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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욱 Sep 04. 2021

조선의 도공과 일본 가고시마 소주

일본 도자기 문화를 이끈 조선의 도공

일본 가고시마 고구마 소주와 조선의 도공



일본에서 가장 대표적인 소주라고 한다면 아마 '고구마 소주'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전국에서 생산되는 고구마의 약 20%나 소주 제조에 사용하고 있으며, 와인용 포도처럼, 백고구마, 자색 고구마, 오렌지색 고구마 등 다양한 품종으로 맛과 향을 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고구마 소주의 대표적인 생산 지역은 일본 본토 최남단의 가고시마현. 원령공주의 배경지로 유명한 야쿠시마를 품고 있으며, 역시나 일본 고구마의 최대 생산지이기도 하다. 일본에서는 고구마를 사츠마이모(薩摩芋)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가고시마의 옛 이름인 사츠마(薩摩)에 '마'를 뜻하는 이모(芋)가 합쳐진 말이다. 참고로 고구마는 영조 때 대마도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대마도의 고구마는 고코이모(孝行芋)라고 불리는데, 이모(芋)를 '마'로 바꾸면 고구마와 거이 흡사한 발음이 된다.


가고시마 소주를 만드는 모습. 항아리에 넣고 섞는 작업을 하고 있다. 재료인 고구마가 오른쪽에 보인다. 하마다주조에서 촬영했다.

가고시마의 소주 기술은 대한해협에 위치한 대마도, 이키섬과 달리 한반도에서 건너갔다는 주장은 보이지 않는다. 중국과 왕래가 많았던 오키나와 유래설이 가장 유력하다. 당시만 하더라도 오키나와는 유구왕국(琉球王国)이라는 독립국이었다. 오키나와에는 이미 소주 기술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성종실록 10년(1479년)에도 유구왕국에 표류했던 제주인 김비의 등의 언급에 따르면 소주와 같은 술이 있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런데 이 유구왕국을 가고시마의 사츠마번(薩摩藩)이 1609년 복속시킨다.  총 3000명, 선박 80여 척의 함대로 침공, 전투는 사츠마번의 승리로 끝났다. 이후 오키나와의 소주와 고구마도 같이 들어왔다.


임진왜란의 또 다른 이름 '도자기 전쟁'

그렇다면 가고시마의 고구마 소주는 우리와 무슨 인연이 있을까? 술을 빚을 때 가장 중요시하는 것이 있다. 곡물, 누룩, 물, 그리고 그것을 담아 발효 및 숙성을 담당하는 옹기다. 가고시마의 소주는 전통적으로 옹기에 담아 발효 및 숙성을 한다. 흙으로 빚은 옹기는 내부 온도를 유지하며, 안정적인 발효 및 숙성에 도움을 주고 좋은 맛을 내게 한다. 그런데 이곳의 옹기 문화가 우리 역사와 연결되어 있다. 바로 조선에서 납치된 도공들이 영향을 줬다. 우리에게 뼈아픈 역사인 임진왜란, 정유재란이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일본의 연호를 붙여 임진왜란을 분로크노에키(文禄の役), 정유재란은 케이쵸노에키다(慶長の役)라고도 부르지만 또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 바로 도자기 전쟁(焼き物戦争)이다. 그만큼 도자기에 사활을 걸었다는 의미다.


조선의 도자기에 혈안이 된 이유

당시 조선을 침공한 일본의 다이묘(大名, 일본 지방 영주)들이 도자기를 찾는데 혈안이 된 이유가 있었다. 임진왜란 직전에 승려이자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스승인 센리큐(千利休)가 일본 다도를 정립했고 자신들의 차(茶)를 담을 도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전까지는 화려한 연회 및 형식을 중요시했다면, 이제는 내용과 정신에 치중한 차문화로 바뀌게 된다.  다도를 통해 불교에서 선(禪)의 경지에 이른다는 이른바 ‘와비차(わび茶)’문화이며, 이는 화려함에서 소박함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당시 조선은 성리학을 이념으로 내세우며 화려함보다는 소박하고 간결하며, 색감이 적은 문화를 택하게 되는데, 이것이 당시 찻사발로 이어진 것이다.


새로워진 일본의 다도 입장에서는 중국의 도자기는 너무 화려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의 도자기에 관심을 가졌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0여 년 전부터 조선과 무역거래를 하면서 조선의 도자기가 유명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렇다 보니 오죽하면 조선의 막사발은 순금보다 더 최고의 선물이자 가문과 위세를 나타내는 집기가 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하사한 조선의 막사발이다. 오다노부나가는 토요토미 히데요시 이전에 실질적으로 일본을 통일했다고 평가받는 인물. 당시 자신의 적대세력이었던 시바타 가쓰이에(柴田勝家)를 회유하려고 준 막사발은 경남 하동의 것으로 판명되었고, 후에 일본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결국 이 막사발을 받은 시바타 가쓰이에(柴田勝家)는 오다노부나(織田信長)가의 중요한 가신이 되어 어마어마한 활약을 한다. 시바타이도(柴田井戶)라고 불리는 이 찻잔은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하사했다는 이도다완(井戸茶碗). 경남 하동의 제기라고 학계는 보고 있다. 이도라고 부르는 이유는 일본 내 소유자의 가문명(井戸)에서 유래했다고 본다.


