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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욱 Nov 13. 2020

회식의 냄새가 나는 초록색병 소주

소주병의 역사

소주만큼 한국에서 애환적으로 느껴지는 술이 있을까? 힘들고 지칠 때, 속상할 때, 오랜 친구들과 한잔 할 때도 늘 손이 가던 술이 실은 소주였다. 한편으로는 너무나도 마시기 싫은 상황에서 상사 눈치, 선배 눈치를 보고 억지로 마신 술도 소주였다. 늘 벌칙으로 마시던 술도 소주였으며, 생일 파티라도 하면 소주에 먹다 남은 음식물까지 넣어가며 희한한 폭탄주를 만들어 준 것도 소주다. 오죽하면 여기에 맥주까지 타 먹이면서 소맥이라는 희한한 폭탄주 문화까지 만들었을까. 그래서 혹자는 초록색의 소주병을 보면 회식의 냄새가 난다고 이야기까지 한다. 그만큼 초록색의 소주병은 우리 국민에게 깊은 잔상을 남기고 있다. 그렇다면 이 소주병은 어쩌다가 초록색이 되었을까? 누가 지시라도 한 것일까?


OB맥주를 가진 두산, 강원도 소주 회사를 인수하다

초록색병 소주의 역사는 두산이 소주 기업을 인수하면서였다. 1993년, 강릉의 경월소주를 인수하면서 새로운 브랜드가 필요했고, 강원도의 푸른 녹음과 청정 지역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당시 두산이 자회사로 가지고 있던 회사는 바로 OB맥주. 두산은 맥주 산업에 이어 소주로 진출하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론칭한 제품이 바로 '그린 소주'였고 초록색 병 소주의 시작이었다.


당시 초록색병이 선택된 이유는 또 다른 배경이 있었다. 당시 환경에 대한 이슈가 부각되던 상황. OB맥주의 계열사인 두산전자가 1991년 낙동강에 유해물질인 페놀을 흘려보내 낙동강 수원 전체가 난리가 났었던 것. 이에 당시 경쟁사인 조선 맥주는 갑자기 기존의 마케팅 포인트를 버리고, 지하 150m 암반수로 만든다는 하이트 맥주를 출시하게 된다. 환경을 강조하며 두산(OB맥주)과 철저히 차별화를 진행한다는 것이 목적이었다.


기업 이미지 개선이 필요했던 두산

페놀 유출과 하이트 맥주에 타격을 입은 두산은 환경을 생각한다는 기업 이미지가 필요했고, 강원도의 경월 소주를 인수하면서, 제품명은 '그린', 병 색깔까지 '초록색'으로 결정한다. 그리고 이러한 '그린 소주'는 대 성공을 거두게 된다. 1999년 단일 제품으로 30%의 마케쉐어를 가져가며 소주 1위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뒷배경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진로의 공도 있었다는 평가도 있다. 1998년 진로가 참이슬을 출시하면서 병 색깔을 '그린 소주'처럼 초록색으로 바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촉매제가 되어 '그린 소주'의 이미지가 더욱 부각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참이슬과 그린 소주와의 마케팅 전쟁

이러한 과정에서 '참이슬'과 '그린 소주'와 진로는 광고 전쟁을 벌이게 된다. '그린 소주'는 '참이슬'을 흘러간 노래, 지나간 소주에 비유했고, 진로는 그린 소주를 '왜 그런 소주를 마시는지 모르겠다'라고 광고를 제작, '그린'을 '그런'으로 비꼬는 상황까지 온 것이다..


모두가 초록색병을 쓰게 된 소주 시장

이후 대한민국 소주 1위를 경쟁하는 업체들이 모두 초록색병을 쓰니 나머지 군소업체들도 병의 색을 바꾸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2003년, 전국의 소주 업체 10곳은 생산자 책임 재활용제도를 만들고, 소주병을 함께 재활용하는 것에 동의를 한다. 즉, 재활용 과정에서 진로 소주병이 '그린 소주'가 되고, 그린 소주병이'진로 소주'가 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면서 녹색병 소주가 가장 많이 만들어지고, 기본 공병이 되다 보니 가장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 제품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소주 원가를 생각한다면 녹색병을 그대로 쓰는 것이 제일 유리한 상황이 된 것이다.


 

그린 소주와 1998년에 나온 참이슬 초록색 병.

업계 모든 소주 업체들이 초록색으로 바꾸다 보니, '그린 소주'는 더욱 차별화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린 소주를 더욱 업그레이드한 제품을 출시하는데, 그것이 바로 '산소주'였다. '산소주'의 특징은 바로 소주에 녹차를 넣었다는 것. 하지만 '산소주'는 기존의 소주들과 지나친 차별화를 진행, 점유율을 계속 떨어트리며 대실패를 거듭,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2009년 소주 사업을 롯데주류에 매각하게 된다. 모델이 여성이 아닌 최민수 씨였다는 분석도 있으며, 지나친 환경 마케팅의 실폐 사례라는 분석도 있다. 


산소주


두산이 소주 산업에 뛰어들고, 진로는 맥주 산업에 뛰어들고


그렇다면 왜 두산은 이렇게 매각해 버릴 소주 산업에 왜 뛰어들었을까? 실은 강력한 경쟁사에 대한 견제이기도 했다. 90년 대표 주류 기업이라면 하이트 맥주(당시 조선 맥주), 그리고 소주에는 진로가 있었다. 그런데 이 사업은 오랜 경쟁사인 하이트 맥주를 이기기 위함이 아니었다. 겨냥한 것은 바로 진로 소주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진로가 두산의 텃밭인 맥주 시장에 진출한 것이다.  1991년, 미국 쿠어스사와 합작을 하여 진로 쿠어스란 회사를 설립, 1994년에 제품 출시까지 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현재도 한국 맥주 1위인 카스다. 진로가 카스로 새로운 사업에 진출, OB가 위협을 받게 되자, 역공으로 소주 사업에 진출한 것이다.


2006년 두산은 산소주를 버리고  '처음처럼'을 탄생시킨다.  처음처럼의 전신이 바로 '그린 소주'가 되는 것이다. 진로의 맥주였던 '카스'는 어느덧 OB의 주력 제품이 되고, ' 참이슬'은 하이트맥주에 인수되면서 각각의 주인이 바뀐 상황이다. 그리고 2009년 두산은 소주 관련 사업을 롯데주류에게 매각하게 된다. 기업은 사라졌어도 제품은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일본에서 판매되는 훈와리 경월. 나중에 이 훈와리(ふんわり) 경월은 순하리라는 제품을 만들게 된다 
순하리 브랜드를 만들어 낸 경월의 훈와리 소주


흥미로운 것은 아직 '경월 소주'도 살아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아니다. 일본이다. 게다가 일본 전체 희석식 소주 판매율 2위를 기록할 만큼 인기다. 롯데주류가 경월 브랜드로 꾸준히 수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년 전 대 히트를 친 순하리 소주가 바로 이 경월에서 온 것이었다.  경월 제품 중에 도수를 낮추고 과실 맛을 넣은 훈와리(ふんわり、일본어로 사뿐히, 부드럽게 등)라는 제품이 있었기 때문. 사라진 한국 소주가 다른 이름으로 등장한 케이스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경월 소주'를 이제는 한국에서 부활시켜보면 어떻까? 이왕이면 '경월 소주와' '그린 소주' 두 버전이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골라 마시는 재미도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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