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을 바꿀 수는 없어요.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있다. 지금의 고통도, 슬픔도 시간이 지나면 다 사라질 것이라고. 하지만 이 약은 약효가 나기 전까지 꽤나 쓰고 고통스럽다. 그 사람이 나에게 했던 행동들이 견디기 힘들어 이별을 결심했는데, 막상 이별이 오니 너무 아팠다. 혼자 남겨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힘들어 자꾸만 과거의 사랑을 되돌리고 싶을 때도 있다.
이별 후 첫날, 기분이 너무 이상했다. 사랑을 속삭이고,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고, 끌어안았던 우리가 사라졌다니. 한편에 내 물건들과 자리가 있었던 그의 집에는 더 이상 갈 수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이직은 잘했는지, 또 요즘 아프다고 하던 곳은 괜찮아졌는지 이제는 물을 수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웠던 너였지만 이제는 없는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나를 무너뜨렸다. 당장이라도 전화를 걸어 묻고 싶었다. "우리 이제 못 만나?" 라면서. 어디 한쪽이 뻥 뚫려버린 느낌이었다.
서로 좋은 친구로 남자는 그의 말이 맴돌았다. 마지막 남은 미련을 모아 두고는 친구라는 말에 덕지덕지 발라두었다. 좋았던 시절이 떠올라 더 힘들까 봐 카톡 채팅창을 지우고 그의 프로필도 숨겨버렸다. 전화가 올까 봐 번호는 지우지 못했다.
내가 그에게 사랑을 더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면, 내가 좀 더 그에게 필요한 사람이었다면, 내가 지금보다 더 예쁘고 몸매가 좋았다면, 내가 그의 자유분방함을 더 이해했다면 우리는 달랐을까. 내가 좀 더 나답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괜찮았을까. 나는 또 나를 탓했다.
그 사람과 함께 하고 싶다고 나를 버릴 수는 없었다. 평생 그 사람 옆에서 나답지 못하게 있는 것보다, 나답게 혼자 있는 것이 나았다. 나를 비난하는 것을 멈추고,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우리는 어떠한 점에서 만나 함께 할 수 있는 끝까지 온 것이고, 서로 보는 방향이 달라 이제는 각자의 길을 가기로 선택한 것이라고. 우리가 같이 걷던 그 길은 생각보다 짧았고, 우리는 누구보다 가까웠기에 빨리 걸어간 것뿐이라고.
함께 했던 약속도, 기대도,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마음도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 그 사람 옆에 있는 나는 이제 없다. 이제 나는 지금 내 앞에 있는 나를 봐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입맛이 없어도 제때 밥을 챙겨 먹었다. 향 좋은 바디워시를 샀다. 나는 매일 무너졌지만, 또 매일 일어났다. 견디는 시간은 꽤 고통스러웠다. 시간이 약이라고 했으니 이 고통을 그대로 느껴보기로 했다. 모든 것은 복리니까, 고통은 지금 느껴야 제일 적을 것이었다. 그래야 약도 적게 들지.
감정이 태풍처럼 휘몰아쳤다. 이게 진짜 일리 없다며 부정했다가,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러냐며 분노했다가, 차라리 잘된 거라며 타협했다가, 어느 날은 혼자 있는 사실에 너무너무 우울해졌다. 그때마다 메모장을 켜 그대로 적었다. 울음이 나면 울었고, 화가 나면 화를 냈다. 혼잣말을 하기도 하고, 욕하고 싶으면 친구를 불러 욕을 했다. 내 편이기에 해줄 수 있는 "그래 잘 헤어졌어"라는 말도 매일매일 반복했다. 답답하면 어디로든 나가서 걸었고, 뛰었고, 운동도 시작했다. 뭐라도 해야 했다. 그렇게 내 안의 고통들을 다 털어내고 나니 비로소 무언가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3일. 1주. 몇 달. 시간이 흘렀다. 혼자 있는 시간은 더 이상 슬프지 않았다.
어느 날,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그가 나를 매몰차게 끊어내지 않았다면 아마도 나는 그 관계를 놓지 못했을 것이라고. 나는 '이 사람과는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가슴 깊은 곳에서 나오는 소리를 무시하면서 계속 끌려갔을 것이다. 그가 처음 보여주었던 마음과 나를 예뻐해 주었던 것들에 취해서. 그 손길과 온기가 계속 탐이 나서 놓기 싫었을 것이다. 끝끝내 나는 나를 비난하고 스스로를 바꿔가며 그 옆에 있으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런 내가 되지 않게 해 준 이별이 고마웠다.
이별은 아프고 힘들다. 하지만 이별은 일어났고, 그 사실을 바꿀 수는 없다. 지금은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이 시간들도 결국 지나갈 것이다. 조금씩 혼자 있는 시간들을 견디다 보면 정말로 시간이 약이 되는 날이 온다. 그러니 지금 이별의 고통을 겪고 있다면 조금만 더 이 시간을 견뎠으면 좋겠다.