에 가까운 북부 프랑스로 이동시키려는데, 이렇게 이동하다 보니 영국의 앞바다인 도버 해협을 지나가야 했다. 게다가 스코틀랜드 소속의 함선들도 있었으니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도발로 밖에 안보였던 것이다.  


영국 왕 에드워드 3세, 프랑스 필리프 6세에게 선전포고

결국 이러한 상황에서 에드워드 3세는 1336년 필리프 6세 왕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필리프 6세에게 자신이 프랑스 왕이라고 도발을 한다. 필리프 6세도 1337년 무력으로 보르도가 있는 아키텐 영지를 점령하고, 에드워드 3세를 노르망디 공작이라고 말하면서, 적법한 프랑스 왕으로서 몰수한다고 대응한다.


자세히 보면 영국 왕과 프랑스 왕은 친척이었고, 당시 영국 왕은 수차례 프랑스 왕실과 결혼하면서 오히려 프랑스 인에 더 가까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에드워드 3세도 자신을 프랑스 왕이라고 치부했으며, 프랑스 왕의 입장에서 싸웠다는 뉘앙스를 표출했다.


결국, 이 영국과 프랑스의 100년 전쟁은 서로 프랑스 귀족이고 왕이라고 생각한 영국과 프랑스의 왕실끼리의 다툼이었다는 것. 여기에 유럽의 왕실과 교황의 이권이 복잡하게 엮인 전쟁이었다.


몸은 프랑스에 있지만 마음은 영국에 있어


무엇보다도 보르도를 비롯한 술의 주산지가 주역을 담당했다는 것. 영국의 입장에서는 백년전쟁 당시 마지막으로 남은 대륙의 영토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곳에서 나오는 세수가 중요했다. 

지금도 이렇나 역사적 분위기는 남아있어서 보르도를 비롯한 프랑스 술 주산지의 사람들은 "몸은 프랑스에 있느나 마음은 영국에 있다"라는 표현도 남아있다. 


<백년전쟁 1부 그 시작> 2부는 약탈로 치솟는 전쟁, 잔다르크의 등장,  마지막 3부는 각 술 주산지의 특징으로 이어집니다.


출처 : Philippe Contamine 백년전쟁

          사토 켄이치 영불 백년전쟁 슈에이샤


관련 영화 및 드라마 : 미드 바이킹스(2013~

                                  브레이브 하트(1995)

                                  잔다르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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