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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욱 Oct 17. 2020

캡틴큐가 추구한 럼주, 원래 어디 술일까?

해적의 술 럼주의 슬픈 역사

캡틴큐가 추구한 술 '럼주'

아직 위스키 등이 정식으로 수입되기 전인 1980년, 한국의 주류문화에 깊은 인상을 남기는 술이 하나 등장한다. 드넓은 바다에 외꾸눈의 해적이 등장, 마치 카리브해를 주름잡는 럼주의 모습으로 등장한 술, 바로 캡틴큐다. 당시 광고를 보면 럼(Rum)주라고 말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럼주는 일부만 들어있는 것이고, 나머지는 주정에 인공색소, 그리고 각종 조미료로 맛을 낸 럼 스타일의 소주였다. 한마디로 무늬만 양주였던 셈. 하지만 당시 위스키에 비해 저렴했던 이 술은 출시되자마자 1000만 병이 나가는 등, 메가 히트를 친다.


캡틴큐. 2015년에 가짜 양주의 원료가 된다는 이유로 단종된다. 숙취가 심해 다음날 못 일어나고 다다음날 일어났다고 해서 미래로 보내준다는 술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출처 세계일보



그렇다면 이 럼주는 원래 어느 나라 술일까? 단순히 해적의 술이기만 한 것일까? 기본적으로 럼주는 사탕수수에서 나오는 달콤한 진액, 즉 설탕물을 가지고 발효 후, 증류해서 만드는 술이다. 다만 산업이 발달하며 단순히 사탕수수의 진액이 아닌 설탕을 만들고 남은 폐당밀을 가지고 만들면서 원가를 더욱 낮추게 된다. (참고로 사탕수수는 2015년 기준, 총 생산량 18억 7천만 톤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재배하는 작물이며, 2위는 옥수수로 9억 7천만 톤이다)


원래 사탕수수는 남아시아가 본산지였다.8세기 무렵 아랍 무역상들이 인도로부터 들여왔고,10세기에는 메소포타미아 전 지역과 북아프리카 등에서 재배를 했다. 아프리카에서도 사탕수수를 재배해 보려고 했지만, 말라리아 등 전염병이 무서워 쉽게 접근하지 못했다. 


이러한  사탕수수 재배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은 바로 신대륙 발견. 사탕수수 자체가 풍부한 햇빛과 많은 물, 그리고 추위에는 약했다는 것을 안 콜럼버스는 카리브해 아이티에 심기 시작했고, 이후에 서양 열강 등은 앞다퉈 이 지역에 사탕수수를 심기 시작했다. 유럽에 설탕을 수출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18세기 전후로  악명 높은 삼각무역이 발생한다. 바로 노예무역이다.


1980년 대 캡틴큐 광고


카리브해 주변의 서인도 제도에서는 대량으로 설탕을 제조 및 수출하면서 설탕을 정제하고 남은 폐당밀이 많이 생기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일손이 많이 필요했는데, 아메리카 원주민은 일하며 대부분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유럽인이 가져온 천연두 때문이었다. 이렇게 부족해진 일손을 아프리카 노예로 충당했던 것이다. 


럼을 통한 삼각무역의 시스템은 간단하다. 아프리카에서 노예선이 이 서인도제도에 노예를 보내주면, 그 노예를 싣고 왔던 배에 당밀을 쌓아 미국의 뉴잉글랜드로 보냈다. 그러면 그 당밀을 가지고 럼주를 만들고, 그 럼주는 다시 유럽 및 아프리카로 노예 대금으로 쓰여졌다. 노예선은 이렇게 삼각무역을 이어갔다. 즉, 럼주는 해적의 술도 있지만, 노예선의 술이고, 미국이 많이 만든 만들고 마시던 술이었다.


권투 시합에서의 그로기는 럼주를 마신 상태

그렇다면, 왜 미국은 럼주를 많이 만들어 놓고 지금은 럼주의 종주국을 자처하지 는 것일까? 실은 이것은 미국의 독립전쟁과도 연결이 된다. 당시 전 세계를 돌아다녔던 영국의 해군은 늘 지참하는 술이 바로 럼주였다. 원래는 맥주를 공급하고 있었지만, 설탕 혁명이 일어난 이후에 저가의 럼주에 눈이 더 갔다. 맥주와 같은 발효주와 달리 도수가 높아(40도 이상) 상하지 않았고, 가격은 당연히 저렴했으며, 괴혈병 예방에 좋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수가 너무 높아 해군 들 사이에서 문제가 많이 생긴다. 1740년 영국의 제독 배넌 (Monument of Admiral Edward Vernon) 은 럼을 4배로 희석해서 병사들에게 제공하라고 한다. 하지만 늘 독한 술을 즐기던 병사들 입장에서는 볼멘소리가 나왔고, 이러한 도수 낮은 술을 마시고 취한 것을 가지고 배넌 제독이 입던 패션(그로그램(Grogram)이라는 천)을 빌어 올드 그로그(Old Grog)라고 놀리게 되었고 나중에는 물을 섞은 럼주를 그로그(Grog)라고 부르게 된다. 그리고 후에 이 단어가 권투시합에서 그로기(groggy) 상태라는 거의 쓰러지기 직전이라는 용어로 사용되게 된다. 럼주와 물의 비율은 초기 1 대 4 정도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까지는 1 대 3,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1 대 2까지 내려갔다. 흥미로운 것은 벌칙이 있었다는 것. 그것은 럼주를 6배로 희석해서 마시는 것이었다.


미국이 럼주를 대표 술로 언급 안 하는 이유

결국 미국이 그토록 생산을 많이 하던 럼주는 미국에서의 수요는 줄게 된다. 바로 미국 독립전쟁 당시 미국이 싸웠던 상대가 영국의 해군이었고, 그들이 늘 지참하던 술이 럼주였기 때문이다.


미국의 독립전쟁 전, 영국은 프랑스와 전쟁을 하느라고 돈이 필요했던 시점에서 서인도제도에서 가지고 오는 당밀에 엄청난 세금을 부과하게 된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프랑스에서 생산된 당밀이 밀수입된 형태로 들어오고 있었고, 1764년, 당밀의 밀수입을 엄격하게 규제한다.


이 조례가 제정된 시점 전후로 영국 본국과 미국 식민지간의 대립이 심해져 결국 독립전쟁으로도 이어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사탕수수를 이용한 럼주 대신에 등장한 술이 바로 옥수수를 베이스로 위스키, 버번 위스키의 등장이다. 그리고 이 버번 위스키가 마치 미국을 대표하는 증류주가 되었다.


참고로 이 럼주는 1970년까지  영국 해군의 쏘울 술로도 이어진다. 나폴레옹과의 트라팔가 해전에서 전사한 그의 시신을 럼주에 담아 영국으로 보냈다고 말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결국, 럼주는 유럽 열강의 식민지 지배로 태어난 술. 암울한 시기에 태어났기에 차라리 해적의 술이라는 이미지가 좀 더 낭만적일 수도 있겠다.


*KBS 라디오 김성완의 시사야에서도 소개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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