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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욱 Nov 22. 2018

전통주 산업에 깃든 일본식 양조 용어

우리 전통주 문화의 재정립을 기대하며

전통주 산업 속에 녹아 있는 일본식 양조 용어들


최근에 어느 한 유명 연예인이 일본 제국주의를 상장하는 깃발 모양이 들어간 사진을 자신이 SNS에 올렸다가 상당히 문제가 되었다. 해당 연예인은 몰라서 그랬다는 해명을 했고, 그 해명은 지금도 논란이 가시지 않은 상태다. 알고 보니 해당 연예인 말고도, 많은 연예인들이 실수(?)로 올렸다는 기사도 많이 접할 수 있다.


어릴 적 건축업계에 종사했던 친인척의 전화통화가 기억난다. 늘 업무상 이야기를 하면, 못 듣던 용어들이 자주 튀어나왔다. 대표적으로 공구리를 쳐야 한다, 아시바가 부족하다, 삿보도가 필요하다 등의 이야기였다. 나이가 조금 들어 알고 보니 모두 일본식 건축 조어. 공구리는 콘크리트의 일본식 발음이고, 아시바 역시 발을 디디는 발판이란 의미로 한자로 족장(足場)이란 일본 발음, 삿보도도 건축 시 쓰이는 지지대 중 하나였다. 안타까운 것은 그 당시만 해도 이것들이 모두 일본식 조어였다는 것을 잘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 남자들의 향수가 진하게 남아있는 4구 당구의 용어 역시 20~30년 전에는 일본식 용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사람도 많았다. 이러한 모습은 한국의 술 산업도 피해가질 못했고, 결국 일본식 조어는 전통주 산업에도 들어와 버린다. 그렇다면 무조건 일본식 조어를 무조건 배척해야만 하는 걸까? 오늘은 한국의 막걸리와 전통주 산업 속에 있는 일본식 조어에 대한 배경과 고민을 풀어본다.


조선주조사에 기록된 일제 강점기 시절의 청주 양조장 모습. 마산과 부산, 그리고 군산에 많이 모여있었다. 사진 출처 완주 술테마박물관

140년 전부터 세워진 일본식 청주공장. 일본식 양조 용어를 퍼트린 결정적 계기

1876년, 한국은 개국이란 명분으로 최초로 근대 국제법을 토대로 한 조약을 맺게 된다. 조약명은 조일 수호 조규(朝日修好條規). 이른바 강화도 조약으로 계약 당사자는 알다시피 일본이었다. 표면상의 명분은 조선 개국이었지만, 일본의 강압적인 상황에서 이뤄진 불평등 계약인 것은 이미 학창 시절 국사시간에 배운 이야기이다. 이로 인해 일본은 한국에서 다양한 경제활동을 할 수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일본인이 조선 내에서 일본 화폐를 사용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일본 내 수출입 상품에 대한 무관세 등이 적용되었다.

이러한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11년 후, 한국 최초로 일본 자본에 의해 일본식 청주 공장이 부산에 세워진다. 1887년에 세워진 후쿠다 양조장이다. 초대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는 이 회사의 제품에 '코요(向陽)'라는 별도의 제품명까지 지었다고 하며, 결과적으로 청주 공장의 효시가 되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1905년 을사늑약 전후로 일본의 청주 자본이 끊임없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지역은 부산뿐만이 아녔다. 1904년 마산을 시작으로 군산 등으로 퍼져나가며, 한국식 청주는 산업적으로 등장해보지도 못한 채 수십 개 이상의 일본식 청주가 한국의 고급 청주 시장을 장악해버렸다. 당시 근무자를 보면, 중요한 원천 기술자 외에는 모두 현지인인 한국인이었을 터. 이들을 통해 서서히 일본식 양조 용어가 한국의 술 산업에 밀착되기 시작한다.