이때부터 조선식 찻사발은 이도다완(井戸茶碗)이라고 불리며, 일본인의 동경 의식을 불러왔다. 오죽하면 다이묘들끼리의 전쟁도 이 찻사발에 토요토미 등의 직인이 있는 모습을 보여주면 공격이 멈추기도 했다. 우리에 비유하면 어명, 또는 옥쇄와 같은 느낌이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 손재주가 있는 자, 데리고 와라
사가현에 있는 이삼평의 비. 일본 도자기의 시조라고 새겨져 있다. 출처 위키피디아

그래서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의 도공을 끌고 오라고 명령을 한다. 토요토미가 사가현의 다이묘였던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에 보낸 기록에는 "조선인 포로 중 세공을 하는 자와 손재주가 있는 자는 여자라도 일을 시킬 수 있도록 상부로 보내줄 것"이라고 나와 있다. 이렇게 끌려간 이가 조선의 기록은 10만, 일본의 기록은 2만~3만 정도다.


이렇게 명령을 적극적으로 수행한 다이묘가 규슈 지역의 다이묘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그리고 가고시마현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다.


나베시마가 데리고 간 이삼평(李參平·?~1655)은 사가현에 자리 잡으며 일본 3대 자기라고 하는 아리카 도기(有田焼), 이마리 도기(伊万里焼)를 탄생시킨다. 또 한국에만 발견되었던 원료인 고령토를 발견하면서 일본 도자기의 시작을 연다. 


참고로 일본 사가현에 있는 그의 비석에는 임진왜란 당시에 일본군에 매우 협력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후대에 쓰인 것이라서 해석이 다르긴 하지만, 납치보다는 따라간 것이라고 일본 측은 주장한다.



가고시마로 간 조선의 도자기 '사츠마 도기(薩摩焼)'


나베시마로 인한 도자기에 이마리도기(伊万里焼)가 있다면, 가고시마 다이묘인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가 납치한 도공으로 탄생한 것이 가고시마의 사츠마도기(薩摩焼)다.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는 남원성 외곽에서 살던 도공 40여 명을 집단으로 사로잡아 돌아온다. 대표적인 인물이 박평의, 김해, 그리고 심당길이다. 당시 시마즈는 가고시마의 나에시로가와(苗代川)에 조선인 집단촌을 이루게 하였고, 메이지 유신 전까지 한국 옷을 입고 결혼도 마을 사람끼리 하면서 전통적인 한국 도자기를 생산하게 했다. 그리고 일반 평민이 아닌 사무라이급으로 대접했다. 그들이 만든 도자기는 네덜란드로 수출을 하게 되며 막부에 막대한 수입을 남기게 된다. 이렇게 지켜온 도자기는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 출품, 유럽인에게 큰 감명을 준다. 이렇게 지켜온 도기 문화는 사츠마 도기(薩摩焼)라는 독특한 특징을 가지게 되고, 소주의 발효 및 숙성옹기도 사츠마도기의 영향을 받았다.



한국의 풍속 그대로 지키고 있는 사츠마도기

사츠마도기는 지금도 한국의 풍속을 그대로 지켜가고 있다. 심당길의 15대 후손인 심수관의 가마는 한국의 풍속을 그대로 지켜가고 있다. 박평의로부터 이어온 아라키도요(荒木陶窯)의 돌림판은 한국만의 스타일인 시계 반대방향인 왼쪽 돌림판을 사용한다. 여기에 천연 유약만 사용하는 전통을 지켜가고 있다.

가고시마 소주 공장에서 숙성되는 고구마 소주. 일본식 청주인 사케와 달리 항아리를 많이 사용한다.

여담이지만 박평의의 후손 박무덕은 일본의 태평양 전쟁 당시 외무대신까지 올라간다. 유명한 도고 시게노리(東郷茂徳)다. 일제강점기 그는 외교관으로 활약하였고, 주 독일 대사, 주 소련 대사를 역임한다. 하지만 도조 히데키의 내각에 외무 대신으로 입각, 미국과의 태평양 전쟁을 피하려고 했지만 결국 막지 못하고, 한 때 해임되었으나 전쟁 말기에 다시 취임, 결국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이면서 일본 항복의 결정짓는데 역할을 한다. 다만, 하지만 그는 A급 전범으로 구속되면서 옥살이를 하다가 병사했다.


조선의 도공 심당길 후손인 심수관가가 운영하는 심수관가 대문. 한국 명예대사도 역임했다. 가고시마 필수 방문 코스.


임진왜란은 우리에게 참 많은 상처를 남겼다. 왕이 수도를 버리고 도망을 갔고, 전쟁에서 이긴 영웅은 사형을 당할 뻔했으며, 전국이 왜군의 손에 유린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일본 역시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내전에 휩싸였으며 결국 임진왜란 때 선봉장으로 참전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카토 기요마사(加藤清正)등 상당수의 장수들은 본인 또는 직계 가족이 대부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을 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에게 가문의 멸문지화를 당하게 된다. 조선에서 일본으로 통신사를 보낼 수 있었던 이유도 일본의 지배층이 완전히 바뀌는 과정에 있었기 때문이다.


가고시마는 2015년부터 3번에 걸쳐 다녀왔다. 고구마를 고부가가치로 활용하는 그들의 모습에 참고할 사항이 있어서였다. 당시 고구마 소주 양조장을 견학하는데 안내하는 일본인 도슨트가 고구마 소주 숙성옹기를 보고 이렇게 말을 했다. 조선의 도공 덕분에 가고시마 소주가 더욱 발전했다고. 그리고 일본인으로서 한국인에게 죄송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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