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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욱 Oct 06. 2020

술 속에 살아남은 프랑스 부르봉 왕조

미국의 버번위스키의 탄생과 프랑스 부르봉 왕조

근대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사건이라면 영국의 산업혁명과 프랑스 대혁명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산업혁명은 그동안 인간의 손과 발에만 의지하던 제조업을 한 순간에 고효율로 만들면서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만들었고, 프랑스 대 혁명은 핍박받던 민중들이 스스로 들고 있어나 성직자, 군주, 귀족이라는 특권층을 없애고, 1000년을 이끌어 온 불평등한 유럽 봉건제도의 끝을 낸 서막이기도 했다. 특히 프랑스 대혁명은 극적인 부분이 많아 수많은 영화 및 소설의 배경지로 등장했다. 어린 시절 나를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게 란 '베르사유의 장미'라는 코믹부터,  사치스러움을 그대로 보여준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2007년), 그리고 프랑스 대혁명을 배경으로 그린 레미제라블 역시 너무나도 유명한 소설이고 최근에는 뮤지컬로도 각색되었다.


영화  카운티영화 마리 앙투아네트(2007년)의 한장면


부르봉 왕조의 몰락인 프랑스 대혁명

이렇게 프랑스 대혁명이 영화 및 소설의 소재로 사용되는 이유는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뒤 바뀌어서다. '짐이 곧 국가'라며 절대적 왕권을 자랑하던 태양왕(Le Roi Soleil) 루이 14세(Louis XIV, 1638년 ~ 1715년)가 죽은 지 겨우 74년 밖에 안 지난 1789년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루이 16세와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귀족이 아닌 시민들에 의해 단두대로 사라지게 되는 초유의 일이 발생한다. 프랑스의 절대 왕정을 지켜온 부르봉(Bourbon) 왕조의 몰락이라고 볼 수 있다.


술의 명칭으로 살아있는 부르봉 왕조?

그런데, 이 부르봉(Bourbon) 왕조의 이름이 살아있는 곳이 있다. 그것도 저 멀리 대서양 건너에 있는 미국 술의 명칭이다. 바로 버번(Bourbon) 위스키다. 버번 위스키는 옥수수 51% 이상을 사용해서 만드는 위스키로 새 오크통에서 숙성을 해야 하는 미국 스타일의 위스키다. 그런데 이 칭호가 생뚱맞게도 부르봉 왕조에서 온 것이다. 이유는 프랑스가 미국의 독립혁명을 도와준 최고의 도우미였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이 영국을 대상으로 독립전쟁을 치를 당시, 미국 독립군에는 변변한 무기가 없었다. 이유는 영국이 공업 시설을 미국에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늘 하나라도 다 영국에서 수입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독립전쟁을 벌일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 특별한 우군이 등장하니 바로 프랑스였다. 프랑스는 미국에 적극적으로 무기와 물자, 그리고 군인들을 보낸다. 그리고 그리고 사실상 미국 독립전쟁을 종결시켰다는 버지니아주의 요크타운 전투(Battle of Yorktown/1871)에서 미국 독립군은 프랑스의 로샹보 장군 부대과 연대, 영국군 7,000여 명을 포위하며 항복을 받아냈다.


영국이 미웠던 프랑스. 결국 엄청난 채무국가 되어

프랑스가 미국 독립군을 도와준 것은 간단했다. 미국과 인도 등에서 치열한 식민지 쟁탈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 여기에 18세기의 세계대전이라고 불리는 7년 전쟁에서 프랑스는 영국에게 지게 된다. 그래서 당시 뉴프랑스로 불렸던 캐나다의 퀘벡 지역과 인도에서의 지배권도 영국에게 빼앗기게 된다. 이렇다 보니 정말로 영국 자체가 꼴 보기도 싫었고, 무엇보다 그들의 세력이 너무 강해지는 것을 견제할 필요도 있었다.


버번 위스키는 한마디로 부르봉 위스키

전쟁에서 이긴 미국 정부는 프랑스 부르봉 왕조에게 감사의 표현을 위해 1785년, 토머스 제퍼슨의 제안을 받아 버지니아 서부의 광대한 지역을 부르봉(Bourbon)이라고 칭하게 된다. 현재의 켄터키주 버번 카운티의 시작이다. 당시에 이 지역의 작물은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어서 생명의 식물이라고 불리던 옥수수였고, 이 옥수수를 통한 위스키가 본격적으로 나오면서 버번위스키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프랑스의 왕조가 위스키의 명칭으로 다시 되살아 난  것이다.


도움 준 곳은 망하고, 도움받은 곳은 흥하고

버번 위스키가 처음 나온 것은 1789년으로 알려져 있다. 엘리야 크레이그(Elijah Craig 1738/1743 – May 18, 1808)라는 목사이자 교육자인 인물이 버번 위스키의 시초라는 것. 그는 1789년에 켄터키에 증류소를 세웠고, 헤븐 힐(Heaven Hill)이라는 회사는 그를 켄터키 버번 개발자로 언급했다. 그래서 헤븐 힐의 제품을 보면, 그를 버번의 아버지(The Father of Bourbon)로 부르고 있다.


최초의 버번 위스키라고 불리는 엘리야 크레이그. 엘리야 크레이그는 버번의 아버지로 말하곤 한다. 출처 위키피다아


흥미로운 것은 버번 위스키가 생겼다는 바로 1789년이다. 미국에는 조지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던 해. 하지만 프랑스는 대혁명이 일어나면서 부르봉 왕조의 종말을 고하던 시기였던 것이다. 도움을 준 왕조는 망하고, 도움을 받은 나라는 흥하게 된 상황이었다. 참고로 버번 카운티에서는 버번 위스키 거의 만들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하트필드(Hartfield & Co.)라는 한 곳에서만 만든다. 조례로 금주법을 시행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버번 위스키 와일드 터키. 출처 와일드 터키 홈페이지
프랑스 식민지 곳곳에 남은 그들의 흔적

버번이라는 이름은 켄터키주에만 있지 않다. 뉴올리언스에는 버번 스트릿도 있으며, 한때 프랑스의 식민지였으며, 나폴레옹이 미국에 팔아버린 루이지애나 등의 명칭은 아예 루이 14세의 이름에서 유래하기도 했다. 이렇게 보면 부르봉 왕조 입장에서는 나름 남는 장사가 아니었나라는 느낌도 있다. 어차피 세상의 모든 일은 이름(존재감)을 남기기 위해 살고 있기 때문이다.



PS: 현재 프랑스 부르봉 왕조는 비록 루이 16세는 처형되지만 이후에 앙리 5세까지 포함 1830년까지 유지됩니다. 더불어 현재 스페인의 국왕인 펠리프 6세는 루이 14세의 후손으로 부르봉 왕조 계열이기도 합니다.

버번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존재합니다. 19세기 뉴올리언스의 버번 스트릿에서 많이 팔려서다 등등입니다. 


<참고 - 버번 위스키의 기준>

미국에서 제작

최소 51% 이상의 옥수수를 증류에 사용

반드시 불에 태운 새 오크통만을 이용

증류 시 알코올 수가 160 프루프(80%)를 넘지 않는 것

숙성을 위해 오크통에 봉입 시 알코올 도수는 125 프루프 (62.5%)를 넘지 않을 것.

오크통을 개방하고 병에 봉입 시 위스키 도수가 80 프루프 (40%)를 넘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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