  
 

다양한 일본식 청주 레이블. 모두 한국에서 생산된 청주 디자인이다


한국 본래의 술 문화인 가양주는 금지로 전환. 1995년 복원

한국의 술 산업은 일본의 노동집약적인 양조장 체계와는 다른 가양주, 즉 산업화한 술의 모습보다는 집에서 어머니들이 빚는 술이었다. 다양한 문헌을 통해 그 문화를 발전시켜왔지만, 1909년 주세법 공포, 1916년 주세령에 따라 주종에 따라 알코올이 정하는 등 한국의 술이 획일화되고, 자가소비용만 허가제로 진행되었다. 이러다 보니 반발도 심했다. 1921년 전남 보성향교에서는 문묘용 제주(祭酒)를 빚어놨는데, 주세령 위반 밀주로 규정, 봉인 압류한데 유림들이 거세게 항의, 10명이나 구속된 사건이 일어났다.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는데, 이 중 젊은 유림 2명은 유림대회를 개최하고, 전국 향교에 제주(祭酒) 압류 사건을 격문을 통해 돌렸다.


이후 일제는 1934년 주세령 개정을 통해 향교 제주 임의 양조 등은 허가했으나, 1934년 자가소비용 주류제조 면허제는 아예 폐지한다. 이제 개인은 절대로 술을 빚어서는 안 되는 시기가 온 것이다. 해방 이후로도 세수확보를 위해 한국의 가양주 제조는 금지되었으며, 자가 양조, 자가소비에 한해 1995년부터 허용, 가양주 문화는 겨우 이때부터 다시 시작하게 된다.
 

일제강점기 시절에 쓰인 일본식 청주 착즙기. 출처 완주 술테마박물관

막걸리 양조장에 들어간 일본식 양조 용어

일본식 청주 공장이 한국의 고급술 시장을 장악하니, 한국의 막걸리 양조장 역시 일본식 양조장을 많이 벤치마킹하게 된다. 그래서 지금도 오래된 양조장은 일본의 적산가옥 형태로 보존된 곳이 많다. 무엇보다 술 설비 부분은 일본식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설비를 통해 술 관련 제조에는 일본식 용어가 많이 쓰이게 된다.


대표적으로는 효모를 증식하는 과정의 주모(酒母), 추가 발효를 하는 과정의 사입(仕込), 술을 아직 짜지 않은 상태의 모래미(일본명 もろみ) 등이 일본어를 어원으로 한 것을 보인다. 가양주에서는 주모를 밑술로, 사입을 덧술로, 모래미를 술덧으로 표현한다. 경기도 농업기술원 이대형 박사에 따르면 일본의 누룩 기술인 입국(粒麹)은 해방 이후에 한국의 막걸리 양조장에 도입되었다며, 해방 전에는 강제적으로 한국의 전통주 문화가 단절된 것은 사실이나, 해방 이후에는 다양한 기술 도입 및 벤치마킹을 통해 발전해 온 것은 부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전통누룩 발효모습

우리 것이 무엇인지 알고 구별해 낼 수 있는 기준이 필요

근대의 술 역사를 보면, 결국은 일제 자본에 의한 국내 청주 공장의 번성, 가양주 말살, 그리고 해방 이후에 다양한 일본 술 기술의 벤치마킹을 통해 이뤄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일본식 양조 용어를 쓴다고 해서 무조건 나쁘다고 배척은 할 수 없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의 시작이 어디인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순수한 우리말인지, 일본에서 온 말인지, 또는 중국 또는 서양에서 온 말인지는 알고 써야 한다는 생각이다. 마치 순수한 우리 전통주 용어라고 썼는데, 알고 보니 외국에서 온 말이라면 그 가치가 굉장히 희석될 수 있다. 마치 잘 키운 내 자식이 알고 보니 남의 자식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아쉬운 것은 이런 것을 구별할 수 있는 기준, 즉 관련 용어집 및 사전이 없다는 것이다. 구분하고 싶어도 자료가 너무 적은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한국에는 전통주와 막걸리 문화와 산업에 뜻을 두고 일생을 바쳐 연구하고 교육하는 전문가가 많다. 이러한 연구가와 전문가, 그리고 전통주 계의 교육자들이 힘을 합쳐, 전통주와 막걸리의 전문 용어집, 즉 전통주 사전을 한번 만들어보면 어떨까? 100년이라는 근대의 역사를 통해 이미 밀착화되어 버린 일본식 조어를 당장에 대체하기는 어렵겠지만, 언젠가는 이러한 용어집이나 사전이 있다면, 그 기준과 척도를 후세에 남겨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후세가 그 기준으로 만든다면, 본래의 자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우리가 잃은 것은 불과 100년이지만, 이제까지 쌓아온 것은 전통주 문화의 본질은 수천 년이기 때문이다.


written by 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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